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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Jul 21. 2019

쪼렙이던 나는 어떻게 만렙 적금러가 되었나.

예금이 리니지만큼 재미있는 이유.

나는 중학생시절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피씨방에 처박혀서 리니지를 했다. 나는 리니지를 좋아했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리니지에 접속한 적이 있었다. 잠시 동안의 플레이를 통해 많은 향수를 느꼈지만 이내 시시해졌다. 내가 어릴 때 어째서 이런 단순노가다에 가까운 일에 미칠 듯이 집착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유행하는 게임들의 재미를 결정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리니지에는 결핍되어 있었다. 정교한 전략도 순발력도 스토리도 뭐도 없는 그냥 단순 노가다 덩어리였다.


내가 어째서 리니지를 그렇게 좋아했었는지 알게 된 것은 리니지 레볼루션을 통해서였다. 이 혁신적인 게임은 놀랍게도 자동으로 게임이 진행된다. 게임 아이디를 만들고 그냥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기사가 알아서 퀘스트를 깨고, 사냥을 하고, 아이템을 모았다. 과거의 리니지에 없었던 것이 무엇이건 리니지 레볼루션은 차원이 달랐다. 레볼루션이란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이 게임은 플레이를 할 필요 자체가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구경만 하면 되었다. 심지어 구경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업무시간에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어도 게임은 알아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은 보조배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적절한 시점에 충전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게임을 거의 플레이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있었다.

내가 오래전 리니지 노가다를 하면서 행복한 유년을 보냈던 것, 리니지 레볼루션을 플레이하면서(플레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재미를 느꼈던  원인은 피드백 때문이다. 리니지에는 레벨이나 기타 무기 업그레이드 같은 제도들이 있으며 주기적으로 조금씩 자신의 캐릭터가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레벨이 올라가는 그 순간의 쾌감을 위해 나는 노가다를 했고, 회의 시간에도 책상 서랍에서 리니지 레볼루션이 쉼 없이 돌아가도록 했다.

레벨이나 무기 업그레이드 시스템이 없는 리니지는 누구도 플레이하지 않을 것이다. 구독이 없고 조회수가 보이지 않는 브런치에는 누구도 글을 올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공부, 육아, 직장, 대화, 클럽, 쇼핑, 연애, 결혼 모든 것이 노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피드백 시스템이 아닐까? 공부를 해본 사람은 시험을 통해 결실을 얻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아이가 내 목에 안겨 내가 세상 전부인 것 같이 애교를 부릴 때 그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사라진다. 직장에서 내가 노력한 프로젝트가 실적을 퍼올릴 때 야근은 보람이 된다. 대화, 연애, 결혼을 포함한 삶의 다른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드백은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자 수단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리니지가 위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리니지는 효율적인 피드백 시스템이었다. 노력을 하면 늦던 빠르던 레벨이 오른다. 이 점에 대해서 100% 확신할 수 있다. 적금 또한 마찬가지다. 적금은 현존하는 모든 금융상품 중 피드백적 관점에서 가장 완벽하다. 리니지를 좋아했던 나는 이제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인이 된 나는 리니지를 하는 기분으로 적금을 한다. 나는 지금 프로 적금러다.

완벽한 피드백 시스템 적금

내가 처음 적금 만기를 경험한 것은 은행에 들어와서 9개월 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적금 만기 안내 문자를 받았다. 월 만원씩 납입하는 6개월 만기의 적금이었다. 돈을 모으겠다는 목적보다는 핸드폰에서 적금 가입이 된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에 가입해 본 것이었다. 가입을 한 사실도 잊고 있었는데 만기가 되었다고 문자가 왔다. 해지를 하니 이자가 900원정도 붙었던 것 같다. 금액의 보잘것없음과 무관하게 나는 뱃속이 꽉 찬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나는 예금 적금 만기 안내를 받을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이것 보라고 해내지 않았느냐고 - 어렵지 않다고 결국은 다 잘될 것이라고 어깨라도 두드려주는 기분이다.

펀드로 처음 수익을 맛보았던 것도 최초의 적금 만기와 비슷한 시기였다. 200만 원을 펀드에 투자했고 3개월 만에 10% 수익을 내고 나왔다. 물론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적금 만기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다. 아마도 콜라를 큰 컵 들이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척추를 관통하는 전율감이 있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이후로 펀드를 몇 번이나 환매를 하면서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기도 했다. 이익을 보면 물론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적금 만기에 느낄 수 있는 강건한 감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느낌의 차이는 아마도 펀드의 수익률이 좋은 것은 온전히 나의 애씀에 의함이 아닌,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요소(시장이나 운)에 의해 결정된 부분이 훨씬 크기 때문일 것이다. 길에서 만원을 주웠을 때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그것에서 장기적인 기쁨을 지속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금 예금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온전히 나 스스로와의 싸움이다. 이자는 온전히 내가 충동적 소비와 우발적 비용을 인내하며 끝까지 버텨냈는가에 의해 결정이 된다. 예적금에 가입된 순간부터 나의 행동 이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수익이 단 1원이라도 났다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애씀에 의한 것이다.

게다가 펀드처럼 만기가 존재하지 않거나 보험처럼 만기가 초장기인 상품과 다르게 적금과 예금은 모두 만기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만기의 도래는 그 자체로 강력한 피드백이다. 나는 꽤 자주 예금의 명세들을 조회한다. 스마트폰으로 만기가 된 예금들과 만기가 다가오고 있는 예금들의 명세를 조회할 때마다 그간의 고생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며 어쩌면 내가 그동안 의외로 꽤 잘해온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 고기를 먹지 않아도 으쌰하며 힘이 난다.

이는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나는 은행 창구에서 적금 만기가 되어 온 손님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금리가 낮다고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결국 다시 적금에 가입한다. 아마 그들도 내가 느낀 것과 거의 동일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느낌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적금을 운용하는 방법 중에 풍차 돌리기라는 방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풍차 돌리기를 사용한다. 풍차 돌리기를 했을 때 특별히 금리가 오르거나, 복리효과가 생기거나, 절세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예금과 적금을 여러 개로 분산해서 운용함으로써 주기적으로 재예치해야 하는 번거로움만 추가로 생기게 된다. 하지만 풍차 돌리기가 주는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 바로 그 번거로움에 있다. 풍차 돌리기를 해서 예적금의 만기가 매월 도래하도록 하면 그 금액과는 무관하게 투자자는 매월 예적금의 만기를 경험할 수 있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매주/매일 예적금의 만기가 도래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당신의 핸드폰에는 알림이 뜬다. 벌써 만기라고. 벌써 이만큼 모았다고, 잘하고 있다고, 잘될 것이라고.  

적금에 가입하는 요령은 이렇다. 처음에 적은 금액과 짧은 기간으로 적금을 가입해본다. 그리고 그동안 약간의 절제와 절약을 한다. 얼마 후 적금 만기가 되었다는 휴대폰 알림이 울린다. 돈이 조금 모여있다. 금액은 중요치 않다. 순수하게 내가 벌어들인 돈을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큰 금액을 조금 더 긴 기간 동안 적금을 가입해본다. 성공한다. 다시 조금 더 큰 금액으로 시도해본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금액과 기간을 좀 더 낮춰서 다시 시도하면 된다. 그렇게 계속 반복한다.

이렇게 적금을 하면서 나는 오래전 리니지를 할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적금 만기가 올 때마다 띠링띠링하고 경험치가 쌓이는 것이다. 양치를 하다가도 띠링띠링, 밥을 먹다가도 띠링띠링, 회의를 하는 중에도 띠링띠링 만기 안내 팝업이 뜬다. 프로 적금러의 세계에서 레벨은 금액 그 자체다. 레벨 1억 돌파, 레벨 2억 돌파, 레벨 3억 그리고 얼마전에는 레벨 4억을 돌파했다.


최초 나는 월 납입액 1만 원이라는 쪼렙존에서 헤매던 돈 없는 직장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아내와 파티를 이루어 월 합산 납입금액 500만 원, 월 합산 납입금액 600만 원을 넘나드는 던전에서 경험치를 쌓고 있다. 심지어 아주 오래전 시작한 재형저축(7년납 비과세 4%대 금리)이라는 퀘스트도 조만간 완료하게 될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그 퀘스트를 깨는 최초의 프로 적금러가 될 것이다.

나는 중학생 때 여드름투성이의 게임중독자였지만 리니지 세계에서만큼은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이를 먹고 배 볼록 나온 아저씨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투자의 세계에서 나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절제된 라이프 스타일로 구성된 탄탄한 잉여현금흐름, 아직은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금융지식을 합쳤을 때 나의 위험 내구도는 사실 만렙에 가깝다. 그러므로 실패할 수 없다. 내가 투자에 실패한다는 것은 리니지에서 만렙 풀강화 기사가 쪼렙존에서 해골과 싸워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도 여기까지 왔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더 어려운 난이도 - 예금과 적금의 세계를 떠나 본격적인 투자의 세계로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가 리니지를 플레이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새로운 던젼에 도전했듯이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재테크란 응당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적금도 리니지 만큼이나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불어나는 자산을 바라보는 재미는 리니지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강해지는 것은 캐릭터가 아닌 바로 나일테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요령이 필요합니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가장 중요한 요령은 아마 통장분리일 겁니다. 적금을 활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령인 통장 분리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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