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최봉영 선생님과 묻따풀을 재개하며 대화를 나눌 때 그 바탕에 '쪽인 나' 사상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제 스스로 얼마나 알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갑자기'라고 썼지만, 직접적 동기가 된 내용이 있습니다. 카톡방에서 말과글 계간지 180호에 실린 최봉영 선생님 인터뷰에 있는 다음 다발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갈라서 보면 안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한국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을 만들었습니다. 그걸 안 만들었으면 제 〈한국말 말차림법> 같은 것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문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가고 다른 식으로 갔겠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한 점도 있고 잘한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었다는 것을 저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박 대통령 한 사람의 시대가 아닙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사람답게 살아보려 발버둥 치던 시대입니다. 나 최봉영도 그 한 사람이란 말이지요. 그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제대로 살겠다고 한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가지고 흘러간 시대입니다.
이 글의 바탕에 '쪽인 나' 사상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거기서 바로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그게 뭔데?
머릿속은 자동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최봉영 선생님께 바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지만, '작동하는 지식'을 지향하는 지식 덕후에 어울리는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쪽인 나'는 제가 알기로는 최봉영 선생님이 정의한 이론의 일부이기 때문에 경험상 구글링은 효용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쪽인 나'를 키워드로 페북 검색을 해서 눈에 띄는 글을 추렸습니다. 이들을 토대로 글을 씁니다.
그전에 먼저 막연하게 느낌으로 알고 있는 '쪽인 나'에 대해 제 언어로 글을 써 봅니다. 논리적으로 허술할 수 있어도 현재의 기록을 남긴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느낌을 투영한다는 관점에서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충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쪽인 나는 어쩌면 불교 개념인 연기(緣起)와 비슷한 것일 수 있는데,
우리가 빅뱅의 결과물로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나(자아)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빅뱅과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우리 개체 그리고 문화와 사회 속에서 나라는 난해한 복합체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인식하는 방법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매 순간 잘 차리는 일이 행위와 행위 구조로써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묻따풀 후보'로 올려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 '묻따풀 후보'란 표현이 나왔으니 대강의 계획을 말씀드리죠. 일단, 스스로 적당히 풀어본 후에 최봉영 선생님과 교류를 통해서 개념을 차려볼 생각입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제가 썼던 글을 훑어봅니다. 첫 번째로 눈에 띈 글은 약 2년 전에 쓴 <쪽인 나와 무아론>입니다. 소제목으로 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행위자 이론에서 쪽인 나
무아론은 '나'의 실체가 단지 생각의 다발임을 깨우치는 것
관계에 대해 정의하지 않으면 객체 정의가 아니다
평소 독자님들을 위해 단락마다 소제목을 달아두는 일이 요긴하게 쓰이네요. 번역하면서 배운 tidyings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오래된 일이지만 다음 표를 보는데 직관적으로 '행위자'의 의미가 확 다가오는 듯합니다. 행위의 결과로 관계로 얽힌 누리의 존재 양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거창한 느낌이 들어 다른 표현도 떠올려 봅니다. 내 행동으로 인해 바로 주변 사람들의 기분이 바뀔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가을 야구 티켓 좋은 자리를 예매하면 어떤 누군가는 구매 기회를 잃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태들이 '쪽인 나'가 가정하는 양상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제 느낌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페북에서 발견한 지인의 글 속에 있는 도식을 인용합니다. 행위자로 어떤 일을 행할 때 그 바탕에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고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어떤 나'를 위해 행위를 합니다. 위하는 방식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이죠. 이때, 앞서 예를 들었던 주변의 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면 '쪽인 나'로 사고한다고 하겠습니다.
검색으로 찾은 다른 글을 더 보겠습니다.
2021년에 최봉영 선생님이 쓰신 《‘개인’과 ‘시민’과 '자유세계에 대해'》를 보면 담백하게 '쪽인 나'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상호관계적 자아는 나와 다른 것이 이쪽의 것과 저쪽의 것으로 마주하여, 함께 더불어 하나의 줏대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때 나는 이쪽 또는 저쪽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의 쪽으로 구실한다. 이러한 상호관계적 자아는 ‘쪽인 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쪽인 나'가 됨으로써, 마주하고 있는 것을 '쪽인 어떤 것'으로 맞아들여서 함께 할 수 있다.
'쪽인 나'도 좋지만 '상호관계적 자아'란 말도 명쾌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 서로 상보적이라 그런 것 아닐까 넘겨짚어 봅니다.
다음으로 역시 2021년 쓰인 윤여경 선생님의 [나와 나라]에 보면 '쪽인 나'가 포함된 손글씨 도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다발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하는 나'에서 '위하는 나'로의 전환은 동물이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동물은 저만을 위해 혹은 가족처럼 혈연으로 연결된 저들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은 남까지 것까지 고려하며 살아간다. 그 차이가 뭘까? 바로 '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독특한 생각과 소통 수단을 갖고 있기에 이 '말'을 통해 더 멀리, 더 크게 생각하고 욕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덕분에 '나=자아'가 가족을 넘어 작게는 업가인 직장, 직업, 학교, 크게는 국가와 세계라는 '나라=규정된 자아'로 확대할 수 있다. 나아가 '것'까지 확장하면 '나'가 지구와 우주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었다는 인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번에는 브런치에 '쪽인 나'에 대해 제가 쓴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 눈에 띈 글은 2022년 쓴 <쪽인 나를 세우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입니다. 그중에서도 '전체의 일부로 인식하는 사고방식'이라는 매듭말(=어구) 아래 있는 도식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림의 제목을 '상호관계적 자아'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흐릅니다. 하지만, <대칭과 대응의 흐릿한 경계를 묻고 따지다>를 쓴 덕분에 도식이 대응(對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림을 인용하니 더 확연히 보이는 내용도 있습니다. 관념 속에서도 관계를 인식할 수 있지만, 감각을 통한 인지 과정에서도 환경의 일부를 고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관계 속의 나'가 드러나네요.
다음으로 살펴본 글은 <우리의 터전인 '쪽인 나' 그리고 變-易-化>입니다. 제가 매일 아침 외우는 영화 역린에 나오는 중용 구절을 연상하면 쓴 글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세상의 변화와의 관계를 푸는 구절인데, 최봉영 선생님의 글귀 중에 이를 명확하게 풀어낸 글이 있어 인용한 것이죠.
한국말에서 되는 것을 뜻하는 ‘化’와 달라지는 것을 뜻하는 `變‘과 바뀌는 것을 뜻하는 ’易‘은 사물이 생겨나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는 일에서 매우 중요한 낱말이다. 누리에 널려 있는 모든 사물은 ’化-되는 것‘이라는 바탕 위에서 끊임없이 ’變-달라지는 것‘과 ’易-바뀌는 것‘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은 '變-달라짐', '易-바뀌어짐', '化-되어짐'을 바탕으로 變易, 變化, 敎化, 接化, 體化, 深化와 같은 개념을 끌어다가 온갖 것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일을 갖가지로 풀어낸다.
어쩌면 變-易-化는 사람이 살리는 일을 통해 누리와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양상을 나누어 본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글은 <온인 나로 또는 쪽인 나로 마주하기>인데요. 사람을 대할 때 드러나는 '쪽인 나'와 '온인 나'라고 압축할 수 있습니다.[1] 공감에 대한 명저 <당신이 옳다>에서는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를 지니는 한 가지 방식은 어쩌면 '쪽인 나'로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면 듣는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해 상대를 마주하면 다음과 같은 '비인간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됩니다.
느낌은 풍성해졌습니다. 마치 혼자서 브레인스토밍 한 기분도 들고요. 하지만, 차리기 위해서는 조금 더 훈련과 내공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 정도에서 최봉영 선생님과 대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기 전에 앞서 소개한 최봉영 선생님 인터뷰에 있던 다른 내용도 인용합니다.
발표할 때 나는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아실현(自我實現)이 아니고 자가실현(自家實現)이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자가의 ‘가’가 이게 ‘나’라는 뜻이에요. 본래 송나라 때 백화(白話)에서 ‘자가’는 ‘나’라는 뜻이에요. 근데 이 사람들은 ‘자가’를 자꾸 우리라고 생각해 버리는 거야. 집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게 아니다. 자가 실현이 개념이 맞는 거다. 그러니까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전통적 지식인의 딱 의식은 뭐냐 하면 자기실현이 아니라 자가 실현이다. 자기실현은 서양 사람들이 셀프 리얼라이즈 그거다.”
어제 어머니와 둘째 삼촌에 대해 이야기한 탓에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둘째 삼촌이 자기 가족을 위해 젊은 시절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쏟아부었는데, 형제간에 그에 대한 보답이나 배려, 평가가 부족했다는 내용이었죠. 저는 어쩌면 자가실현(自家實現)이 공동 가치였던 시절에 급격하게 근대화를 겪으며 핵가족화가 되면서 가치관이 분열된 것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역시 '쪽인 나'와 연관성이 있다 싶어서 기록으로 덧붙입니다.
[1] 압축할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스스로 축적을 만들어 낸 자신을 칭찬하며 지식 덕후 자격을 인증합니다.
(7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76. 한국인은 상황을 즐길 때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
77.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나는 배움
78.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키우는 다양한 맛과 문화
84. 사람이 마음 그릇의 울림판을 통해 함께 떨고 운다
85. 몸과 마음을 통해서 대상에 대한 느낌과 앎을 갖는다
86. 열린 우리주의(홍익인간)와 닫힌 우리주의(집단이기주의)
87.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밑바탕 마음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