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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Dec 03. 2022

딸에게 배운 '본질'의 개념

본질의 철학

"본론을 말해, 너더분한 말 집어치우고"

"본질을 좀 보라고, 상황만 보지 말고"


내가 딸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지껄이던 내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렇게나 본질주의자였었나? 그럼 본질이 뭔데?' ‘내가 본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질문은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 스스로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탁이 완료되면 울리는 알람음처럼 그때가 와서 저절로 내 귀에 들렸다. 그때라는 건 털이 많아진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사춘기조차 한번 없던 딸이 지 맘대로 휴학하고, 보컬학원이나 다니면서, 단기선교로 러시아에 가겠다 우길 만큼 자라고 나서다.  


딸이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을 만날 때쯤, 괜히 하나님과 딸의 사이가 샘이 나서 슬쩍 전화를 걸어본다. 통화는 항상 초반까지 꽤 괜찮은 분위기로 근황토크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 뭔가 내가 딸이 걱정되는 멘트(-가령 ‘엄마가 우리 딸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지?’ 등)를 날리기라도 하면, 꼭 뜬금없는 딸의 울분으로 어색하게 통화가 급하게 마무리 된다.


"그렇게 걱정되시면서 왜 제가 넘어졌을 때 한 번도 일으켜 주지 않았어요?"


또는 통화 중에 지나가는 아기나 강아지를 보고 내가 웃기라도 할라치면, 역시나 딸은 지난 20년간의 억울함을 담아 나에게 따진다.


"왜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는 그렇게나  환하게 웃어주면서, 저에게는 항상 무표정이었어요?"


딸의 따짐은 아버지의 따귀를 기억에서 끌고 온다. 아버지가 때리는 그 따귀는 4차시로 이루어져 있다. 찰진 그 소리에 1차로 놀라 무서워 눈을 감게 된다. 2차로 머리에 별들이 반짝인다. 그 반짝임은 나이트클럽 불빛처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내 머리를 잡고 어지럽게 흔들어 댄다. 3차로 볼에 얼얼한 아픔이 오고, 4차로 아버지 손바닥위 지문까지 내 얼굴에 아로새겨진다.


어릴 적 그 따귀 맛의 4차 변화에 1종을 더한 알찬 구성의 종합선물세트를 딸아이가 나에게 전한다. 그 추가 1종은 아버지처럼 따귀를 마구 휘갈길 수 없는 21세기 부모로서의 억울함이다.  그 억울함은 내가 생각했던 그 본질 덕분이다. 나에게 자녀라는 본질은 순종과 근면이고, 부모라는 본질은 원칙과 권위였다. 나는 마지막 본질을 짜서 그 정수를 아이에게 뿌렸다.


"은지야. 세상의 모든 일을 네가 다 이해할 순 없어, 나도 내 부모에게 이해 안 되고, 따지고 싶은 것이 수백, 수천 가지가 넘어. 본질을 보라고, 상황을 보지 말고. 아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는 게 쉬울 거 같니.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쉬울 거 같니. 기다리는 게 더 어렵단다. 나는 너를 그만큼 잘 키우기 위해서 어렵게 기다린 거야."


이렇게 입에서 지껄여지는 대로 막 뱉어 놓고 나니, 세탁이 완료되면 울리는 알람음같이 그 질문이 들렸다.


‘내가 본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내세운 본질은 그저,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사후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강조한 순종과 근면함이란 건, 내가 꼴리는 대로 아이를 키워놓고선 이제 와서 멋지게 포장한 해석에 불과할 수 있다.


‘단하소불’이라는 중국의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옛날 중국의 어느 사찰에 사는 단하라는 사람이 추운날씨에 그만 나무로 만든 불상을 태워 땔감으로 썼다. 그 사찰의 주지가 그것을 비난하자 단하는 사리를 찾으려고 불상을 태운거라고 변명했다. 주지는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냐고 말하다가 스스로 깨닫는다. 나무에 사리가 없으니 그 나무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 땔감으로 써도 되는 것이다. 주지는 목불 안에 부처가 있다는 본질에서 목불 안에 나무가 있다는 새로운 본질을 창조했다. 그리고 자유를 얻었다. 더불어 추위도 모면했다.


주지가 단하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듯이 나도 자녀를 통해 자유를 거저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주지가 목불 안에 부처가 아닌 나무를 보았듯이 내가 딸 안에 새로운 본질을 창조하면 될터.새로운 본질을 만들기 위해 사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사유 1. 딸은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인식한다. 딸을. 인식하는 사람은 나고, 딸은 나에게 인식된다. 그 관계와 상황은 판단은 내가 한다. 그러니 본질이라는 건 결국에 너무나 인간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사유 2. 반대로, 나는 딸에게 무엇인가

딸은 인식한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은 딸이고, 나는 딸에게 인식된다. 따라서 그 상황과 판단은 딸이 한다. 그러니 엄마의 본질이란 것은 엄마 하기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  그러니 “엄마는 넘을 수 없는 산 같아요”

“엄마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요” 라는 차가운 딸의 시선도 바뀔 수 있을 터.


나는 아이가 힘들 때조차 자녀로서, 학생으로서, 한 인간으로의 본질만 따졌다. 향기롭던 나의 사후해석적 성향이 강한 그 본질에서 이제 꿉꿉한 냄새가 난다. 아이는 자라고, 나는 늙는다. 그와 함께 세상도 변한다. 그러니 아이가 넘어졌을 때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두는 건 무관심이고, 일으켜 주는 것이 보호일 수도 있다. 뭐가 맞든 틀리든 간에, 내 아이가 힘들었다고 하니, 상처였다고 하니, 딸과 나의 자유를 위해 새로운 본질을 생각해야 할 때다. 건조 완료 알람음도 울릴 때까지 얼른 생각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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