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5일차> 사기캐 토스카나에서 관광 대신 여행
1.
가르다 호수 부근에 콜미바이유어네임의 촬영지 시르미오네가 있다는 사실을 어젯밤에 알았다. 으아아아. 베로나는 포기하자고 주장할 뻔. 베로나에 뭐 있는데? 딸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전혀 관심 없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기대보다 훨씬 좋고, 기대보다 훨씬 예쁜 곳이 베로나다. 거리는 아름답고, 균형잡혔다. 알고보면 1세기 이전에 이미 흥한 도시.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단아하고, 부티나는 거리는 화려하다. 어쩌면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람 시원하고 햇볕 적당한 그 시간 아닐까? 전날 만토바는 오후의 뙤약볕에 힘들었는데, 베로나는 공기마저 친절했다. 여행은 함께 하는 이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날씨도 결정적이다.
베로나에서는 다음주 오페라 축제가 시작된다. 1세기 원형경기장 아레나에서 9월까지 서늘한 여름밤을 오페라로 보낸다. 한여름 티켓값만 수백억, 부대효과까지 수천억 수익을 올리는 도시 답게 베로나는 부자 동네 같다. 도심 거리 바닥이 대리석이다.
2.
가르다 호수에서 30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가면 바로 아레나가 보인다. 그시절 계획도시인 베로나에서 붐비는 도심 대신 외곽에 아레나를 지었다. 콜로세움보다 몇십년 앞선 원형. 3만 명을 수용한다니, 그 시절 베로나는 어떤 곳일까. 베로나는 시내 대부분 볼거리를 20유로 티켓 하나로 해결한다. 48시간 유효한 티켓이라 떠나면서 마침 마주친 다른 관광객에게 넘겼다. 콜로세움 안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베로나 아레나에서 달래보려 했는데, 오페라 축제 준비로 무대와 좌석 설치에 바쁘다. 그 모습도 무척 인상적인데, 사진엔 별로다. 1세기 돌 건축이라 그런지 의자에 암모나이트 화석 같은걸 몇 번 봤는데 진짜일까? 우리는 이탈리아에 10년 후 다시 올 수 있을지 떠들곤 한다. 베로나 오페라 축제는 다음에 올 수 있을까? (이 포스팅을 본 한이경님은 20년이 지나도 베로나 아레나의 오페라 감동이 생생하다고 했다. 다음에 오면 오페라 축제의 밤을 느껴보고 싶다. 여행이란 원래 아쉬움을 남겨놓고 가야, 다음을 기약하겠지)
3.
베로나에는 줄리엣의 집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왜 베로나를 배경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1세기에 이미 아레나를 건축할만한 유명한 도시였겠지. 줄리엣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난 싸늘해졌다. 줄리엣 동상의 왼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다더니 진짜 난리였다. 줄서서 가슴을 만지는 남자들. 줄리엣 나이가 13살이었는걸? 동상 가슴을 만져야하나? 인어공주 동상 가슴도 맨질맨질 닳았다더니. 투덜댔더니 동양의 남근석도 여자들이 많이 만지지 않더냐는 얘기가 나왔다. 그건 아들 낳으라는 압박 탓이지.. 로미오와 줄리엣의 침대까지도 관광상품인게 괜히 속쓰렸다. 사랑에 나이를 따질건 아니겠지만.. 무튼, 저 발코니로 사람이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해보인다. 인근 로미오 집도 봤는데 한산하다.
4.
베로나는 예쁜 도시다. 성아나스타샤 성당도 기대 이상. 천장 장식을 보고 딸기는 식탁보, 소연은 앞치마를 떠올렸고, 진빈은 원피스를 만들어 입고 싶다고 했다. 특이하게 예쁘다.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지고 있는듯한 조각상은 좀 힘들어보인다. 나쁜 짓을 하면 지옥간다는 말씀이 무섭긴 하지. 피렌체의 상인들이 가장 성공한 건 천국과 지옥 외 연옥의 발명? 부자가 천국 가기는 어려워도, 조금만 벌받으면 천국의 희망을 남기는 연옥의 여지를 남겼다나. 지옥도를 볼 때 마다 공포에 따라 규범을 따르는 시절을 생각한다..
하여간에 이 성당 또 특이한 건 성모자상인데, 이렇게 화려한 방식은 처음. 베로나 두오모의 성모자상도 번쩍번쩍 화려하다. 이 동네 특이하다.
베로나 두오모..
5.
베로나에서 두오모는 일정 상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모든 유적이 가깝게 붙어 있어 가다보면 들리게된다. 원래 목적지 중 하나는 산피에트로 궁전. 피에트라 다리로 아디제강을 건넜다. 걸음마다 예뻐서 사진 찍기 바빴다. 그리고 산피에트로 궁전에선 다행히 왕복 2.5유로에 케이블카(?) 푸니쿨라를 탈 수 있다. 계단에 지친 우리는 왕복 티켓을 샀다. 그렇게 해도 오늘 2만보, 21층이나 올랐는걸.. 뷰는 말해 뭐하나. 베로나 전경은 피렌체와 또 다르게 아름답다.
6.
점심은 시뇨리 광장의 Impero..앤초비 올린 나폴리탄, 이탈리아 와서 가장 맛있는 피자였다. 도우 맛집이라더니 화덕에 갓구운 도우는 고소하고 쫄깃하다. 버섯 탈리아텔레 파스타 역시 최고.. 맛집이네.. 베로나 스타일 햄버거는 완전 다른 맛이라 나는 좋았는데 소스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맥주와 칵테일까지 해서 68유로.
시뇨리 광장엔 단테 동상이 있다.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는 베로나의 영주인 바르톨로메오 디 스칼라의 환대에 몇 년 머물렀다. 바르톨로메오의 동생과 우정도 깊었다고. 그는 신곡의 천국편을 베로나에서 완성했다. 베로나는 단테 흔적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단테는 죽을 때 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피렌체가 나중에 단테 유해를 돌려달라고 그가 묻힌 도시 라벤나에 요구한 건 웃픈 일이다. 르네상스를 끝내고 인간을 되살려낸 단테는 시대의 영웅. 그 시절에 몰라보고 박해한 걸 피렌체 후손 탓을 할 수는 없겠지.
7.
가르다 호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다. 가장 예쁘다고 순위를 매길 수 없지만 크다. 주변엔 온통 고급 주택과 호텔. 우리는 호수 한쪽 비교적 소박한 숙소에 머물렀다. 맘에 드는 합리적 선택이다. 숙소에서 시르미오네까지 20분. 베로나에서 곧바로 시르미오네로 가서 일단 성부터 올라갔다. 카스켈로 스칼리게라. 또 계단? 올라가면 좋기야 하겠지. 툴툴대면서 헉헉대면서 올랐다. 이날 건강앱이 21층 올랐다고 한게 이유가 있었구나.. 올라가면 뭐, 역시나 좋다. 가르다 호수 전경을 360도 바라보는게 나쁠리가 없잖아! 바람도 햇볕도 딱 좋은 시간. 그런데 냉정한 친구들.. 입장료 내고 올라갔는데 바로 내려가자고? 사실 우린 마음이 급했다. 한낮의 가장 뜨거운 시간도 피했지만, 더 서늘해지기 전에 가야했다.
8.
여행 전에는 이름도 몰랐던 가르다 호수에서 오후 5시쯤 수영을.. 아니 물놀이를 했다. 어제 딸기가 들어갔던 물가와 달리 여기는 자갈이라 샌들 신고 들어갔다. 빙하호수라 물이 차가운듯 한데도 낮의 태양이 데운 탓인지 그저 상쾌하다. 혹시 호수에도 한류와 난류가 겹쳐 흐르는걸까? 무식이 아쉽지만, 시원했다가 따뜻했다가 물은 다정했고, 물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사실 빙하호수라고, 기본적으로 시원하다. 호수에 바다처럼 파도가 치는 원리는 뭔지 궁금하지만 패쓰. 살다보니 오리, 백조와 같이 물에서 놀기도 한다. 겁도 없이 사람 옆에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가는 엄마 오리. 비현실적인 현실이 놀랍기만 했다. 딸기가 놀다가 물속에서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 혹시나 그걸 찾으러 물에 다시 들어갔는데..세상에, 찾았다. 물이 워낙 맑고 투명해서 바닥이 보이는 덕분이다. 물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행복했다.
9.
호숫가에서 몸을 말리다가 문득 생각났다. 콜미바이유어네임 때문에 시르미오네에 왔는데, 생각보다 큰 동네. 영화 촬영장소가 어디지? 호수에서 노는게 넘 좋다고 난리치다가 중요한걸 까먹었잖아! 급히 검색했더니 걸어서 20분.. 주저하는데 친구들이 말했다. 또 언제 와서 보려고? 호수를 따라 걷는 길도 좋았지만, 그로테 디 카툴로 유적지 Archaeological site of Grotte di Catullo, 1세기 로마인들의 휴양지였다는 설명도 어디서 봤는데.. 이러니 둘이 사랑에 빠지지! 시간을 초월한 아우라가 공간 가득하다. 오래된 돌들이 가지런하고, 석벽의 선 너머 호수가 반짝거린다. 가르다 호수만으로도 아름다웠는데 2000년 전 시간의 무게가 고요하게 다가온다. 우리 같으면 '콜미바이유어네임' 촬영장소 표지판이 여럿일텐데 그런 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유적은 그런 홍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눈부시다..
10.
저녁은 여느때처럼 장을 봤다. 빵은 낮의 식당에서 싸들고 왔기에 샐러드 야채에 토마토, 햄, 올리브, 앤초비.. 그리고 와인 3병에 40유로. 비비노 평점 3.9인 화이트 와인이 3.9유로. 그리고 권은중씨의 볼로냐 책 읽다가 반한 람부르스코 와인을 3.59 유로에 샀다. 탄산이 들어가고, 도수가 10도 밖에 안되는 람부르스코를 왜 볼로냐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설명을 읽다보니 궁금했다. 그러나.. 다들 이게 와인이냐고.. 아니 와인은 물에 타먹어야 한다고 주장한건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고! 좀 약하다고, 탄산 레드라고 해서 사이다 섞은 레드와인이라는 평은 너무 하잖아? 친구들은 정직하다. 람부르스코는 나 혼자 거의 비웠다. 이래저래 오늘 포스팅이 늦어진 이유다. 이런 여행에서 포스팅에 1시간 넘기면 안되는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