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국인, 안 가거나 못 가는 여행지
나홀로 여행에서 만난 시간들..!!
그곳에는 이방인의 등장으로 문밖을 빼꼼히 내다보는 아낙네는 물론 아이들의 환영이 겹친다. 그들은 이곳 척박한 환경의 바닷가에서 사랑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아이들을 길렀을 것이다. 해가 뉘엿거린 데도 나는 점점 더 돌집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돌집 곳곳을 돌아보고 있었다.
까마득한 시간 저편의 시간이 멈추어 선 곳. 우리도 장차 이런 모습을 남기게 될까.. 새해 첫날부터 좌표를 살펴보며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부귀영화와 허무함이 공존하는 땅.. 귀가를 서두르다 들르게 된 어느 유적지는 태양의 뉘엿거림을 붙잡아 둘 정도로 나를 벌판 한가운데 남겨두었다. 아드리아해는 푸르다 못해 얼어붙었으며, 하늘은 금싸라기를 마구 쏟아붓고 있었다.
지난 여정 석기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 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가 천천히 둘러본 돌집(capanne di pietra)은 이곳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마른 돌 오두막집(LE CAPANNE IN PIETRA A SECCO, 이하 '오두막집'이라 부른다)이라 불렀다. 석기시대 때 이렇듯 세련된 오두막집은 짓지 못했을 것이며 차차 발전을 거듭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석기시대 이후 청동기 시대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거석 문화인 고인돌(Dolmen, 지석묘)이 당시를 살았던 부족들의 무덤이었다면,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유럽 등지에 분포된 오두막집은 주거지로 지어졌던 것이다.
지난해 5월 17일 경, 코로나를 피해 하니와 함께 바를레타 외곽을 산책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오두막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기록을 벌판에 나뒹구는 고대의 문화유산이란 글로 발행한 바 있다. 위 자료사진이 그것이다. 신기했다. 관련 브런치를 열어보면 오두막집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과수원 곁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네댓 명은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현재는 간단한 농기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에 지천으로 널린 게 이런 유적들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겼다. 그런데 연대와 유적이 만들어진 연대와 상관없이 어떤 용도로 사용했던지 우리 곁에 남아있는 오두막집 등 거석문화를 살펴보는 동안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우리도 언제인가 살아왔던 흔적을 남길 텐데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연재 글 한국인, 안 가거나 못 가는 여행지를 잠시 돌아봤다.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저녁놀과 함께 새해를 알리는 해돋이를 만나기 위해 타란토(Taranto)로 떠났다. 그 과정에서 맨 먼저 전혀 뜻밖의 장면과 조우하게 됐다.
그곳은 링크된 바와 같이 인구 3만 수천 명이 살고 있는 마싸프라라는 곳이었다. 현지 방언으로는 마자프레(mas'safra, Mazzàfre)라 부르기도 하는 곳. 나는 그곳에서 전혀 낯선 도시를 만나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추어 선 상상불가의 도시였다. 그때 연재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 선조들로부터 대를 이어 이곳에 살아왔던 것이랄까.. 신석기시대 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맨 처음 동굴 속에서 살았을 것이며, 차차 발전을 이루어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수도나 전기가 공급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전염병이 창궐할 당시를 생각하면 이들이 쉽게 전염병에 노출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회석 암반 위에 집을 지은 이곳에 물이 흔치 않은 곳이므로 개인의 위생 상태는 열악했을 것이란 게 짐작이 갔다. 이런 데서 패스트 같은 무서운 병이 창궐했다면 죽음의 도시로 변하는 데는 시간문제일 것. 좁은 골목길을 자동차로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몇 대의 소형 자동차와 트랙터가 지나갔다. 그때마다 골목길이 조금 넓은 곳을 찾아 길을 비켜주며 이동하다가 거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차를 돌렸다.
차를 돌려세운 이유는 간단했다. 낯선 동네이기도 했지만 인적이 끊긴 연말연시의 음산한 도시의 풍경은 누구든지 별로 선호할 곳이 못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활기찬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며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다시 차를 돌려 본래의 목적지 타란토로 떠났는데.. 타란토는 대략 20만 명이 살고 있는 곳으로 뿔리아 주의 주도로 매김 한 바 있었다. 뿔리아 주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부산에 해당하는 곳이랄까.. 마싸프라에서 잠시 머문 나는 곧 타란토에 도착할 수 있었다며 현지 분위기를 끼적거렸다. 그곳은 한 때 번창한 곳이었지만 빈부격차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현재와 과거의 모습이 상반되는 풍경을 한 여행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오니아 해를 만난 것으로 족했다. 처음 만난 바다를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 했다.
연말연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한 해를 맞이하고자 나선 여행에서 난생처음으로 전설의 바다 이오니아 해와 마주친 것이다. 드넓은 타란토 항구 저 너머로 2020년의 마지막 호흡이 간당간당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항구와 사뭇 다르게 타란토는 여유가 넘쳐났다. 저만치 항구가 보이는 발아래로 무시로 파도가 밀려들었다. 물빛은 너무 맑아 속이 훤히 비쳤으며 내가 서 있는 곳은 오래전에 건설된 아르고네제(Castello Aragonese)성이 코 앞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바다 한편에서 그님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저물어 가는 타란토를 멀리서 바라보며 곧 바다 너머로 사라지게 될 2020년 마지막 저녁놀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님의 마지막 숨소리를 임종에 비교하며 이렇게 썼다.
그런 잠시 후 부모님을 멀리 떠나보내는 듯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이 아닌가 싶었던 시간들.. 늘 봐 왔던 죽음이지만 막상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 하늘나라로 떠날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 함께 했다. 생전 그렇게 목 놓아 꺼이꺼이 운 적이 또 있었을까..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모질고 냉정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잔혹함을 쏙 빼닮았다. 이런 등식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었으며 장차 내게도 다가올 운명인 것이다.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지..
혼자 바라보는 이오니아 해 너머의 긴 호흡.. 자칫 눈시울이 뜨거워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 달님이 이오니아해와 타란토를 훤히 비추고 있는 가운데 점점 날이 밝기 시작했다. 그때 심정을 해돋이 지켜본 달님을 보내 드리고 편에 기록으로 남겼다.
천년고도 이오니아 바다 너머로 타란토가 아침을 열고 있다. 새해를 알리는 먼동이 터오고 있는 것이다. 이날 나는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다. 차박으로 잠시 눈을 붙였지만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잠을 설치고 있는 것이다. 저만치 높은 하늘에는 달님이 은빛 뽀얀 가루를 쉼 없이 흩뿌리고 있었다.
이오니아 바닷가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밤새 폭죽 소리가 지축을 흔들더니 깊은 잠에 빠져들고 바닷가를 서성이는 한 남자 머리 위로 달빛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밤은 길었다. 동짓날 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그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오면서 해돋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애원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 다가오는 시간을 반갑게 맞이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롭고 신비로운 법이다. 나의 존재감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실체 불명의 하늘에 감사하는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자 행복한 일 아닌가..
해돋이 직전의 일출에 비친 이오니아 해는 신비로웠다. 일출보다 더 아름다운 달님이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을 잔뜩 머금은 이오니아 바다 위로 달님은 밤새 나와 함께 해주었다. 바뀐 건 은빛 고운 가루가 아니라 붉게 물든 눈시울을 닮았다.
아직 해돋이가 시작되기도 전에 밤새도록 나와 동행했던 달님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동안 저만치서 해돋이가 시작된 것이다. 시침이 자정을 알리는 즉시 도시는 온통 전쟁터를 방불했지만 동이 터오면서 세상은 침묵 속으로 빠져든 듯했다. 나는 해돋이가 시작된 직후 차를 돌려 브린디시(Brindisi)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드리아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에서 만난 바다와 사뭇 다른 느낌이 그 바다가 나를 불러 세웠다 편에 오롯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
나는 그곳에서 또르레 뿐따 뻰네(Torre Punta Penne 또는 Torre di Punta Penne )라 불리는 전망대를 만났으며, 이 전망대는 나폴리 왕국 당시 축조된 것으로 브린디시 뿐따 펜네 델 세르로네 자연공원(Parco naturale comunale di Brindisi Punta Penne Punta del Serrone)이었다. 그곳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기게 된 것이며, 전망대는 물론 공원 전체를 천천히 돌아본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진귀한 풍경을 만나며 이때부터 먼 나라에서 온 어린 왕자와 만나게 됐다. 새해 첫날 나의 자아를 깨운 곳이 어느 바닷가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까마득히 잊고 살던 자아에 따사로운 볕이 찾아든 것이다.
... 그리해서 나는 서로 가슴을 열어 놓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도 없이 혼자서 살아왔다. 이것은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고장을 일으킨 때까지의 일이다. 비행기 엔진에 무엇인가 결딴난 것이 있었다. 그런데 기계사도 승객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수선을 나 혼자서 해치워 보려고 마음먹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생사의 문제였다. 겨우 여드레 동안 마실 물이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첫날 저녁, 나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모래밭에서 잠이 들 게 되었다. 그것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있는 파선객보다도 훨씬 더 외로운 신세였다. 그러니 해가 뜰 무렵, 이상한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잠이 깨었을 적에 내가 얼마나 놀랐겠느냐 말이다. 그 목소리는 이런 말이었다.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행운이었다. 볕이 잘 들지 않던 음지에 어느 날 빛나는 별이 다소곳이 품에 안긴 듯한 날이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밝은 볕 아래 놓인 듯싶지만 속 사람은 얼마나 슬퍼하고 암울한 기분에 젖어있었던가.. 깊이 잠든 나를 깨운 건 어린 왕자였다. 그는 사는 동안 자주 만나지 못하거나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아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 묻지 않은 자아를 일깨워 주고 장차 머나먼 여행에 동반자가 될 게 틀림없었다.
나는 당시 느낌을 어느 바닷가에서 만난 귀공자 편에 남겨두었다. 내가 잊고 살았던 나의 유년기..
나의 이런 자세는 오래전에 형성되었다. 초등학교(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여섯 살 때쯤이었다. 집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산골짜기의 맑은 계곡물뿐만 아니라, 졸졸거리며 흐르는 골짜기에서 파릇한 이끼가 돋아난 풍경이 너무도 좋았던 것이다. 고사리 손으로 물을 받아 마시면 속까지 말갛게 변하곤 했다. 그 맛을 한 번 들인 후 친구들과 함께 자주 산골짜기로 놀러 가곤 했다. 이제 백발이 된 친구들..
나는 그 바닷가에서 전망대를 구석구석 살펴보며 아드리아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며 다시 유년기를 소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망대 꼭대기에서 태양이 빛을 잃으면 달이 떠요란 느낌을 포스트에 담았다.
사람들은 혼자 남게 되면 죽는 줄 안다. 그렇게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태양이 빛을 잃으면 달이 뜬다는 거 알랑가 몰라.. 그믐달이면 어떻게 되냐고 묻지 마라. 그때는 별님들이 나와 함께할 것이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건축물 곁에 한 무리의 선인장이 자라나고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 중에 어린 왕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도 외로웠을까.. 어느 날 "나는 혼자야"라며 흐느끼듯 외쳤다.
IO SONO SOLO..!!
바닷가에서 흔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풍경이 나를 돌아보게 만든 것도 행운이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나의 눈에 띈 것은 작은 웅덩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들풀 혹은 해초들이었다. 새해 초하룻 날의 볕은 봄볕 같았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재밌는 풍경을 소환하며 기뻐했다. 포스트 제목 개다리춤 소환한 바닷가만 참조해도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이랬다.
나는 두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다리를 후덜덜 요란하게 떨면서 까까중머리를 쓸어 올리며 가끔씩 손바닥으로 이마를 쳐댓다. 좌중은 이 순간부터 난리법석이다. 마치 섹시한 무희가 위문공연을 온 풍경이랄까.. 어른들이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면 어린 녀석은 덩달아 신이 나서 두 다리가 발발발.. 아싸~ㅋ 엄마 아부지도 까무러친 건 당연하다. 객석(?)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아고.. 이눔 장차 뭐가 될라꼬 저러노.ㅋㅋ"
어느 날 남의 나라 바닷가에서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부모님과 이웃들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흔치 않은 일이자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이 이런 맛일까.. 나는 그곳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여전히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간섭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짧은 일정의 여행이 피곤할 법도 한데 여전히 바닷가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잠시 후 요정(妖精)들이 사는 언덕에 다다라 아드리아해 바닷가 풍경에 빠져들곤 했다. 그들과 나눈 대화는 이랬지..
-너는 어느 별에서 온 거니..?
-ㅋ 안드로메다요. 아더찌, 그 별 아세요? ^^
-알다마다.. 글치만 너무 먼 곳에 있는 걸..ㅜ
-와 신난다! 거기가 저의 고향이데요. ㅋ
언덕 위에서 만난 요정과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뿐만 아니었다. 언덕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그 바닷가에 남은 그림자 하나가 나를 다시 붙들었다. 그곳에는 다 허물어져 가는 전망대 하나가 바다를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곳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곳이자 시간이 박제된 곳이었다.
전망대 이름은 또르레 떼스타 델 갈리꼬(Torre Testa del Gallico).. 브린디시에서는 지안꼴라(Giancola)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또 자딧꼬(Jaddico)나 까뽀갈로(Capogallo)로 부르기도 하며, 전망대가 있는 곳은 중요한 습지로 보호되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곳.. 그곳에도 사랑의 흔적이 묻어났을까.. 그곳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무엇이든 시간이 말한다. 죽자살자 사랑했던 사람들도 어느 날 운명의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제한된 시간 속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것처럼.. 내 앞에 우뚝 서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고 있는 이 전망대 또한 주인을 잃고 버려진 채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이방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서기 2021년 1월 21일(현지시각) 저녁 무렵, 나는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새해 1월 1일 동안 1박 2일의 여정을 돌아보고 있다. 단지 1박 2일의 여행이었을 뿐인데 내 생의 타임라인을 기록한 기록물이 21편으로 꽤 많이 쌓였다.
뿔리아 주의 꼬스따 데이 뜨룰리 리빠뇰라(Cozze/Costa dei Trulli Ripagnola) 유적지의 오두막집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이탈리아 전역 혹은 유럽 등지에 살았던 사람들의 1박 2일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고 쓰임을 받게 된다. 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스무날이 더 지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오두막집을 돌아서면서 발길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피곤이 쌓여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자꾸만 발길을 붙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시간여행이 그런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 위에 다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연재 글 한국인, 안 가거나 못 가는 여행지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동안 관련 포스트를 응원하고 사랑해 주신 이웃 여러분들과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드린다.일, 저녁놀과 해돋이 시간여행
Cozze/Costa dei Trulli Ripagnola_La Regione Puglia in ITALIA
il 21 Genn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