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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면 내가 쓰던 말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 길들이기

by 안영회 습작

<사라져 버린 신화의 자리에 채워 넣을 무언가가 필요한가>에 이어 <먼저 온 미래>의 8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고 쓰는 글입니다. 글이 길어서 세 편으로 나눠서 쓸 예정입니다.


도구적 가치와 근원적 가치라는 이분법

다음 다발말[1]에서 '낭비할 만해'라는 말은 귀가 솔깃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남치형 교수는 바둑의 도구적 가치와 근원적 가치를 구분했고, 근원적 가치로 '재미있다'라는 것을 들었다. "어떤 일을 남한테 권할 때는 권하는 이유를 말해줘야 하죠. 그런 때 그 일을 하면 돈을 번다든가, 건강이 좋아진다든가. 그런데 그런 말들은 진짜 이유가 못 된다고 생각해요. 그 일을 하면 어떤 유용성이 있다는 식의 설명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 정말 재미있어, 내 시간을 거기에 낭비할 만해' 이런 말들이야말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해요."

물자가 풍부해지고, 나아가 화폐를 근거 없이 찍어 내며 국가가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현실을 보면,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시간임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저자는 남 교수님의 논리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하게 되는 날에도 여전히 인기를 누릴 것이다'라는 논리는 얼마나 견고할까?

이미 이 책을 읽고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을 쓰며 기술이 환경으로 작동하는 일에 교수들은 둔감해지는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2]

주관적 효용이 외부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우선 재미는 맥락에 좌우된다. 근무 시간이나 수업 시간 중에 하면 재미있는 어떤 일들이 여가시간에 하면 별로 재미가 없다. 가벼운 여흥으로 하면 재미있고 진지한 승부로 하면 재미없거나, 그 반대인 일도 있다. 남들의 인정이 재미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더불어 학창 시절 사회 시간에 배운 듯한 '환경 결정론 對 가능론' 구도도 함께 떠오릅니다.

어떤 일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 그 일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바뀌며, 그 일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도 바뀔 것 같다. 재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저자는 남 교수님이 자신의 맥락 안에서만 사안을 본다고 평가한 듯합니다.


질적인 변화가 생기면 개념 리팩토링이 필요하다

어쩌면 남 교수님은 인공지능이 교수 자리를 위협하지 않아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다발말입니다.

"이거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큰 것 같아요.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그럴 텐데, Al보다 사람이 낫다고 하려면 감정을 말할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이 대국에 임하는 마음, 그게 반상에 드러나는 심리전·· 이런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약간 그런 생각이죠. 알파고가 나오지 않았으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책을 통해 접하는 바둑 기사들을 보는 입장은 확실히 상실감과 절박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상황입니다. 반면에 아직 제 자리 자체를 인공지능이 위협하지는 않지만, 개발자라는 과거에 형성된 직업 개념이 앞으로는 분명 상당히 바뀔 듯합니다. 분명히 인공지능은 개발자의 역할 모델도 바꿔 놓고 있습니다.


재미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러한 질적인 변화는 유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다발말입니다.

나는 아마 자동차의 발명이 승마의 재미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가치들의 부족이나 결여, 감소를 지적받고 '난 재미있어'라고 논쟁을 끝내려는 사람은 자신이 재미 외의 다른 가치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음을, 자신이 얄팍한 인간임을 폭로할 뿐이다.

다음 문장을 읽을 때 저는 속으로 '개발도 마찬가지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재미에는 처음 발견하는 감각에 대한 즐거움과 성취감,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낯선 묻따풀: 재미란 무엇인가?

저자는 고전 소설을 예로 들어 본질적 재미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죄수들은 장인이 된 뒤 외부에서 일감을 받아 돈을 벌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그 돈을 당장 쓸 수 없다 하더라도, "돈이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만 해도" 큰 위안을 얻었다. 미래에 대한 보잘것없는 희망이라도 현재에 큰 기쁨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그 희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서 남 교수님의 생각이 안일하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여러 분야에서 아마추어들이 느끼는 재미가 인공지능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분명 영향은 받으리라 생각한다.

재미란 무엇인가?

기묘하게도 이 논의를 오래 할수록 우리가 인공지능만큼이나 재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된다. 대체 재미라는 게 뭘까? 무엇이 재미있는 것이고, 재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엇일까?

최봉영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몰랐을 '묻따풀'이 떠오릅니다. 재미에 대함 묻따풀 기록은 희귀한 듯합니다.

2016년에 『재미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낸 사회학자 벤 핀첨은 서문에서 "사전적 정의를 제외하면, 재미를 정의하거나 다른 사회적 경험과의 차이점을 설명한 글은 없다시피 하다"라고 썼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때때로 재미가 있거나 재미가 없다는 것을 빼고는 재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거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괴상한 일이다. 우리는 재미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독서 목록에 넣어야 하나 하다가 뒤통수를 맞는 듯합니다.

재미보다 더 큰 개념인 가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가치가 뭔지 잘 모른다.

재미보다 더 큰 개념인 가치도 마찬가지니까요. 다행히 작년에 쓴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포함하여 가치에 대한 고민은 꽤 길게 해 왔기 때문에 저자의 전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석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단락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특정 직업을 두고 일반화하는 일은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어제 가까운 지인이 친구인 교수들이 AI를 쓰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에게 대안이 있는 양 말하는 모습을 저에게 했던 것이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쓴 글

1.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당할 창작의 미래

3.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4.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5. 인공지능은 언어로 만든 추상적 구조물을 변하게 하는가?

6.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

7. 사라져 버린 신화의 자리에 채워 넣을 무언가가 필요한가


지난 인공지능 길들이기 연재

(25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5.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예측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가?

26. 인공지능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을까?

27. 인공지능은 새로운 표현 방식과 언어를 제공한다

28. 다양한 수준에서 AI에 따른 직업의 변화를 면밀히 보자

29. 인공지능의 들쭉날쭉함을 포용하기

30.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 당할 창작의 미래

31. 인공지능은 허구적 믿음을 이식받은 놀라운 기계

32.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33.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34. 인력을 유지하면서 AI를 이용해 생산량을 늘리자

35. 인공지능은 사회 시스템을 바꿀 것이다

36.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어때야 하는가?

37. 인공지능은 언어로 만든 추상적 구조물을 변하게 하는가?

38. AI가 위협하는 정규 교육 후에 진행되는 견습 시스템

39.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

40. 사라져 버린 신화의 자리에 채워 넣을 무언가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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