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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un 04. 2016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씨앗 키우기

26.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닫는 글

트위스트 교육학을 여는 글에 ‘아마도 이 강의를 듣고 남기는 기록들은 강의 내용과 내가 어떤 동작으로 트위스트를 췄는지에 대한 것일 거다. 그게 때론 물 흐르듯 경쾌한 동작일 수도 있고, 때론 스텝이 꼬여 흐름이 끊긴 어색한 동작일 수도 있다.’라고 쓰며, 트위스트 교육학을 듣는 각오를 밝혔다.

그 글을 쓴 지 46일 만에 드디어 그렇게 바라고 또 기다리던 닫는 글을 쓰게 됐다. 과연 나는 어떤 스텝을 밟으며 강의 내용과 함께 트위스트를 춘 것일까?               



▲ 동섭쌤의 '박동섭은 누구인가?'로 시작된 강의. 그렇게 매주 월요일마다 강의가 열렸다.




트위스트 교육학 후기는 도전이다 1 - 일상을 서술하기  

   

소감을 말하기 전에 트위스트 교육학 후기는 나에겐  가지 의미로 도전이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겠다.

첫 번째 도전은 ‘특별한 일만 남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일상적인 얘기로 후기를 써나가게 됐다는 점이다.

예전부터 글을 써오긴 했지만, 부담되는 내용일 땐 쓰지 않았으며, 쓴다 해도 한 편으로 짧게 쓰는 정도였다. 그렇게 한 데엔 특별한 일만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하여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내용으로 기억될 정도의 사건이 아니면,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상은 반복된다. 그러니 지겹고 아무런 감흥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걸 쓰면 자질구레하게 반복적인 어구로 써나가는 일기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일기는 숙제로나 쓰는 글이기에 심지어는 나조차도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일상적인 사건이라면 아예 쓰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동섭쌤이 예전부터 주구장창 말했다시피 ‘서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말처럼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을 드러낼 수 있고, 일상에서 ‘ㄹ’을 빼서 이상하게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좀 더 일상에 밀착하여 들여다보고 그 생각을 정리해나가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그건 더 이상 일기의 자질구레함이 아닌, 일상의 자세한 묘사이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된 후엔 학교에서 여행을 갔던 이야기, 도배했던 이야기, 이사했던 이야기 등과 같이 일상적인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처럼 이번에도 강의의 내용에 나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버무려 담아내야 한다.               



▲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예전엔 안 쓸 도배했던 이야기를 썼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도 나간다.




트위스트 교육학 후기는 도전이다 2 - 부담은 내려놓고 그 당시 기록하기

     

두 번째 도전은 ‘대충 쓴 글은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담담히 나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은 함께 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기에 당연히 공개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은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의식의 흐름에 따라 편안하게 써지는 글들은 공공성도 없으며 생각할 거리도 없기 때문에 값어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엔 ‘잘 쓴 글 / 못 쓴 글’이란 판단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 합당할 때만 글을 쓰겠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그건 또 달리 말하면, ‘잘 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척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글에 대한 부담감은 커지기에 손조차 대지 못하게 된다. 의미를 담아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쓰기 전부터 ‘과연 내가 그런 글을 쓸 수나 있나?’하는 생각이 나를 짓누르며 모든 생각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담을 심하게 느낀 채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개인적인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2012년에 있었던 우치다쌤의 첫 강연, LEEL에서 들은 나카자마쌤의 강연, 2013년에 에듀니티에서 들은 모로 유지의 강연 등은 기억의 저 편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마 이런 경우를 일컬어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라 할 수 있을 텐데, 시간이 지난 다음에 사진만 보고 있으니 너무나 아쉽고 아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잘 쓴다 / 못 쓴다’의 이분법적인 판단 기준에서 벗어나 그 때 당시에 강의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가벼운 마음으로 써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 2013년에 에듀니티에서 있었던 강연. 하지만 쓰지 못한 후기이니, 그 때 무슨 말이 있었는지 알 수도 없다.




트위스트 교육학 후기는 도전이다 2 -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하기  

   

세 번째 도전은 5주 동안 쉴 새 없이 진행되는 강의를 듣고, 그 기간 동안 긴장을 풀지 않고 써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강의 후기들은 2~3시간으로 진행되는 특별강의 한 편을 듣고 와서 남기는 정도였다. 최초로 남긴 후기는 윤구병 쌤의 ‘아이들이 놀아야 나라가 산다’는 전혀 윤구병스럽지 않은 주제의 후기였는데, 첫 후기답게 생각만을 짧게 담는 정도였다. 그 후에 단재학교에서 근무하며 강의를 많이 듣게 됐고 그에 따라 후기를 쓸 기회(첫 후기도 동섭쌤 후기다)도 많아졌다. 그런데 그 때도 한 편을 넘기진 못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써지던 후기는 작년 우치다쌤의 전주-제주 강연의 노검파일을 듣고 후기를 남기게 되면서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전주 강연은 2편으로 후기를 쓸 수 있었고, 제주 강연은 무려 6편의 후기를 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 이후로 다른 강의를 듣고 후기를 쓰더라도 짧게는 3편에서 6편까지 후기를 남기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강의 후기를 남기는 것에 자신감도 생기고 탄력도 받다보니, 이번에도 ‘연강이면 어쩌랴, 그걸 모두 남기면 그 뿐인 것을’이라는 ‘자뻑’스런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 한 번 탄력이 붙으며 6편을 완성하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도전은 반절의 실패, 반절의 성공 

    

그런데 솔직히 그런 계획은 만용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어지는 5번의 강의를 듣고 그 강의들을 한 편으로 압축하는 형태의 후기가 아닌, 한 강의 당 4편 이상의 후기로 써나가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으니 말이다. 강의는 매주 꼬박꼬박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지난 주 강의 후기는 모두 마쳐야만 한다. 하지만 학교 업무도 있고, 글도 써지지 않을 때가 있으니,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늘 시간에 쫓기듯 좌불안석해야만 했고, 강의를 들을 때조차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라는 부담에 집중이 방해되기도 했다.



▲ 매 강의를 들으러 갈 때 피크닉을 간다는 느낌으로 편하게 가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런 식으로 강의를 듣고 연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더욱 긴장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썼던 연재글은 모두 여행기(도보여행, 사람여행, 지리산 여행, 카자흐스탄 여행,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뿐이었다. 그런 글을 쓰며 ‘나도 이젠 어떤 것이든 연재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나 보다’는 자만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여행은 모든 여행이 끝난 후 차후적으로 그 상황을 되돌아보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기에,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써나가면 된다. 하지만 강의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되, 이해한 내용을 나의 생각과 버무려 써나가야 한다. 의식만 따르다간 사변적인 후기가 되고, 강의내용만 서술하다간 딱딱한 전문서가 된다. 그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며 나의 생각으로 버무려 내는가가 중요하다 보니, 긴장도는 높아지고,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열정은 사그라지고 체력은 달렸으며, 이해력은 현저히 떨어져 갔다. 그러니 쓰면 쓸수록 글의 퀄리티는 떨어졌고, 그럴수록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여는 글은 첫 강의가 있던 4월 18일에 썼고, 닫는 글은 이미 강의가 끝나고 이주나 흐른 시점인 6월 4일에 마무리를 짓게 됐으니, 꼬박 46일 동안 트위스트 교육학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이 만용을 부리다가 ‘제 꾀에 넘어간 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 깜냥이 되는 줄 알고 무작정 도전했다가, 엄청 데였다. 강의가 끝나고 갈 땐 상쾌한 기분과 함께 부담이 밀려왔다.




다섯 번의 트위스트 교육학은 신명나는 한 판 춤

     

이런 고뇌를 7주 가까운 시간 동안 느끼며 보낸 후에, 마침내 닫는 글을 쓰고 있으니 지금의 감회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그렇다고 다섯 번의 강의를 듣는 내내 괴롭고 힘들기만 했냐 하면 전혀 그렇진 않다. 강의 후기를 써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고 강의를 들었다면, 이 강의는 트위스트를 추듯 경쾌하고 유쾌했을 테니 말이다.

첫째 강의의 제목은 ‘하품수련의 역설’이다. 이 강의는 하품을 배우러 온 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우리가 지녀왔던 공부에 대한 생각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누군가 ‘망치로 철학하기’란 말을 했다시피, 동섭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망치로 교육하기’를 재창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강의를 들으며 ‘공부란 여행이고, 그 여행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고 싶은 그 마음 하나로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둘째 강의의 제목은 ‘신발 떨어트리는 사람과 신발 줍는 사람’이다. 첫 강의에서 말한 ‘수업이란 역동의 장이며, 활발발한 교류의 장’이란 생각을 한 단계 더 나가게 함으로, 배움에 대한 지평을 넓혔다. ‘배움의 기본은 오해다’라는 말과 함께 ‘배우는 자는 욕망하는 자’라는 말은, ‘성공하기 위해 배운다’와 같은 상식을 비상식으로 만들며 여러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니 이땐 학생 시절엔 미처 느껴보지 못한 알아간다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셋째 강의의 제목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이다. 당연하게도 ‘수업을 잘하는 교사’,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사’, ‘수업 도중에 질문을 많이 하는 교사’, ‘학생들과 함께 무언가 만들어가는 교사’가 좋은 교사라 생각했고, 그런 교사들이 칭송받는 학교가 좋은 학교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강의에선 그런 교사를 좋은 교사로, 그런 학교를 좋은 학교로 생각하는 사회가 얼마나 이상한 사회인지 알려주며,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의 숨겨진 매력을 알려줬다. 아마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의실에 있던 교사들은 충격에 휩싸였겠지만, 그럼에도 ‘아, 나도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넷째 강의의 제목은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은 곳으로 하기 위해서는?’이다. 우린 너무도 학교에 익숙해져 있고, 아무런 생각 없이 지금껏 그래왔듯 행동을 하면서 ‘교육적인 행동’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강의에선 그런 지극히 학교적인 모습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큰 문제일 수 있음을 알려줬다. 상대평가를 통해 상위 등급인 학생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우대하는 학교 시스템에 대해, 학교의 대화법인 ‘I-R-E 대화법’이 얼마나 학생들을 옥죄는 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했다.





다섯째 강의의 제목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가치관은 ‘등가교환’이다. 얼마를 지불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바라며, 얼마를 공부했으니 그에 대한 성취를 바란다. 하지만 공부란 애초에 등가교환의 마인드론 할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며, 증여의 마인드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드디어 배울 수 있고, 삶은 풍요로워지며, 관계는 깊어진다. 그리고 증여의 마인드를 지닌 사람만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에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씨앗, 키워내기

     

이제 우린 드디어 트위스트 교육학의 길고 긴 여정의 끝자락에 서 있다.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쉼 없이 이어졌고, 그건 나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강의를 한 번 들은 것만으로,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한 번 읽어본 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엄청나게 바뀔 리는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들어보려 했고 고민하려 했으니, 기본적인 생각에서 미세한 차이라도 생겼을 것이다. 좋다, 그처럼 아주 보이지도 않는 작은 차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리고 그 씨앗을 키워보자. 그러면 그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 어느 순간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릇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무릎을 끊고 앉아서, 공경히 책을 대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고 뜻을 다하며, 자세히 생각하고 함영(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함)하여, 깊이 뜻을 이해하고, 구절마다 실천할 방법을 구해야 한다.

만일 입으로만 읽어서 마음에 체득하지 않고 몸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일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凡讀書者, 必端拱危坐, 敬對方冊, 專心致志, 精思涵泳, 深解義趣, 而每句必求踐履之方.

若口讀而心不體, 身不行則, 書自書我自我, 何益之有?  -『擊蒙要訣』 「讀書章」



▲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강의는 강의대로, 나는 나대로.


          

예전이라 해서 많이 다르진 않았나 보다. 그래서 책을 읽어 과거시험에 통과하고 입신양명하여 위세 높은 권세가가 되었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만을 했을 뿐 고민해보거나 그걸 행동해야겠다고 생각도 하지 않으니, 책은 책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 무엇이 좋을까?

그처럼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도 하나의 강의일 뿐이다. 다섯 번의 강의를 듣고 나면 시간은 흐르고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 그럴 때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고 어떤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저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고 아무런 생각의 변화조차 없다면, 역시나 강의는 강의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그런 강의는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이 강의를 들으며 미세한 차이란 씨앗을 품었다면, 이제 거침없이 그 씨앗에 물을 주고 햇살을 비춰주고 맘으로 응원하며 키워갈 일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대여, 이제 씨앗을 키울 때다.



▲ 다시 길에 놓였다. 하지만 이 길은 더 이상 혼란을 안겨주는 장소, 미지의 불안만이 넘실거리는 곳도 아니다. 다시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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