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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Aug 03. 2019

나는 오늘 메로나가 땡긴다.

지출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내게 허락된 메로나는 단 1개뿐이었다. 상수(Constan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로나 1개는 내게 부족했다. 그러므로 나는 메로나를 먹을 때면 어떻게든 그 작은 아이스크림 조각에서 최대의 만족을 뽑아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메로나를  핥아서 천천히 녹여 먹곤 했다. 이 방법은 메로나를 조금 더 오래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단단하게 얼은 메로나가 어금니 사이에서 사각 하며 녹아내리는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때때로 메로나를 녹여서 먹기도 했고, 이로 깨물어 먹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녹여먹다가 나중에 깨물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도 나는 1개의 메로나에서 1개를 초과하는 메로나 만족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시도 끝에 나는 결론 내렸다. 이 우주에 1개의 메로나에서 1.5개의 메로나 만족을 만들어 내는 방법 같은 건 없는 것이라고.


언제인가 나는 스크류바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삘삘 꼬인 그 빨간색 아이스크림에서는 상큼한 딸기향이 풍겼다. 나는 스크류바의 딸기향에 이끌려 그것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 손의 메로나가 천천히 녹아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게 메로나의 커다란 덩어리가 녹아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경악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메로나 1개에서 1.5개의 메로나 만족은커녕 0.5개의 메로나 만족도 얻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살고 있는 우주의 근본적인 뒤틀림을 내게 깨닫게 해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거지 같은 우주에 살고 있는 한 나는 1개의 메로나에서 1.5개의 메로나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1개의 메로나에서 0.5개(심지어는 0개의!)의 메로나 만족밖에 얻지 못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니 가능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이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말이다. 이 우주는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삘삘 꼬여있고 그 결과 우리는 만성적인 메로나 만족 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메로나의 잘못도, 스크류바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이 우주가 이렇게 가혹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반격의 기회는 남아있다. 거부권의 행사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나는 의지를 담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스크류바! 메로나의 이름으로 널 거부하겠다."라고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가 스크류바를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지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메로나 1개에서 완벽한 1개의 메로나 만족을 얻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의지를 다한 거부권의 행사는 내가 메로나에서 얻을 수 있는 메로나 만족을 1에 매우 근사한 수준까지 올려줄 수는 있다. 이것이 메로나를 먹는 완벽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최선의 방법인 것은 확실하다.


뭔가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다른 것보다 더 낫거나 바람직한 것이 전혀 없다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결국 우리는 가치 없고 목적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는 걸 피하면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거절을 피하는 행위는 단기적인 쾌락과 함께 장기적인 방황을 선사할 뿐이다.

뭔가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자신을 거기에 제한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에는 수준이 있다. 수준 높은 의미와 즐거움에 닿으려면, 하나의 관계, 기술, 직업에 수십 년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수십 년을 바치려면, 나머지 선택지를 거부해야 해야 한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중에서




하나의 삶은 하나의 메로나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1개의 삶에서 1개 삶의 만족을 뽑아내는 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부하면 삶의 만족을 1에 가깝게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것과 삶에서 거부권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가 마주한 가장 큰 문제는 거부권의 행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내가 삶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 양육인지, 성공인지, 섹스인지, 예술인지 혹은 그 외 다른 수많은 것들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중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여기에 어떻게 순위를 메길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큰 범주의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보다 더 세부적인 범주의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거부권의 행사 이전에 선택이라는 과정이 종결되어만 하는데 나는 이것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은 골라 맛보기 일 것이다. 우선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형형색색의 맛을 모두 음미해본다. 여행도 해보고, 연애도 해보고, 술도 마시고, 운동도 해보고, 글도 써보고, 사진도 찍고, 음악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나에게 가장 큰 기쁨과 의미를 주었던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부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생의 만족이 1에 가까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어려서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하느라 20세까지 별다른 경험이랄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대부분 취업 준비를 하느라 별다른 탐색 활동을 할 시간이 없었다. 봄날의 꽃 같은 연애를 해보지 못했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나지도 못했다. 무미건조하게 살다가 취업을 했고, 야근을 밥먹듯이 했고, 결혼을 했다. 그러니 나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삶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 손의 아이스크림은 거침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못했고 거부권도 행사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부조리했다. 세상에는 형형색색의 온갖 아이스크림이 존재하는데 나는 그중 한두 가지도 제대로 맛을 보지 못한 상태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상태로는 0.3개의 생의 만족도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초조했고 불안했다.




나는 검소하게 살아야 했다. 달랑 500만 원을 가지고 신혼생활을 시작한 것을 아내가 힘겹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혼생활을 시작한 아파트에서 물을 틀면 녹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물에 갓난아이를 씻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녹물이 나오지 않는 아파트가 눈알이 튀어나오게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검소하게 살아야만 했다. 삶에 불요불급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부해야 했다. 닥치고 일단 거부권부터 행사해야 했다. 선택 따윈 없어도 거부권을 행사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최초의 거부는 ‘요맘때’였다. 요맘때가 내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해외여행을 좀 다니라고.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에 가서 바닷바람을 좀 쐬거나, 히말라야 트레킹 같은 것을 하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의 입에서는 이국적인 나라의 로맨틱한 여름밤 향내가 났다. “바다 너머에는 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장소, 음악이 있어. 시간이 지나고 네가 늙으면 그것들은 더 이상 너에게 지금과 같은 기쁨과 영감을 줄 수 없을 거야.”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어쩌면 거기에 내가 평생을 찾아왔고, 또한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려온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의미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행기 푯 값과 호텔비와 온갖 이동수단에 대한 초과 비용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거부한다."라고.


그다음은 '돼지바'였다. 그가 내게 와서 금요일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고 말했다. 그의 몸에서는 성공한 남자의 자신감과 활력이 뚝뚝 떨어졌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 같이 삼겹살과 소주를 먹고 형, 동생 하는 거지. 그렇게 서로를 지켜주는 거다. 서열이란 사다리는 서로 밀고 이끌어 주는 게임이다. 무리 지어 함께하는 게임이라 혼자서는 버틸 수가 없다. 너에게는 내가,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다."라고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낙오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술값과 안주값 그리고 택도 없는 2차 비용과 심야 택시 할증이 붙는다. 그러므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거부한다."라고.


그들을 거부하면서 나는 내 삶의 많은 가능성이 통째로 허물어져 내리는 상실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나는 거부했다. 그들이 내 삶의 구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그리고 그들이 의미하는 그 모든 표상과 세계관을 거부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보석바'와 '메가톤바', '옥동자', '누가바', '비비빅'을 차례 차례 거부해야 했다. 각각의 거부에는 독특한 슬픔이 있었다. 그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나는 의지를 담아 그것들을 거부할 수는 있었다. 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거부권 행사의 횟수가 증가할수록 그것들이 내는 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작아져 간다.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 중에

이상하게도 그곳에 메로나가 하나 놓여있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로 그 맛 - 메로나




이 우주에는 세상의 모든 아이스크림을 다 주어도 바꾸고 싶지 않은 음악과 글이 존재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글과 음악을 공짜이거나 공짜에 가까운 가격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 먹고 또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런 부조리한 우주에 우리를 홀로 남겨 놓은 것이 무지하게 미안했던 누군가가 남겨놓은 선물이 아닐까? 나는 이 이론에 대한 다른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증거 1.

몇 해 전 나는 남산에서 달리기를 한 적이 있었다. 7.84km 즈음이었을 것이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침 바람이 불었고 지천으로 벚꽃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나는 참 기뻤다. 돈도 직장도 여자 친구도 없었지만 정말로 기뻤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이 우주에 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증거 2.

몇 달 전 나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이는 처음 만난 친구와 즐겁게 놀고 있었고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릎 위에 핸드폰과 키보드를 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내 안에서 글이 저 혼자 빚어져 밖으로 튀어나오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을 글을 썼다. 이때도 나는 참 기뻤다.


증거 3.

류시화, 테드 창, 박민규와의 첫 만남이 기억난다. 서점을 걷고 있는데 이들이 나를 불렀다. 집요한 인력이 내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거미가 척추를 타고 기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참 기뻤다. 세상에는 증명할 수 없는 인연이란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의 상당 수가 이렇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참 기뻤다.


그리고 내게는 훨씬 더 많은 증거의 목록이 있다. 내가 살아오면서 남발한 그 수많은 거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행복했던 일상의 목록을 끊임없이 - 끊임없이 적어 내려 갈 수 있다.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돈이 들지 않거나, 거의 들지 않는다. 지출과 행복에는 사실 별 상관관계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역의 상관관계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매일 밤 보석바에 취해 비틀거렸거나 주말마다 쌍쌍바, 죠스바 같은 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허비했다면 나는 이런 삶의 순간들을 제대로 만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부를 남발하는 내게 누군가 말했다. 그렇게 살다가 후회할 것이라고. 중용을 지키라고 말이다.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천만에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중용 싫어해요.”라고.




만약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럽다면 그리고 나처럼 중용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말하고 싶다. 일단 삶에서 지출을 유발하는 모든 것을 다 거부해보라고 말이다. 선택 따윈 필요 없다. 지금까지 선택을 못했다면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혼신의 힘을 다해 다 거절하고 그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거부하고 거부하고 거부한 끝에 최종적으로 거부하지 못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메로나다.


언제 먹어도 맛있고 아쉬운 메로나

당신 하나.

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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