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에 지친 육신과 영혼을 채워주는, 양정순대국
{EP22}
4장. 성수동 사람
성수스러운 맛집 시리즈 -4
사장님,
여기 김치 순댓국 한 그릇 주세요~
'국밥충'이라는 말이 있다. 2만 원짜리 파스타를 먹으면서 ‘이 돈이면 국밥 두 그릇 든든하게 먹지’라고 외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국밥충이다. 아주 대단한 식사가 아니라면 만 원 내외로 끊는 것을 선호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만원으로 먹기에 가장 실패 없는 메뉴는 국밥이다. 돼지국밥도, 순대국밥도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뼈해장국은 맛의 격차가 식당마다 커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국밥충이면서도 나름 까다로워서, 연예인 입간판이 세워진 프랜차이즈 순대국밥집은 가지 않는다. 고기는 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고, 특유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도 별로다.
이렇게 나름의 기준을 가진 국밥충의 마음을 사로잡은 성수의 국밥집이 있다. 바로 양정 순댓국이다. 이 집에 가면 다른 거 먹을 필요 없다. 무. 조. 건. 김치 순댓국이다. 김치가 들어서 빨간 김치찌개 같은 순댓국을 상상하겠지만, 틀렸다. 시래기 대신 배추가 들어간 순댓국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원래 7천 원이었는데, 지난 8월 확장 이전을 하게 되면서 8천 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이 가격이어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퀄리티임을 확신한다.
"사장님 김치 순댓국 하나요~"
메뉴를 주문하고, 항아리인 척하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깍두기와 배추김치를 접시에 덜어 숭덩숭덩 자른다. 그리고 순댓국이 나오면, 뚝배기에 있는 다데기를 앞접시에 덜어내어서 조금 투명하게 먹는다. 들깻가루도 많이 넣으면 텁텁할 수 있으니 한 숟가락만 넣는다. 간은 무조건 새우젓으로 맞춰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킥 포인트 등장. 사장님께 요청하면 냉장고에서 잘게 썬 청양고추를 갖다 주신다. 한 스푼은 순댓국에 넣고, 한 스푼은 쌈장 그릇에 넣는다. 그렇다. 마치 아저씨처럼, 순댓국 한입 청양고추 한입 먹을 예정이다. 사실 필자는 양정순대국에서 청양고추 먹는 맛을 알게 되었다. 청양고추는 첫 입에 맵지 않다. 사우나에 들어가면 땀구멍이 열리고 땀이 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청양고추도 매워서 땀이 날 때까지 서서히 몸의 온도를 높인다. 중간쯤 먹으면 땀이 소나기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티슈 한 장을 뽑아 이마에 붙이고 다시 열심히 먹는다. 아무리 먹어도 고기가 다 없어지지 않는다. 좋으면서, 배부르다.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이렇게 고기만으로 나를 배부르게 하는 국밥집은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밥은 반공기만 먹는다. 그렇게 먹어도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부르다.
코로나에 걸려 격리 중이었을 때 카를로에게 김치 순댓국 포장을 부탁한 적이 있다. 목이 칼칼해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은데, 이 주변에 양정순대국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굳이 부탁까지 해서 먹었다. 카를로가 집 문 앞에 두고 간 순댓국을 가져와 냄비에 넣어 팔팔 끓였다. 집에서 먹으니 양이 얼마나 많은지 체감되었다. 혼자서 두 끼를 순댓국으로 먹었다. 역시나, 감기가 뚝 떨어지는 보양식이라도 먹은 기분이었다.
우리 엄마가 해주시던 곰탕 따위가 먹고 싶을 때 가기도 한다. 나의 엄마 송여사는 유기농 마트인 한살림에서 한우 잡뼈를 사서 푸욱 고아 곰탕을 해주었는데, 사골을 넣은 것보다는 덜 뽀얗게 우러났지만 그 맛은 깊고 감칠맛이 진했다. 따로 살게 된 지금은 곰탕은 무슨, 엄마 김치도 먹기 어려운 형편이다 보니 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럴 때면 양정 순대국을 찾는다. 혼자는 8,000원, 둘이서는 16,000원. 치킨 한 마리 혹은 샌드위치 하나 가격에 몸과 영혼까지 채워주는 순대 국밥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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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날것이 모여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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