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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16. 2022

<이탈리아 14일차> 구텐 탁, 돌로미티

<이탈리아 1일차> 로마의 휴일, 그래도 팁

<이탈리아 2일차> 화려한 바티칸, 투박한 산탄젤로

<이탈리아 3일차> 로마 여행에서 놓치거나 놓칠뻔한

<이탈리아 4일차>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란

<이탈리아 5일차> 사기캐 토스카나에서 관광 대신 여행

<이탈리아 6일차> 몬테풀치아노, 로망이 이긴다

<이탈리아 7일차> 발도르차 평원의 빛과 바람

<이탈리아 8일차> 토스카나, 하늘이 다했다.

<이탈리아 9일차> 피렌체, 63층을 올라갔다니

<이탈리아 10일차> 오, 다비드.. 그리고 피스토야

<이탈리아 11일차> 파랗게 빛나는 친퀘테레..그리고

<이탈리아 12일차> 만토바 공국..가르다 호수

<이탈리아 13일차>베로나, 시르미오네..넘치게 좋았다


사진 좀 찍어달라며 애교를 부리면서도 절대 상대는 먼저 찍어주지 않는 여행 동반자 얘기가 나왔다. 다들 척척 알아서 과일 씻고 설거지 할 때 손 하나 까딱 않으며 분주한 척 하는 이, 명품 쇼핑과 아울렛 나들이가 가장 중요하거나 정반대라 맞지 않는 이, 세금 내기 싫으니 새 가방을 대신 들고 입국장 들어가달라고 요청하는 이, 30분 이상 걷기 힘드니 무조건 택시부터 타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 무거운 짐은 은근 슬쩍 넘기고 하하호호 넘어가는 이, 매번 얻어먹기만 하면서 공동 부담엔 예민한 이.. 정말 그런 인간이 있단 말인가?! 그렇단다. 평소엔 상냥해서, 혹은 가끔 만나니까 눈치채지 못했던 습성들이 여행을 통해 드러난다고. 인간 관계가 다 그렇지. 사귀기 전엔, 결혼하기 전엔, 같이 일해보기 전엔 몰랐던 면모에 우리는 가끔 당황한다.


여행이 2주를 채웠다. 우리는 별 일 없이 즐기고 있다. 내내 “피사체에 대한 사랑”을 외치며 서로 인생샷 찍어줬노라 깔깔댄다. 걷는 것에 별 불만도 없지만, 피곤하면 각자 알아서 체력을 조정한다. 삐끗 넘어질 때면 당장 아픈 것보다 다행히 심각하지 않아 민폐 안됐다는 점에 먼저 안도한다. 근육을 달래주는 알싸한 연고는 소연이 처음 샀는데 차례로 잘 바르고 있다. 돌아가면서 생리통 힘들땐 우리 아직도 완경 멀었냐는 수다가 이어진다. BTS 신곡 발표에 아침부터 난리치다가, 그들의 새 소식에 함께 두런두런 공감을 나눈다. 여자 넷이 화장실 1개를 쓸 때에도 배려와 예의가 넘친다. 각자 사정이 다를텐데 씀씀이도 튀지 않는다. 하루의 피로를 씻을 때에는 와인을 마신다. 비비노 평점 높은 합리적 와인에 즐거워하고, 어쩌다 좋은 와인에 주저하지 않는다. 지치는 순간에는 젤라또를 먹는다. 좋은 음식과 술, 수다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좋은 것은 좋다고 즉시 감탄하고, 아쉬운 건 대충 넘어간다. 빈은 모기에 잘 물리는 체질. "이탈리아의 모기도 나를 좋아하는군. 이놈의 인기란" 웃고 넘긴다. 오랜 친구에 대한 존경이 커지는 중이다.
동시에 관계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솔직한 것과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건 다르다. 다정한 친구들 덕분에 욕심이 생긴다. 친구들과 잘 늙고 싶다. 나이들수록 완고해지거나 예민해질 수 있다는걸 절감한다. 조심해야지.
 이럴땐 속으로 외친다. 나만 잘하면 돼. 책임을 다하는 것과 성찰하는 것, 내 탓이라 자책하는게 다 다르다는 소연의 말이 남는다. 

다시 북쪽으로 달렸다. 살랑거리는 여름 원피스만 입다가 긴 바지를 꺼내입었다. 토스카나 밀밭을 지나온지 얼마 안됐는데 이제는 산길이다. 마을은 산자락 마다 드문드문 이어졌다.

중간 지점은 볼짜노 Bolzano. 남부 티롤의 주요 도시다. 몇백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치하 티롤 백작이 다스리던 동네였는데, 1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영토가 됐다. 건물은 이탈리아 다른 도시의 아기자기한 분위기 대신 반듯하다. 곳곳이 공사중이다.


독일인 정체성의 이탈리아라는 티가 곳곳에서 난다. 주차장 이름이 Lauben Parking Porcini.  라우벤과 포르치니는 각각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아케이드란 뜻이다. 피아자 발터 플라츠.. 같은 식으로 광장이란 단어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로 앞뒤로 붙은 표지판도 있다. 출구 표시도 독일어, 이탈리아어가 함께 쓰였다. 기본으로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함께 할테고, 영어에 프랑스어까지 하면 쉽게 3, 4개국어를 하는 곳. 유럽은 그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했다. 복받았네 부러워하다보니..우리도 한자 문화권 한중일 필담이야 가능하겠지..(내 얘기는 아니다. 한자 안 본지 오래되어 다 까먹었다..)


점심은 Walther 광장의 야외 테라스 식당. 티롤식 피자가 괜찮다. 치킨 샐러드는 어딜가나 무난하다는 걸 발견하고 있다. 넷이서 50유로. 이 동네 1인분은 양이 많다. 남은 음식은 저녁 식량..


광장 앞에 볼차노 성당이 있다. 뒷편엔 우체국. 여기 중심가다. 성당의 내부는 로마부터 토스카나까지 본 것과 조금 다르다. 장식은 단순하고 뾰족하다.


볼차노는 그냥 가는 길에 밥먹은 곳.. 목적지는 돌로미티 오르티세이Ortisei..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토스카나에 관심 많은 소연과 돌로미티에 진심인 빈이 준비했다. 둘이 작당한게 작년 말. 나는 당초 절반만 함께 하려다 전체 일정에 끼기로 전격 바꿨고, 딸기까지 합류를 결정한게 2월이다. 토스카나의 일정에 심혈을 기울인 소연 만큼, 빈은 돌로미티와의 만남을 세심하게 준비해왔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쉬운 코스로 후보를 골랐고, 최종 결정은 날씨 등 다른 변수에 달렸다.

이탈리아 북부는 스위스와 닮았다. 알프스 윗쪽은 몽블랑이고, 아랫쪽은 돌로미티라 다르기 어렵다. 9년 전에도 파리에서 스위스로 내려오다가 경탄했던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빠졌다가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에 겸허해진다. 산악 지대에 푸른 초원, 그림같은 집들이 이어졌다.

커다란 개를 만난 딸기와 소연. 다들 작기도 해라..

돌로미티 이미지로 유명한 돌로마이트, 백운암(白雲岩) 산맥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푸른 능선들 너머 회백색 산들은 깍은듯이 날카롭고 위엄이 가득하다.  

돌로미티 이미지로 유명한 저 백운암 돌로마이트 산들..

난 돌로미티를 잘 몰라서, 구글 지도로 찾은 plose 라는 산인 것인지, 가장 높은 봉우리 Sass Rigias 가 저들을 일컫는 것인지 검색 열공. 예습을 안했으면 복습을 할 수 밖에 없다.. 알고보니 저 산들을 오들 odle 그룹이다. Sass Rigias 등은 봉우리 이름. 대체로 돌로미티라 그냥 부르기도 한다. 대표 사진으로 자주 등장한다.


장엄한 저 산들의 행렬 앞에 작은 교회가 있는 뷰...가 오늘의 일정이었다. 막달레나 교회 부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0분 정도 걸었다.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오르막길. 동네 날씨는 서늘할 거란 짐작과 달리 쨍하게 빛나는 햇볕 속에 뜨거웠다.

막달레나 교회에는 동네 주민들의 묘가 있다. 예쁜 꽃들을 정성스럽게 심어둔 묘.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내부의 제단은 또 소박하지만은 않다. 우리도 속삭이며 잠시 경건해지는 시간.


다들 풍경에 압도되어 사진을 찍어봤지만 눈에 담은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스마트한 기계 따위가 나를 온전히 담을 수 있겠냐고 비웃을 리 없지만.. 

우리도 아랑곳 않고 인증샷 타임..  사실 더 높은 쪽으로 올라가 찍어야겠지만..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날씨의 신, 여행의 신 수호를 받는다는 빈 덕분인지.. 차에 올라타자 마자 빗방울이 거세졌다.


대체 저긴 왜 파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이 동네는 원래 스키장 천국.. 코로나 끝나면 사람들이 몰려오는 걸까. 사실 오늘 우리는 이 길에서 만난 사람이 10명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구간을 우리끼리 다녔다. 아직 관광객 없는 동네..


숙소는 오르티세이. 엄청 비싼 호텔들이 저마다 1800년대, 1900년대 초반부터 영업해왔다고 한다. 한 호텔의 서브 브랜드인 숙소는 여태까지 이탈리아 다른 숙소보다 비쌌다. 농가민박에서 거실과 부엌을 즐기던 재미는 끝. 햄과 치즈, 포도주를 사러 갔는데 역시 토스카나보다는 물가가 비싸다. 게다가 이 동네에선 이탈리아어가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 독일어를 한다.  


딸기가 오늘 마감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여.. 방해하지 않고 나머지 셋만 나갔다. 오랜만에 장 봐서 먹는 저녁 대신 레스토랑. 평점 높은 집이고, 값도 토스카나보다 조금 더 비싸다. 심지어 메뉴에 비엔나 슈니첼이 있어서 주문.. 다른 동네 맞다. 문어 샐러드와 파스타도 아주 맛있었고.. 아저씨가 몹시 친절했다. 평소 공동예산으로 해결하는데 오늘은 한 명 빠진 상태. 빈이 쏘겠다고 했고, 소연이 자신이 쏜다고 했고, 나도 숟가락 좀 얹어 쏴볼까 했는데.. 결국 소연 윈. 달러유로 환율이 좋단다. 와중에 국제경제 얘기까지 이어가지 않아 다행. 무튼 서로 쏘겠다고 난리라니.


멀리 곤돌라가 보인다. 내일 저걸 타야 할텐데.. 비 예보. 비가 오후 늦게 오면 좋을텐데.. 소연이 찍어준 마음에 드는 사진.


일 마친 딸기의 늦은 저녁. 비비노 평점 3.9 쇼비뇽 블랑은 9.9유로. 숙소 1층(이라 부르고 싶지만 이들 방식으로는 0층) 공용 공간을 쓴 뒤 쓰레기는 다 싸들고 올라오고, 테이블은 싹싹 닦았다. 서로 짐 챙기는 요령도 합이 착착. 우리가 잘 맞는건 어쩌면 와인이란 연료를 계속 부어서일까? 여행 경비 중 와인 값이 예상보다 늘어난 것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은 하지 않았고, 넘 좋다고 함께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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