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에 살아서 다행이야, 이랑칼국수
{EP20}
4장. 성수동 사람
성수스러운 맛집 시리즈 -2
사장님
여기 닭칼 하나랑 들깨옹심이 하나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식당은 '쓰러져 가는 노포 감성'이다. 이랑칼국수는 이와 정 반대의 외관을 가졌다. 깔끔한 신식 인테리어로, 얼핏 봐서는 다소 무난하고 평범한 식당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집 가는 길에 마주쳐도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유튜브 맛집 영상에서 이랑 칼국수가 튀어나왔다. 동네 밥집이라고 생각했던 식당이, 인터넷 세상 유명 맛집이었다니.. 알고 보니 내 친구가 슈퍼 히어로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까.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닭칼국수가 단돈 만천 원이니 실패해도 본전이다 생각하며 가봤는데, 이게 웬걸? 긴말 필요 없다. 이제 저녁에 뭘 먹을지 모르겠을 때 이랑칼국수를 간다.
이 집에 정말 남는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은 바로 식전 보리밥이다. 메뉴가 나오기 전에, 두 숟가락 정도 분량의 보리밥을 주신다. 거기에 반찬으로 나오는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비벼 먹으면 열무 비빔밥이 입맛을 돋운다. 더 엄청난 점은! 정식 메뉴에 9천 원짜리 열무 비빔밥이 있다는 점이다. 정식 메뉴에 있는 메뉴를 애피타이저 메뉴로 맛 보여준다는 점이 이 집의 강력한 Kick이다.
카를로와 둘이 가면 나는 닭 한 마리 칼국수, 카를로는 들깨 옹심이를 주문한다. 닭칼국수는 작은 닭이 한 마리 통째로 들어가 있다. 가게에서 직접 반죽한 야들야들한 생면 칼국수를 한입 즐기고, 담백한 닭고기를 겨자 소스에 찍어서 두 입 즐긴다. 광화문에 미국 대사가 즐겨 찾았다는 닭 한 마리 집도 가보았지만, 이랑칼국수가 몇 수 위다. 일단 닭고기 양이 압도적으로 많고, 겨자 소스의 감칠맛이 엄청나다.
나만의 소소한 팁을 전하자면, 닭칼국수를 먹기 전, 칼국수 면을 한 젓가락 떠서 들깨 옹심이 국물에 퐁당 적셔 먹는 것이다. 그러면 야들야들한 특유의 칼국수를 들깨로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주변 회사원들 점심 메뉴로 인기가 좋다는데, 감사한 점은 저녁까지도 같은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아마 강남이었다면 분명 점심에 만천 원에 팔다가 저녁에는 가격을 올렸을 것이다. 이랑 칼국수에서는 만 원대 닭 한 마리 칼국수가 종일이다. 먹을 때마다 정말 경건하게 감사한 맘이 든다.
배불리 다 먹었다면, 기분 좋게 결제를 마치고 커피 한잔을 뽑는다. 요새는 100원을 넣지 않아도 후식 커피를 즐길 수 있어서 참 좋다. 나 어릴 때만 해도 100원 없으면 못 먹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분명 배가 터질 것 같지만, 은은한 헤이즐넛 향과 달큰한 향이 가득한 커피를 한 손에 쥐고 썰렁한 가을 날씨를 느끼며 산책을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이 행복하다. ‘그래 이 맛에 성수 산다~’를 세 번 정도 얘기를 하면 그날의 산책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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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날것이 모여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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