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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버린 신화의 자리에 채워 넣을 무언가가 필요한가

인공지능 길들이기

by 안영회 습작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에 이어 <먼저 온 미래>의 7장 <새로운 일자리, 혹은 '죽음의 집'>을 읽고 쓰는 글입니다.


바둑 중계의 변화에서 보이는 전문가 권위의 추락

저자는 바둑 중계의 변화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바둑 중계를 보자.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바둑 중계는 인공지능이 도입된 이후 경마 중계와 흡사해졌다. 알파고 이전까지 바둑 중계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가장 답답했던 것은 '누가 얼마나 우세한지 알 수가 없다'라는 점이었다. <중략> 최고수들이 온 힘을 기울여 실력을 겨루는 난해한 대국에서는 진행자는 물론이고 해설자까지 대국자들의 수 읽기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다음은 박정상 9단의 인터뷰 내용인데, 바둑 중계를 본 적이 없는 저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그런 실력에 더해 인공지능의 판단을 인간의 감성으로 풀어서 시청자에게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해요. AI 추천수가 당장은 이해가 안 가도 중계실에 컴퓨터가 있으니까 변화도를 찍어보면서 추적하다 보면 웬만하면 거의 이해돼요. '인공지능은 지금 이런 길을 봐서 이 선수의 승률을 이렇게 평가했지만 이건 인간의 길이 아니고 저 선수도 이런 길을 보고 있을 리가 없으니 제 생각에 승률은 이럴 거 같습니다' 하는 식으로 풀어서 말씀드리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해설 방식뿐 아니라 관전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알파고 이전 바둑 팬들은 일류 기사들의 대국을 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수가 나오면 존경심을 품고 '저 기사는 왜 저 자리에 돌을 둔 걸까' 하며 고심했다. 이제는 AI 추천수와 비교하며 '저 양반은 꼭 중반에 저런 실수를 잘 하더라' 하고 품평한다.

조혜연 9단은 이들을 '방구석 관전객' 또는 '방구석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제가 '축덕질'이라고 불러온 축구 경기를 소비해 온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1]


바둑 해설의 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에 대해 저와 작가의 방향성은 조금 다른 듯합니다. 먼저 저자가 던지는 질문을 먼저 다루고 이어서 제 생각을 따져 보겠습니다. 저자가 바둑 기사가 아닌 독자들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운전을 할 때 늘 내비게이션이 제안하는 경로를 따라간다면, 나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는 걸까, 내비게이션의 명령을 받는 걸까? <중략>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매번 인공지능의 제안을 충실히 따른다면,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걸까?


예술이라는, 또는 고수라는 토템들이 무너질 때

저자는 주로 영화나 예술 분야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관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의 중요한 토템을 모욕당해 화를 내는 원주민처럼 보였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창의성과 고유성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인공지능을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기술 그 자체가 환경 변화의 일부라는 앞선 장의 통찰을 다시 설명합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변하고 뒤바뀐다. 나를 둘러싼 기술-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그 영향을 받는다. 내가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을 고집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나는 예전처럼 살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한 세대 뒤면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인공지능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연일 이어지는 테크 자이언트들의 발표와 이를 전하는 추종자들을 보면 저자의 예언이 과언이 아니라고 믿게 됩니다.


저자가 예술가들의 불편함을 두고 '토템들이 무너질 때'라고 표현했을 때는 그럴듯한 비유라 여겼습니다. 스스로 예술을 한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탓이죠. 그런데, 토템이라는 비유가 만일 '예술'이 아닌 '전문성'을 가리킨다면 제 입장도 바뀔 듯합니다.


무엇이 전문가를 만드는가?

저자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물리화학자이자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의 주요 업적이 바로 '암묵지暗默知(tacit knowledge)'라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암묵지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으로 익힌 지식이다.


바로 그런 암묵지를 익히는 방법을 깨달은 기술을 우리는 딥러닝이라고 부릅니다.

인공지능에게도 '얘는 고양이란다, 얘도 고양이야, 얘도 고양이야' 하는 식으로 고양이가 무엇인지를 가르칠 순 없을까? 있다. 머신러닝(기계학습)이 그런 접근법이며, 그중에서도 인간의 뉴런 구조를 본뜬 인공신경망 기법, 다시 그중에서도 딥러닝이 현재 가장 각광받는 방법론이다. 알파고가 바로 딥러닝의 산물이고, 딥러닝이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린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한편, 저자는 인공지능이 강력한 도구라도 해도 사용 주체는 인간이라며 일자리에 대해 낙관적인 의견에 반대하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새로운 일자리는 계속 생길 것'이라고 말할 때, 일자리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회적 가치와 자긍심의 원천인가, 아니면 내가 계좌로 상당한 돈을 꾸준히 입금받는 어떤 이유를 말하는가?

나아가 다음 구절을 볼 때면 저자가 '전문성'을 일자리의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실력이 암묵지를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중략> 암묵지는 많은 인간 전문가에게 단순히 그들이 보유한 지식 상품이 아니라, 자기효능감과 자부심, 자존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에게서는 현장 업무에 대한 애착, 매일의 작업을 일종의 수련으로 여기는 자세, 더 나아가 자기 직업을 삶과 동일시하는 경향 등이 나타난다.


무엇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꼭 전문가만의 전유물일까요?

현장 업무에 대한 애착, 매일의 작업을 일종의 수련으로 여기는 자세,
더 나아가 자기 직업을 삶과 동일시하는 경향


저는 평생 전문직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퇴직하신 후에 겪은 상실감에도 저자가 쓴 표현들을 그대로 대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의 제기한 문제를 둘로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는 내 일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 혹은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는 믿음이 우리가 활력을 느끼는 데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결과물의 질이 뛰어나더라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 보조 인력이라고 느낀다면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앞서 바둑 해설의 변화를 보면서 떠오른 저자의 이야기 전개와는 다른 생각이기도 한데, 바로 사회 진화와 적응이라는 관점입니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에서 배운 개념을 쓰면 우리는 움벨트 속에서 과거의 경험을 긍정하며 인공지능에 대해 적대감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 말마따나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라면 주어진 것으로 보고 대응하는 방법이 여생을 더 낫게 보내는 방법이란 느낌이 듭니다.


저자가 자조적인 분위기의 글 사이에 인용했던 세계 최강자인 신진서 9단에게서는 적응한 사람의 태도가 보입니다.

예전에는 저 정도의 위치라면 제가 두는 수는 거의 정답이 돼야 했겠죠. 그런데 이제 AI가 그 수를 떡수라고 하면 중계를 보시는 분들은 '저 사람은 랭킹 1위인데도 저런 수를 두는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해설자에게 기대하는 내용을 전하는 전문가의 말은 적응을 말합니다.

해설자가 자기 생각을 얘기하면 시청자들이 되게 싫어해요. '인공지능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자기가 뭘 안다고 얘기해' 하는 반응들이 있어요.

한편, 안성문 바둑전문기자의 말도 비슷하죠.

과거처럼 존경받는 예인이나 도인의 취급을 받을 수가 없죠.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는 게 중요한 요소인데 예전하고 비교도 안 되게 인정을 못 받죠.

사실 이러한 변화는 꼭 인공지능 탓만은 아닌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일부란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숏폼 콘텐츠의 시대에 바둑 동호인의 수는 줄고 있고, 그런 가운데 인공지능이라는 타격이 가해졌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문학계가 인공지능의 영향을 받을 때도 그런 식일 것 같다. 다른 여러 복합적인 원인으로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인공지능이 타격을 가할 것이다.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요구하는 Bullshit job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직업은 소설가이며, 나는 그 직업을 사랑한다. 그런데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인간 소설가의 시장 가치는 추락한다.

소설과 자신의 직업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과 시장 가치가 별개란 점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사고 실험을 통해 인공지능 업계가 주장하는 기본 소득이 충분히 주어질 경우를 따져 봅니다.

솔직히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할 거 같다. 나 말고 다른 소설가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글을 써도 우리가 받을 돈을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중략> 그러면서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건 소설이 아니며, 소설가의 일도 아니다. <중략> 인간 소설가로서의 내 일자리는 지켜진 걸까? 이때도 나는 만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중략> 그렇더라도 일자리가 아예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급여가 충분해도 '목적 없는' 직업을 설명하기 위해 '불쉿 직업'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죠.

가상의 미래 출판사에서 인간 소설가로 일하며 괜찮은 급여를 받는다면, 나는 그 직업이 불쉿 직업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레이버는 불쉿 직업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허위와 '목적 없음'을 꼽았는데, 가상의 미래 출판사에서 일하는 인간 소설가는 거기에 다 해당하는 것 같다.


사라져 버린 신화의 자리에 채워 넣을 무언가가 필요한가

저자가 소개한 불쉿 직업이란 개념은 유용한 철학적 사유를 돕습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2013년 '불쉿 직업(bullshit job)'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몇 년 뒤에 그 개념으로 책을 썼다. 그레이버는 현대 사회에는 통째로 사라져도 세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직업, 종사자들조차 속으로는 쓸모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불쉿 직업'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소제목을 통해 불쉿 직업이 '감내할 가치가 없는 고통'에 해당한다는 명료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조만간 소설가는 감내할 가치가 없는 고통을 받아들이거나 직업을 바꿔야 할 처지에 처한 듯합니다.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가 상상한다.

영적(靈的) 체험이란 표현은 앞서 저자가 쓴 토템을 떠오르게 합니다.

자신이 어떤 일에 대단한 정신적 에너지를 들여 남들보다 나은 결과물을 내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과정은 영적 체험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죠.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인이 모두 무교인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보편 가치 입장에서 쓴 글이겠지만, 보편 가치는 모호한 말입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를 쓰며 다시 발견한 '신화의 힘'이 떠오릅니다. 절대적인 종교는 사라졌지만, 누구나 대체물에 해당하는 토템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2020년판 모던 타임스

한때 저는 사회적 가치와 시장 가치에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지금 보면 시장주의자라고 스스로 공언하는 일에 해당했는데,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치'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란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을 때는 몇 가지 생각이 겹쳐졌습니다. 처음에는 트럼프의 재선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대표적 현상으로 떠올렸습니다. 다음으로는 '한국제 자동차'가 원인으로 작동한 점이 묘하게 느껴졌죠.

2000년대 들어 선진국에서는 중산층이 붕괴되는 현상이 일어났고, 그 큰 원인은 세계화와 자동화로 인한 중산층 일자리 감소였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블루칼라 노동자가 값싸고 질 좋은 한국제 자동차 때문에, 혹은 공장에서 도입한 조립 로봇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중산층에서 밀려났다. 이후 값싼 일자리를 전전하는 동안 그는 좌절감에 빠졌고 값싼 일자리에서 이민자들과 경쟁하면서 정치적 극단주의에 끌렸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어서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도 양상만 다를 뿐, 비슷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그렇게 따져 보니 소위 이대남으로 불리는 일부 젊은 남성들의 극우 행태는 미국의 민주주의 붕괴의 대한민국 버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장의 마지막에 제시한 저저의 문제를 일부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르게 문제를 보고 싶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삶의 가치에 대해 사회에 의존하여 답을 내는 방식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는 근면과 노동을 가치로 믿고 살았던 새마을 운동 시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년을 보며 깨달은 점과 일치합니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지식 노동자들에게 비슷한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 소외라는 말은 무성영화시대부터 계속되었던 말임을 생각해 보면 작가는 모던 타임스의 인공지능 버전을 쓴 것이란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생각의 주제는 저자의 이야기를 많이 벗어납니다. 저자는 종교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신화의 힘'은 작동한다고 믿습니다. 신화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주석

[1] 하지만, 인공지능이 축구선수의 미려한 움직임을 능가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로봇의 축구 경기를 집중해서 볼 가능성이 0%라는 점입니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를 읽는 덕분에 인간의 본능 덕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개구리를 봐도 우리의 욕망 회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개구리와 짝짓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구리는 우리 유전자의 미래와 별로 상관이 없다. 반면 1장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여성의 동공 확장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 성적인 관심과 관련해서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쓴 글

1.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당할 창작의 미래

3.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4.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5. 인공지능은 언어로 만든 추상적 구조물을 변하게 하는가?

6.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


지난 인공지능 길들이기 연재

(23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3. 포토샵 대신 나노바나나로 갈아타는 첫 발을 떼다

24. 페르소나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재주를 모방하기

25.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예측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가?

26. 인공지능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을까?

27. 인공지능은 새로운 표현 방식과 언어를 제공한다

28. 다양한 수준에서 AI에 따른 직업의 변화를 면밀히 보자

29. 인공지능의 들쭉날쭉함을 포용하기

30.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 당할 창작의 미래

31. 인공지능은 허구적 믿음을 이식받은 놀라운 기계

32.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33.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34. 인력을 유지하면서 AI를 이용해 생산량을 늘리자

35. 인공지능은 사회 시스템을 바꿀 것이다

36.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어때야 하는가?

37. 인공지능은 언어로 만든 추상적 구조물을 변하게 하는가?

38. AI가 위협하는 정규 교육 후에 진행되는 견습 시스템

39.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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