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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Jun 29. 2018

번역시장이 고인물이 되는 이유

번역시장에 고인물이 만들어지는 이유

제 두 번째 책인 <일본졸업>이 교보문고 사회/정치 인기도서, YES24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일본졸업> 절찬 판매중!

제 세번째 책인 <돈, 역사의 지배자>가 발간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p0xmLRNcRM


** 유튜브 채널의 좋아요, 구독, 알림설정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Dv0ZRVwcRvI2xfpEh5EPBw/videos


<외국어 편 13>


1. 외국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 

2. 외국어 공부에 좋은 드라마 : 영어 편

3. 외국어 공부에 좋은 드라마 : 결혼으로 배우는 일본어

4. 외국어 공부에 좋은 드라마 : 중국어와 중국문화

5. 외국어와 문화장벽의 상관관계?

6. 외국어 배울 때 콘텐츠 잘 골라야 하는 이유

7. 보면서 배우는 외국어, 이게 최고다

8. 외국어 공부하기 좋은 영화란? : 영어 편

9. 외국어 공부하기 좋은 영화란? : 일본어 편

10. 외국어 공부하기 좋은 영화란? : 중국어 편

11. 왜 번역을 보며 화를 내야 하는가?

12. 좋은 번역이 돈이 되냐고?

13. 왜 번역가를 안 바꿔?


저번에는 번역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응이 의외로 뜨거웠고 브런치 메인에 처음으로 올라가는 영광까지 얻었다. 이에 조금 용기를 더 내서 이번에는 왜 번역가를 못 바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한 가지만 이해하면 쉽다. 번역이라는 것은 결국 사업이며


사업, 업무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비극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우선 100점짜리 번역이란 것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오역은 번역가나 기업체나 신경을 쓸 사안이긴 하지만 오역 자체가 번역가를 바꿀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 이윤기 선생님께서는 '그리스 인 조르바'의 오역이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다. 저자는 그분의 수필집을 참 좋아하는 데 한 에피소드를 여러 책에 같이 쓰는 성향을 감안해도 그리스 인 조르바의 오역 이야기가 너무 자주 나온다. 이 책이 상당히 읽기 쉬운 좋은 번역임을 감안하면 완벽주의자의 마음에 남은 작은 부채 이리라.


저자도 이불이 뚫어질 정도로 이불 킥을 많이 한 사람이고 책장에 꽂힌 오역이 들어간 물건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이게 저자만의 경험은 아닌지 업계 톱클래스의 베테랑 번역가도 오역으로 인해 고생한 경험을 토로하고 한다(물론 다 오역이라고 지적해도 끝까지 우기는 사람 또한 제법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오역 때문에 번역가가 교체될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오역은 누구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도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이 번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회사에서 이야기를 꺼내도 '누가 해도 오역 난다', '그 번역사는 오역 안 한다는 보장은 있는가?'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다른 번역사가 오역을 안 한다는 보장은 없기에 거기서부터 개혁은 헛돌기 시작한다.

[출처 : 그리스 인 조르바]

기준이 다르다


애초에 우리 소비자와 번역회사는 번역가를 고르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 우리는 데드풀의 황석희씨처럼 영화의 맛을 원문보다 더 잘 살려내거나 만화전문 번역가인 서현아씨처럼 한 번 읽으면 쏙쏙 들어오는 번역을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번역을 맡기는 회사에게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다. 저번 글 (11번 글)을 읽으셨으면 눈치 채셨겠지만 정작 그들이 선호하는 것은 퀄리티가 아니라 속도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오역이 난무해도 번역을 진행하는 PM이 원하는 시간, 때로는 다소 무리한 시간에도 번역물을 딱딱 맞춰서 납품해주면, 그게 최소한의 상품 퀄리티만 된다면 그는 이쁨받는 번역자다. 우리가 오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업계 탑클래스의 대우를 받는 이유다.


반면에 최악의 번역가는 '책 한권 번역에 8시간은 무리인데요, 16시간 주시면 안될까요?' 하는 번역가다. 이 사람이 아무리 최치원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유려한 문장으로 감동을 시켜도 업체에겐 일 줘선 안되는 번역사 1순위가 된다.



부담이 더 크다


그래서 만약 번역가가 바뀐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모두 충족되었을 경우다.


1. 오역 또는 번역가의 악명으로 인해 매출 저하가 눈으로 확인되었다.

2. 번역가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해 번역을 못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교체해야 한다.

3. 기존에 번역자가 할 수 없는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시작, 전문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4. 내가 원하는 시간보다 속도가 느리다.


즉 돈, 업무 그리고 돈이 얽히지 않는 한 오역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번역사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원하는 때에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속도와 성실성을 겸비한 사람은 생각외로 찾기 힘들다. 아니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일 빠르게 잘하고 성실한 사람은 재수없으면 평생에 한 명 만나기도 힘들다. 회사규약으로 묶어도 안되는데 개인사업자인 프리랜서에서 그렇게 쉬이 나타날까.


프리랜서라는 점은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한다. 바로 보안문제다.


비싼 돈이 움직이는 문화 콘텐츠의 출시 전에 그 내용과 반전이 인터넷을 수놓는다면 그것만큼 김 빠지는 일도 없다. 심지어 매출 하락으로 직결되는 문제다. 만약 기술보안 문제가 걸린 경우라면 천문학적인 연구 개발비가 하늘에 날아가는 수도 있다.


기우가 아니냐고? 저자만 하더라도 분명히 계약서를 쓰게하고 리뷰어나 번역가에게 일을 줬음에도 내용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다 날라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실력도 실력이지만 비즈니스를 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내가 원하는 시간내에 번역할 수 있고 입은 무거우며, 자신의 SNS 브랜드로 홍보까지 도와주는 번역가다. 이런 사람이 흔치는 않지만.



오히려 번역사의 실수는 감싸줘야 한다


반대로 초짜 비즈니스맨이 아니라면 번역사의 실수는 철저히 숨긴다. 왜냐하면 그 오역가를 선택한 실무자의 실수로 인정되어 윗사람에게 찍히기 때문이다.


제가 고른 번역자가 오역을 했는데, 소비자들이 분노해서 난리가 났습니다.


상사에게 이런 보고를 할 사람은 없다. 당장 쏟아지는 분노도 그렇지만 개인이 뒷수습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무자는 오히려 윗선이 모르도록 철저히 숨긴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관객들의 견해의 차일뿐 오역은 아닙니다. 매출에 큰 영향 없는 사소한 오역입니다. 그래도 그만한 사람 없습니다... 등등...


하지만 요즘에는 피드백을 신경쓰는지 블루레이/DVD출시때 자막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출처 : 어바웃 타임]


그래서 인맥이 좌우한다


어벤저스 3의 박지훈 번역가는 '번역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말을 했다.


텐아시아: 자막 속에 희로애락을 담는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고, 실력이 있어도 인간관계 관리를 못하면 이를 활용하기 어렵다. 역사는 실력 좋은 독불장군의 불행한 말로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번역가라는 건 공고를 내기보다는 주변인에게 '어디 좋은 사람 없을까?'하는 식으로 뽑히기 때문에 인맥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당 번역가의 오역이 계속 이슈가 된 덕분에, 관객들이 이 사람이 워낙 유명 배급사의 영화 번역을 독식하는데 지친 상황이라 '실력이 없어도 인맥만 좋으면 살아남는다, 오히려 의뢰주가 감싸준다'라고 이해해버렸다.


수백, 수천만이 드는 작품의 번역이 인맥만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문화 콘텐츠에 투자하는 사람들에겐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하도 연줄 채용, 특혜 채용이 이슈가 되어서 더더욱 비난이 거세진 면도 있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어도 인맥 때문에 못 바꾼다고 하는데
화가 안 날 소비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게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다.


번역도 엄연한 사업인지라 번역가와 사업 PM의 궁합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저 클라이언트에게 결과물을 넘기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한 번 번역물을 넘긴 후 피드백을 받고 이에 맞춰 다시 번역하는 일도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실제로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별일이 다 일어난다.


분명히 일을 줬음에도 나중에 받은, 단가가 높은 일에만 신경 쓰고 먼저 내 일은 미루는 번역가.

번역에 대한 피드백을 주면 '뭣도 모르면서 말 많다!'라고 가르치려고 드는 번역자.

마감을 어기는 것은 번역자의 권리라고 생각하는지 핸드폰 꺼놓는 번역자.


사업관리 해보셨으면 알겠지만...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그대로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번역자를 참 많이 잘라봤고 이러다 아예 번역에서 멀어진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봤다. 그리고 이는 사업관리자에게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을 쉽게 못 바꾸고 인맥에 의존하게 된다. PM도 사람인데 스트레스 받으며 살기는 싫으니까.



교육의 어려움

게다가 번역을 하는 과정이 복잡한 경우에는 더더욱 바꾸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게임 번역의 경우 높은 확률로 문장에 프로그램 언어나 태그가 붙어있다. 하다못해 줄바꾸기 코드가 들어간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프로그램 담당이 한글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초적인 코딩 지식이 없다면 이걸 이해 못한다. 한 예로 번역사가 멋모르고 백 슬래시( \ )를 넣으면 C언어로 프로그램된 게임인지라 오류가 창궐한다. 그래서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한 사람들은 몰라도 문송만 한 사람들은 안된다.


교육 시키면 안되냐고? 그게 귀찮은 거다. 회사에서 번역사 교육만 일로 줄 리도 없고, 그 교육이 한 번에 끝나지 않으니 더더욱.


영화 번역도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아예 대본만 덜렁 받거나, 소리만 듣고 번역을 해야 했다. 그나마 사전 조사를 할 시간이 있으면 모를까, 모 영화사는 찍찍이라 불리는 녹음기 하나만 주고 작은 방에 가둬놓고 거기서 번역을 시키기도 했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아예 인터넷 환경자체가 없어서 모르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꿈도 못 꾼다. 당연히 보안을 위한 조치다.


railgun, steel projectile을 조사할 수 없는 환경이었을지도 [출처 : 트랜스포머 2]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출처 : 트랜스포머 2]


그래서 번역사는 소리만 듣고 인물들의 관계를 예측하고 상황을 상상해서 번역을 해야 했다. 쉬울 것 같지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를 눈감고 10분만 봐도 이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요즘에는 이게 오역 창궐의 원인임을 알았는지 녹음기 주는 회사는 거의 없다고 한다. 번역을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영상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상도 이미 해외에서 개봉돼서 아예 DVD로 나온 영화라면 모를까 한국 동시 개봉 혹은 한국 최초 개봉작쯤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예 CG를 입히지 않은 영상을 보내거나 화면에 블러 처리를 해서 만에 하나 있을 프로의식이 덜 된 번역가가 사전에 유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든 영상을 보낸다. 결국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된다.


물론 마지막에는 자막을 올려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시간이 급하다면... 개봉일은 코앞인데 본사의 피드백이 늦어서 시간을 다 까먹었으면 그대로 극장 개봉으로 갈 수밖에 없고 자막은 건물에서 떨어졌다고 나오는데 폭포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초벌 번역을 검토하라고 넘겼더니 그게 그대로 상영됐더라...는 도시전설도 있다.


원문에 We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엄청난 것을 풀어놔버렸어요'로 해석하는게 자연스럽다. 어디다 책임을 떠넘겨... [출처 : 앤트맨 와스프]


용기내서 키우기도 어렵다


자 회사내에서 PM이 애사심이 풍부하고 제품에 대한 애정이 넘쳐서 좋은 번역가를 찾는다치자. 저자가 생각할 때 번역가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역량을 갖추면 좋다.


<공통>

해당 분야에 관한 이해도

보안을 지키는 프로의식

프로젝트를 전체적으로 설계하고 보기 쉽게 만드는 능력

최소한 TRADOS는 기본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DB 데이터를 원하기도 하니까


<기술번역>

맡은 분야의 기술에 대한 이해도, 최소한 준전문가 정도의 역량이 필요하다

일부 기술의 경우 정확한 번역보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를 아는지가 중요하다


<게임 번역>

프로그램 적으로 처리되는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게임에 대한 이해가 높은 것이 선호되며, 글자만 봐도 어떤 상황/ 어느 부분에 들어가는 대사인지 알면 우대받고 아예 구조까지 파악하면 높게 평가받는다


여기서 문제. 이걸 다 갖춘 사람을 찾는게 빠를까 아니면 오역은 많이 내지만 나랑 친하고 내 요구는 잘 들어주는 기존 번역가를 쓰는게 빠를까?  단연 후자다. 사업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안정성이며 위험요소는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 또한 교육도 비용이고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사업의 기본 중 하나다. 무엇보다 비용 문제,  복잡한 요소를 만족하는지 검증하는 것 자체가 사업체의 담당자에겐 중노동이다.


업체 담당자에게는 번역사를 발굴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일반업체든 전문업체든 번역가를 발굴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일반 기업체의 경우 번역가를 평상시에 발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들은 번역 관리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하므로 시간이 부족한 데다 만약 일을 놔두고 틈틈이 번역가 발굴이라도 했다간 '번역자는 있잖아~!! 것보다 더 중요한 일에 신경 쓰라'라고 혼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번역 전문업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요령을 교육하는 것도 난감하다. 예를 들어 게임의 경우, 한국어로 번역하면 일본 게임의 경우 창 크기가 모자라는 문제가 영문게임의 경우 영어폰트의 크기가 작아 가독성이 나빠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게임화면을 못 보더라도 읽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해야 한다.


영화번역도 마찬가지, 원문이 어떻게 되었든 한줄에 15글자로 두 줄 이상이 한번에 나오면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다. 이런 업계의 노하우를 일일히 가르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그런 교육프로그램 개발에 돈을 들일 이유도 없다.


게다가 영화 번역의 경우 높은 확률로 자사에 맞는 번역 툴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게 단순히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번역사가 계약서에 사인을 해서 본사로 보내면 (UPS... FEDEX...) 본사에서 로그인 허가 계정을 만들고 번역가는 이 프로그램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이게 다 수고, 시간 그리고 돈이다.


회사 생활을 몇 달이라도 해봤으면 알 것이다. 기존의 일도 많은데 이 복잡한 과정을 또 관리하는 건 웬만하면 피하고 싶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 좋은 일 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말했듯 한 업체가 한 사람이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번역물을 주는 경우는 없다. 제조기기를 독점 공급하는 업체 = 번역료가 엄청난 업체조차 매년 새로운 기기를 수입하는 건 아니고, 보통 추가 기능만 번역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그래서 번역사들은 다양한 영업망을 개척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키워놔 봤자 다른 회사 좋은 일만 시켜주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실력과 경력이 생기면 더 단가를 쳐주는 업체와 일할 가능성이 높다. 즉 죽 쒀서 남줄 가능성 때문에 이런 시도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다른 업체 심지어 경쟁사의 이익을 위해 일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기업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문제는 번역 전문회사에서 더 크게 불거진다. 번역회사 상당수가 쓸만한 인재풀을 갖추지 못해서 허덕이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그 배경에는 가뜩이나 높지 않은 번역료에서 사업비까지 챙기다 보니 번역사 몫이 줄어드는 현실이 한 몫하지만.


스스로 크기도 힘들다


업체가 안 키워준다면 천상 번역가가 스스로 클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작은 일부터 해서 커리어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커리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영업개척의 난이도가 높다는 점을 빼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여기 또 하나의 장벽이 존재한다. 우선 한 번역가가 한기업에 올인해서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일거리가 안 나온다. 그래서 전업 번역사는 다양한 영업망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장벽이 보통 많은게 아니다.


우선 생활이 안된다. 영상 번역이든 기술번역이든 상위권에 들어가는 사람은 귀족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만 하층민(?)의 경우는 죽도록 번역하느니 그냥 편의점 아르바이트 잡는 게 나은 경우마저 존재한다.


아마 아바타, 어벤저스 같은 대작은 번역료가 좋겠지만 이건 백만 관객 이상은 기본적으로 들 가능성이 있을 경우이고 수만, 수십만이 들 영화의 번역료는 낮다. 극장에 개봉조차 못할 영화는 더 내려간다.


게임 같은 경우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원래부터 게임이 번역료 짜기로 유명한데 번역기간도 짧다. 하루에 최대 22페이지 번역한 경험이 있는 저자조차 물리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다. 제작사가 그런 짧은 기간에 익숙해서 프로젝트를 편성한 경우인데, 여기다 뭐라고 이의제기라도 해봤자 일거리만 사라지니 필연적으로 하청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통일 안 된 번역이 창궐한다.


하도 후려쳐서 결국 게이머거나 틈새시장 찾아든 번역자들만 모이게 된다 [출처 : 다키스트 던전]


만화책은 아예 원가를 낮추는 사업구조가 정착되어 있다. 소장을 위한 퀄리티를 처음부터 시작한 애니북스 외의 업체가 다 겪는 문제다.


그래서 번역 초창기에는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한
급수 낮은 일을 하면서 빈곤하게 버텨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번역작을 잡아도 난관이 존재한다. 그 콘텐츠가 실패할 경우다. 실패한 콘텐츠의 번역가가 잘한다고 다시 기회를 주는 열린 PM은 정말 드물다. 설령 번역물의 퀄리티가 이백, 두보가 울고 갈 정도로 훌륭해도, 마니아들이 번역 신으로 받들어 모실 정도로 퀄리티가 좋아도 이런 번역을 PM이 원한 시간의 1/2에 해치우면서 자잘한 요구를 잘 들어줘도 작품이 망한다면 그는 망한 번역가다.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어도 보통 이력서에 적힌 작품의 흥행 정도로만 평가하니 아마 일을 받기가 힘들 것이다. 문화콘텐츠 흥행의 도박성을 생각하면 초보자에게 너무나 함정이 많다.


번역가에 대한 꿈과 열정이 없다면 싹트기도 전에 정리당하는 환경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텃세자체가 강하다 .번역에 진입하는 것은 기존 번역자에게도 쉬운 환경은 아니다.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샘플 테스트를 받기 조차 어렵다.


저자는 수년 전 지인에게 급한 번역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꼭 네가 해줘야겠지만, 규정상 일반인에게 직접 줄 수 없어 번역회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그 번역회사에 지원해라. 이야기는 다 해놨다'


는 부탁을 받았다. 저자 입장에서도 부수입은 쌩큐인지라 지원서를 보내고 열심히 기다렸지만 2주 내내 답장이 없었다. 그 일이 취소된거냐고 지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쪽은 일이 진행되는 줄 알고 있더라. 서둘러서 이유를 알아 보니 새로운 번역사로 지원하는 체크하는 전용 메일계정을 2주간 아무도 안 열어봤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샘플테스트를 시키기는 커녕 메일조차 안 열어보는 암울한 현실, 업계 상위권 번역회사조차 이러니 생짜 신입이라면 테스트조차 받을 기회가 없다.


인맥이 작용해도 그 인맥이 어지간히 강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번역의 장벽을 뚫기는 어렵다. 기존 번역자를 최대한 활용하다 정 안될 때만 알아보는 형식으로 이뤄지고 그때 딱 맞춰 번역사가 나타날 확률조차 낮고, 그 번역사가 번역사가 성장하기는 더 어렵다. 역시 기존 번역자에게 우선해서 일을 돌리기에.


물론 기존 번역사가 잘 벌어야 앞으로도 일을 잘해주는 현실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번역시장 진입은 어렵고 고인물은 썩는다. 그리고 번역시장은 점점 도태된다. 예전에 박상익 교수가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국민 청원을 낸 데는 이런 배경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한겨레 : 번역청 설립 청원


게임의 경우, 전문적인 번역팀을 만들어서 글로벌화에 제대로 대응하는 회사는 몇 없다. [출처 : 스퀘어에닉스]


마치며


결국 시스템 및 구조의 문제로 인해 소수의 번역자가 맛있는 과실을 독점할 수 있고, 새로운 도전자들은 싹 정리되게 된다. 그렇게 고인물이 되고 오역 번역가가 인기몰이를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좋은 작품을 받아 번역하면 그 흥행결과 때문에 높은 평가를 얻는다.


흥행영화의 번역가를 교체해야 한다, 왜? 오역때문에... 같은 소리를 할 직장인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번역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비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비즈니스에 영향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시달린 기업들은 차선책을 생각한다. 번역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이름을 숨기는 것이다. 실제로 어벤저스 3에는 번역자의 이름이 없다. 개중에는 필명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방법은 혹 일어날 비난의 방향을 분산시킬 수 있어 꽤 선호되는 방향이다.


하지만 이것도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인터넷이 하도 좋아서 번역자 정보를 알 수 없다면 누군가 희생자(?)의 리뷰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름을 아무리 숨겨봐야 다 알아낸다. 집단지성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국내 영상매체 로컬 제작사 중에는 이런 피드백을 반영해서 블루레이/DVD/디지털 판매본에서는 개선된 자막을 내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제는 번역물이 매출에 영향을 주는 시대다


최근에 터진 다키스트 던전 사태, 막장 한글화에 화가난 유저들이 리뷰를 최하점으로 때려서 매출에 영향을 준 사태는, 모 번역가가 참가한다는 소문이 돌자 안보기 운동이 벌어진 앤트맨 와스프 사태는 이제 번역물의 퀄리티에 신경을 쓰는 사업체제를 갖출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그리고 좋은 번역자를 확보하기 위해선 썩은 고인물은 버리고 신인이든 경력자든 관계없이 실력있는 사람이 치고 올라오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신인이 생활에 어려움을 격지 않는 체제또한 만들어야 한다.


이미 수준 높은 번역을 제공해야 고객이 납득하는 시대가 왔다. 좋은 번역이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고객의 발전을 콘텐츠사가 인지하지 않는 한 번역 수준의 발전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메일 : inswrit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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