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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Jul 21. 2019

은행이 예금을 광고하지 않는 이유

재테크의 시작은 은행에서 하세요. 하지만 유념하세요.

한 후배와 볼링을 친적이 있다. 그는 당시 은행 생활이 그다지 즐겁지 않다고 이야기 했다. 일일 실적관리 대장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실적을 적어서 지점장에게 제출해야 하는데 기업금융 오퍼레이팅을 담당하는 그로써는 도저히 적어낼 실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관리하는 기업여신의 잔액은 1조원에 달한다. 그는 한달이면 거의 700억원에 달하는 여신들에 대하여 신규며 기한연장, 신용평가를 진행한다. 그런데 신규로 취급되는 대출 실적을 모두 팀장들이 가지고 가므로 그는 실적 대장에 아무것도 적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정도의 오퍼레이팅 업무를 진행하면 신규를 위한 마케팅 활동을 할 시간 따윈 없다. 그런데 매일 텅텅 비어있는 일일 실적대장을 제출할때마다 지점장을 거기에 빨간색 색연필로 거대한 물음표를 그려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라고. 그것이 그를 괴롭게 했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죄인 같고 일하는 보람도 느끼기 어렵다고 이야기 했다.


한때는 나도 일일 실적표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것이 곤욕이었다. 나는 기업금융과 퇴직연금, 외환업무 오퍼레이팅을 담당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적을 것이 없는 날이 많았다. 지인들에게 구걸하다시피해서 카드나 청약 같은 것을 만들어내곤 했는데 - 그마저도 얼마되지 않아 동떨어졌다. 매일 텅텅 빈 실적표를 내다가 우연히 200만원짜리 적금을 판매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일일 관리 대장에 적어 제출했다. 나는 내 실적 대장에 별표 두개정도는 그려져 있을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실적판에는 커다란 글씨로 "노력 요망!"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조금 더 작은 글씨로 "적금/예금은 기재하지 말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은 초저금리 시대에 예금을 바라보는 은행의 시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예금은 실적이 아니다.




예금이 실적이 아닌 이유는 은행이 예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펀드, ELS, 방카와 다르게 예금에서는 수익이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은행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얼마나 많은 예금을 유치해 올 수 있는가 였다. 부산부터 서울까지 온 나라가 꿈틀거리며 성장하고 있었고 모든 사업장이 자금이 없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예금만 있다면 대출을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원들에게 뒷돈을 건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은행에서 통용되는 대출 취급 뒷돈 표준 요율 같은 것이 존재할 정도였다. 어쩌면 당시에 은행원들은 대출은 실적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예금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이 뒤집어진 것이 언제인지 딱 잡아 말하기는 어렵지만 원인은 분명하다. 근본적인 원인은 저성장과 불경기에 있다. 이제 한국의 사업장들은 과거처럼 게걸스럽게 자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설사 경영상태가 양호해서 사업 확장을 위한 자금이 필요한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 은행에서만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다. MBA를 졸업한 기업의 임원들에게 자본시장에서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보다 저렴하다는 것이 1+1=2인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자본시장은 기업들에게 과거보다 훨씬 더 폭넓고 유연하고 저렴하게 자금을 지원한다. 개인이 주택대출을 받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들은 유동화 대출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자본시장에서 직접 대출을 받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혹은 조건만 충족된다면 디딤돌/ 보금자리 대출 같은 기금 상품을 통해 금융시장이 제공할 수 있는 최저금리보다 더 낮은 수준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대출을 해달라고 사정하면서 뒷돈을 주는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은행원들은 제발 대출을 받아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출을 받는 사람에게 뒷돈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이렇게 대출 수요가 갈수록 감소하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많은 예금은 은행에 독이 된다.


게다가 은행이 예금을 찬밥 취급하는 것은 금융시장의 발달도 한몫한다. 예금이란 은행의 입장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한 가지에 불과하다. 자본시장이 발달하기 전에는 예금을 통해서 돈을 빌리는 것이 은행의 입장에서는 거의 유일한 자금 조달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본시장이 발달한 지금 은행의 입장에서 저렴하게 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은 널리고 널렸다. 대출채권을 유동화하거나 은행채를 발행하거나 하다못해 치즈 크래커 상자에 1조 원이라고 적어서 판매하는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은 예금만큼이나 저렴한 금리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이지만 예금에는 필수적으로 소모되는 다른 부수적인 비용(지점 운영비, 예금자보험 비용 등)이 없다. 게다가 단순하고 깔끔하기도 하다. 예금으로 1조 원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수만 명에 대하여 수십만 장의 통장 발급이 필요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노동이 필요하지만 채권을 1조 원 발행하고 관리하는 것은 한 명의 직원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 키보드로 1을 누른 다음 0을 12번 누르면 사실상 할 일은 그것으로 끝이다. 미국의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 같은 투자은행들은 예금을 받지 않는다. 예금을 받지 않으므로 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적용되는 걸리적거리는 대다수의 규제들로부터도 훨씬 자유롭다. 예금을 받지 않는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되지도 않게 혁신의 아이콘처럼 자신들을 브랜딩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예금은 자체로 수익이 되지 않는다. 은행은 예금보다 간편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예금 금리를 함부로 내릴 수는 없다. 예대율이란 규제가 예금이 없으면 대출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부가적인 수익이다. 예금은 그 자체로 수익을 내지는 못하지만 부수적인 수익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김밥천국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생각하곤 했다. 은행의 입장에서 예금/적금이란 김밥천국의 김밥 같은 것이 아닐까. 김밥천국에서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김밥이지만 수익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은 돈가스나 콩나물 해장라면 같은 좀 더 고급진 메뉴들이다. 이런 메뉴들은 김밥 대비 훨씬 높은 마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김밥천국은 김밥천국이기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김밥을 판다. 이는 김밥 자체가 라면이나 쫄면 같은 부가적인 고수익 메뉴의 판매를 유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의 경우도 비슷하다. 모든 은행이 예금을 증대해야 하는 것은 예금이 다른 상품 판매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좋은 핵심예금, ELS, 신용카드, 방카, 신용대출 같은 상품들은 개인고객들이 주로 예금을 가지고 있는 주거래 은행에서 발생한다. A라는 은행에 예금이 모두 몰려 있는데 B라는 은행에서 펀드를 가입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애매한 상황이 발생한다. 예금은 수익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적정 수준의 예금을 지속적으로 유입시키지 못하면 은행은 추가적인 수익을 내지 못하며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은행은 결국 김밥천국과 유사한 영업전략을 구사한다. 김밥천국의 영업전략은 이렇다. 김밥으로 고객을 유인한다. 그리고 오는 고객에게 수익성 좋은 돈가스와 콩나물 해장라면을 판매하기 위해 노력한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예금으로 고객을 유인한다. 그리고 오는 고객에게  ELS나 펀드, 방카를 판매하기 위해 노력한다.


은행들이 예금을 광고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수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은행에 방문한 사람들이 대개 ELS와 펀드와 방카슈랑스(이것들을 묶어 펀방신이라고 부른다)를 차례로 권유받고 이 모든 권유를 거절한 순간에만 예금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사회 초년생이 잘못된 재테크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은행이 재테크를 시작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채널이라고 생각한다. 은행의 주요 수입원이 어디까지나 대출과 예금이기 때문이다. 모든 은행이 펀드와 보험과 신탁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금융기관 즉 증권사나 보험사는 그렇지 않다. 수익의 포트폴리오 자체가 다르다. 게다가 성과급 체계 또한 그러하다. 다른 금융기관과는 다르게 대다수 은행원은 개개인의 성과가 직접적으로 연봉과 연결되지 않는다. 은행원들의 성과급은 지점의 성과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은행 지점의 성과는 대부분 기업대출, 기업 퇴직연금, 수출입금융 같은 수십억 단위의 굵직한 지표들로 결정된다. 개인에게 판매하는 펀드나 보험 신탁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는 않지만 절대 결정적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은행원은 이런 상품판매를 통해 추가 수익을 추구할 유인은 있겠지만 상식을 초월하는 무리한 수익추구를 할 유인은 상대적으로 적다. 즉 은행은 다른 금융기관보다 이해상충 구조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이다. 은행이 사회초년생이 재테크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주식예찬론자다. 그리고 펀드도 엄청 좋아한다. 그런데 사회초년생들이 첫발부터 이런 상품들로 재테크를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당치 않게 이런 현란한 상품으로 재테크를 시작해서는 시작부터 스텝이 엉키고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실폐 사례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은 은행이 그들에게 예금이 가진 가능성과 사용방법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일개 은행의 행태적 문제가 아닌 전반적인 금융 시스템의 문제다. 그러므로 은행의 이러한 행태가 구조적인 것이라는 점을 사전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행들에게는 이런 사정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감안하여 재테크에 임하면 된다. 그러면 실패 확률을 낮출 수 있다. 더 나은 재테크를 할 수 있다.


예금과 적금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 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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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취업준비생에게 들려주는 은행 상식:

아래는 시중 4대은행을 네이버에서 검색했을때 최초로 나오는 광고창입니다. 여기에 예금,적금에 대한 광고나 예금금리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눈여겨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광고 영역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환전과 신용대출, AI포트폴리오, 급여/연금 이체에 관한 내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은행에서 '핑크퐁 저축송'을 올려 놓은 것과 국민은행에서 태교금융상품으로 '내 아이를 위한 200일 적금'을 만들어 올려 놓은 것을 제외하면 예금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아마 핑크퐁 저축송이나 태교금융상품 광고가 올라와 있는 것은 예금에 대한 광고라기 보다는 영유아 고객 숫자를 늘려 미래 고객 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은행 지점에 방문하여도 예금 광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추가로 여기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예금, 적금과 입출금이 자유로운 입출금 통장은 전혀 다른 상품이라는 것입니다. 입출금 통장에는 이자가 거의 지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행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무이자 차입으로 인식되며 은행의 가장 수익성 높은 사업이 바로 이 입출금 통장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입출금통장의 잔액은 별도로 핵심예금이라고 분류되며, 나머지 상품들은(적금과 예금, MMDA)는 기타예금이라고 분류되기도 합니다. 제가 예금/적금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런 핵심예금을 제외한 기타예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중은행들이 카카오페이나 삼성페이 같은 것에 지급결제 서비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서비스들이 핵심예금을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핵심예금이 이토록 수익성이 좋은 부분인 만큼 앞으로도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2019.7.20 네이버에서 4대 시중은행을 검색했을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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