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열 Sep 24. 2018

독일맥주열전

9월, 독일 곳곳에서 만난 맥주들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연재를 시작한지 꼭 1년이 지났습니다. 매 달에 어울리는 맥주 (예전 제목을 빌리자면, <이 달의 모범맥주>) 를 소개하는 이 시리즈가 끝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맨 처음 소개드렸던 10월의 맥주는 옥토버페스트 맥주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바로 독일 뮌헨의 라거 맥주 메르첸Märzen이었습니다.


10월의 맥주 메르첸과 함께, 옥토버페스트가 사실 그 이름과는 달리 9월에 시작한다는 사실을 전해드렸었습니다. 올해도 지난 토요일, 22일에 개막했습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할 9월의 맥주로 다시 한 번 독일의 맥주를 소개하기에 더없이 좋은 핑계군요. 저는 이렇게 처음과 끝이 어울리는 수미상관 구조를 참 좋아합니다. 시작점과 끝점이 같아지는 순간 모든 불연속성이 사라지지요. 더 가도 덜 가도 안 되는, 끝내기 가장 좋은 지점인 것입니다.


독일 맥주는 이미 네 차례나 소개되었습니다. 바로 10월의 맥주 메르첸과 뮌헨 라거, 12월의 맥주 도펠복, 3월의 맥주 헤페바이젠, 그리고 4월의 맥주 중 하나였던 베를리너 바이쎄입니다. 모두 독일을 대표하는 두 도시, 베를린과 뮌헨에서 유래한 맥주네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는 꼭 베를린과 뮌헨이 아니어도, 맛있고 값진 지역 맥주들이 많거든요.


마지막으로 소개드릴 9월의 맥주는, 독일 각 지역의 특산 맥주들입니다.



1. 쾰른Köln - 쾰쉬Kölsch


옛날부터 맥주가 워낙 생활화된 독일에는 형용사가 곧 맥주 이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둡다는 뜻의 둥켈dunkel이나 밝다는 뜻의 헬레스helles, 하얗다는 뜻의 바이쎄weisse 등의 예를 지금까지 보셨을텐데요, 이들과는 조금 다르게 특정 지역을 의미하는 형용사가 곧 맥주 이름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독일에서 4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이자 향수(향수를 뜻하는 오 드 콜로뉴eau de Cologne는 쾰른의 물이라는 뜻입니다)를 낳은 도시, 쾰른Köln과 그 형용사 쾰쉬Kölsch입니다.


쾰쉬 한 잔 뒤로 쾰른의 상징, 쾰른 대성당이 보입니다


쾰쉬는 에일과 라거 양 쪽의 성질을 모두 가진 대표적인 맥주로 꼽히지만, 기본적으로는 에일 맥주입니다. 즉, 세레비지에cerevisiae라는 이름의 에일 효모에 의해 발효되었고, 그 발효는 효모가 맥주 위에 떠서, 그리고 섭씨 20도 전후의 따뜻한 온도에서 이루어져 복합적인 향을 내는 에일 효모 특유의 화학 물질이 많이 들어있습니다(Mosher). 하지만 이 에일 효모라는 미생물은, 인간이 그 존재를 깨닫기 수천 년 전 이미 맥주 양조라는 기적을 일으키던 야생 효모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관련글: 라거와 에일의 차이


같은 종이라도, 야생의 에일 효모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발이 달린 인간도 떨어져 살면 인종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이 미생물이 무슨 수로 다른 나라 효모랑 유전자를 섞을까요. 그 중 쾰른이 위치한 라인 강 주변의 에일 효모는 유난히 냄새가 덜 나는 인종, 아니 효모종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 사람들은 에일 효모 치고는 조금 차가운 온도에서 맥주를 발효했습니다. 그 결과, 쾰른의 맥주는 다른 에일 맥주보다는 덜 '에일스러운' 차분한 맛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쾰른은 라인 강변에 위치해 로마 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 도시였고, 특히 강은 옛날에 맥주를 실어나르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였기 때문에 쾰른은 먼 옛날부터 맥주 양조가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쾰른 사람들은 자기네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뮌헨에서 라거 맥주가 유행할 때에도 쾰른에서는 품질 유지를 이유로 하면발효, 즉 라거 맥주 양조를 금지했을 정도입니다. 다만, 필스너의 대유행이 사람들의 입맛을 휩쓴 다음에야 좀 더 시원하고 차분한 맛을 찾는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저온 숙성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쾰쉬는 에일 효모가 살짝 더해주는 에스테르 향과, 저온 숙성, 즉 라거링lagering을 통해 부산물을 줄이고 맛을 단순화하는 라거의 특성이 합쳐진 아주 특징적인 맥주입니다. 실제로 쾰쉬를 드셔보시면,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만큼 아주 조금, 마른 과일의 향이 납니다. 이 마른 과일 향은 와인과도 조금 연관이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쾰쉬는 알코올 도수가 4.8도 전후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보리의 풍부한 고소함이 덜한 드라이한 스타일이라서 알코올 향이 꽤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드라이함과 알코올 향의 콜라보는 때로는 소맥을 연상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쾰쉬는 에일 맥주답지 않게 가벼운 맛으로 많이 마실 수 있는 세션 비어session beer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히 서빙 온도도 라거 맥주 부럽지 않게 차가워서, 한편으로는 여름에 즐기기 특히 좋은 서머 비어summer beer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맥주의 최고봉인 페일 라거(카스, 하이트...) 스타일과는 다르게 탄산은 조금 절제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이, 쾰쉬를 마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쾰른에 (그것도 여름에) 가는 것입니다. 쾰른에 관광을 간다면 절대 빠뜨리지 않는 쾰른 대성당 주위에는 쾰쉬를 파는 건물이 안 파는 건물보다 많습니다. 어딜 가나 가게 앞에 천막과 테이블을 차려놓고 저마다의 쾰쉬 맥주를 팔고 있는데,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가다 잠깐 앉아서 쾰쉬 한 두 잔을 홀짝이고 일어날 수 있는 부담 없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쾰쉬의 아주 큰 장점은, 한 잔이 보통 맥주의 반도 안 되는 200ml짜리라는 것입니다. 막대기라는 뜻의 슈탕에Stange라는 길쭉한 원기둥 모양의 잔에 쾰쉬를 서빙하고, 마신 잔 수만큼 코스터(맥주 컵받침)에 볼펜으로 막대기를 그어 계산할 때 참고합니다. 한 잔의 용량이 작기 때문에 잠시 앉아서 맥주 '한 두잔' 하고 일어난다는 것이 정말로 가벼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작은 용량이 맥주 매니아에게는 수십 종류의 쾰쉬 맥주를 하룻밤에 맛볼 수 있는 신의 한 수이기도 합니다. 쾰쉬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옆집으로 옮겨 그 맛을 비교 시음해보는 것은 꽤 재미있습니다. 차이가 생각보다 크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펠Gaffel 쾰쉬는 보리를 구수하게 볶은 맛과 그만큼 어두운 색깔이 특징적입니다.



2. 밤베르크Bamberg - 라우흐비어Rauchbier


독일 바이에른 주의 거의 북쪽 끝에 위치한 밤베르크는 11~12세기의 중세 도시와 건축이 중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맥주 매니아라면, 밤베르크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바로 밤베르크의 특산 맥주, 라우흐비어Rauchbier입니다.


독일어 라우흐Rauch는 연기smoke라는 뜻입니다. (라우헨rauchen은 담배를 피운다는 뜻도 됩니다.) 다들 아시겠지요? 라우흐비어Rauchbier는 연기를 쐰 맥주, 즉 훈제맥주입니다.


이 훈제맥주를 처음 드신 분들은 대부분 얼굴을 찌푸리지만, 옛날에는 모든 맥주가 다 이랬습니다. 맥주를 만들기 위해 보리를 맥아화하는 과정에서 보리를 말리는(혹은 볶는)kilning 단계가 있습니다. 중동에서는 햇볕에 말리기도 했다지만, 옛날 서유럽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무장작으로 피운 불에 볶다 보면 보리가 연기를 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이 냄새가 싫다면 조금 줄일 수는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17세기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근본적인 해결책은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보리가 타지 않게 간접적으로 볶는indirect kilning 기술이 1600년대 개발되어 1800년대 유럽 대륙에 본격적으로 퍼진 것입니다. 맥주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대변혁이 (관련글: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드디어 맥주에서 그 지겨운 연기 냄새를 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때, '난 이거 좋은데?' 라며 꿋꿋이 보리를 태우는 사람이 밤베르크에 있었습니다. 훈제 맥주가 밤베르크에서 발달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훈제 맥주를 계속 만들던 사람이 밤베르크 사람이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밤베르크에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그 중 제일 성공한 것은 아무래도 밤베르크 사람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밤베르크의 애흐트 슈렝케를라Aecht Schlenkerla 양조장에서 1405년부터 지금까지 보리를 태워 왔습니다.



보리를 볶을 때 연기를 쐬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맥주 양조의 다른 부분은 얼마든지 다른 맥주들처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밤베르크는 바이에른 주에 속하기 때문에, 슈렝케를라 양조장에서도 훈제 맥아를 이용해 뮌헨의 대표 맥주인 메르첸, 바이젠, 그리고 복bock 스타일을 비롯한 몇몇 계절 맥주를 만듭니다.


물론 훈제 맥주의 맛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워낙 충격적이어서, 그 중에서 메르첸인지 바이젠인지는 둘째 문제입니다. 훈제 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맥주를 맛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꽤 드뭅니다. 훈제 연어 정도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소시지 농축액 정도는 상상하셔야 합니다.


호기심 때문인지 애호가가 정말 많은건지, 슈렝케를라의 훈제 맥주(주로 메르첸입니다)는 생맥주나 병맥주로 국내에서 접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꽤나 꼬이는 동선을 무릅쓰고 밤베르크에 가시면 국내에서 볼 수 없는 다른 브랜드의 훈제 맥주도 좀 더 경험해 보실 수 있겠습니다.



3. 라이프치히Leipzig - 고제Gose


이 시리즈를 통틀어 구(舊) 동독 지역의 맥주는 처음입니다. 이 역시 우연은 아닐 겁니다. 공산주의 정부는 대체로 국민, 아니 인민들이 다양한 맥주를 만들어 마시는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꼭 처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베를린의 일부는 동독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역시 통일 전 동독 지역이었던 라이프치히의 특산 맥주, 고제gose는 베를리너 바이쎄와 많이 유사합니다(관련글: 세상의 모든 밀맥주). 둘 다 밀이 보리와 비슷하거나 더 많이 들어간 밀맥주이며, 젖산 발효를 통해 상한 듯한 시큼한 맛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스타일을 만드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피에르 셀리스의 벨기에식 밀맥주처럼 고수(코리앤더)가 들어간다는 정도는 애교로 봐 줍시다. 고제에는 세상 어느 다른 맥주에도 따로 넣지 않는 재료, 소금이 들어갑니다.


왜 고제에 소금이 들어가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고제는 라이프치히에서 조금 떨어진 고슬라Goslar라는 마을에서 1000여 년 전에 만들어졌고 1800년대 들어서 라이프치히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Monaco). 고슬라 마을에는 고제gose라는 강이 지나는데, 따라서 그 옛날 맥주를 만드는데 사용했을 이 강물에 염분이 있었다는 설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Bussard). 하지만 실제로 이 강물이 짜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자료가 있을 뿐입니다(Nacron).


어떻게 해서 소금이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소금이 고제를 아주 특별한 맥주로 만들고, 그 덕분에 1966년 동독에서 멸종되었던 고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번스타인). 1966년 이후로 아무도 만들지 않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던 고제는 로타르 골드한Lothar Goldhahn이 1986년, 라이프치히의 펍 오네 베뎅켄Ohne Bedenken ("의심의 여지 없이" 라는 뜻입니다) 을 인수하고 동베를린의 양조장에 고제를 위탁 생산하면서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들 맥주의 맛에 대해, 보리의 단 맛과 홉의 쓴 맛의 균형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전혀 새로운 맛인 신 맛이 추가된 맥주가 사우어 맥주라는 이름으로 독특한 맥주의 한 갈래로 주목받고 있는데, 여기에 짠 맛마저 추가된 맥주인 셈이니 그 맛이 좋든 싫든 대단한 호기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약간 억지를 부려서 향신료에 해당하는 코리앤더의 톡 쏘는spicy 맛까지 맛으로 인정해버리면, 그야말로 오미(五味)자차가 따로 없습니다.


이렇게 독특하고 유서 깊으며 존재감 있는 맥주가 멸종을 딛고 다시 일어난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특히 1800년대 라이프치히의 생활상을 곧이곧대로 담은 이 맥주가 멸종하게 된 과정에는 필스너의 대유행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독일의 분단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맥주는 잘못 마셨을 때 사회악이 되지만, 가끔은 문화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는 대한민국 공군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전글 바로가기
여는 글: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10월: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0월: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11월: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11월: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12월: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1월: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2월: 커피 대신 맥주로 스타벅스를 차려볼까

2월: 기네스의 질소충전포장: 맥주 거품의 과학

3월: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법에 구멍이 뚫렸다

4월: 세상의 모든 밀맥주

5월: 설탕으로 맥주를 덜 달게 하다

6월: IPA, 홉으로 맥주를 그리다

7월: 누가 내 맥주에 옥수수를 넣었을까

8월: 한국에는 없는 '진짜' 에일


참고문헌
Mosher, R. "Tasting Beer" 2/e, Storey.
Klemp, F. "Kölsch" http://allaboutbeer.com/article/kolsch-2/
https://en.wikipedia.org/wiki/Schlenkerla
https://www.schlenkerla.de
Monaco, E. "The Story of Gose, Germany's Salty Coriander Beer" https://www.eater.com/drinks/2015/10/30/9643780/gose-beer-germany
Bussard, J. "Salt: Giving Gose Big Flavor" http://allaboutbeer.com/article/gose-salt/
Nacron, "How Gose Got Salty" http://wilder-wald.com/2017/09/24/how-gose-got-salty/
번스타인 (2015) "맥주의 모든 것" 푸른숲
http://beertodaybeertomorrow.com/index.php/2017/06/23/the-history-of-gose/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에는 없는 '진짜' 에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