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아이, 어쩌면 나만 모르는 나의 비밀일지도..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제가 연재할 제 실제 이야기들입니다.
본 글은 오드아이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기 위해 쓰여진 글들 중 열여섯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
15화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짝눈? 네 맞아요!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콘텐츠 속 오드아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우리나라의 오드아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내 친구 민달팽이2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내 친구 민달팽이1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방어책과 직진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아, 맞다 내 눈!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의 연두색에게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를 알아주는 사람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글을 쓸래요, 난.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근데 그게 뭐라고?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안녕, 오드아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다른 눈으로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같음과 다름의 사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의 일부이자 전부 (brunch.co.kr)
내 눈의 다름을 내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오드아이가 가진 맹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울과 같이 내 모습이 반사되었을 때는 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있지만, 별도의 매개체 없이 내가 내 눈으로 내 눈의 다름을 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오드아이라는 것을 꽤 자주 잊고 지내곤 한다. 내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그러다 엘리베이터 거울과 같이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매개체가 눈 앞에 주어질 때, 그제서야 아 맞다 나 오드아이지, 생각한다. 혹은 셀카와 같이 내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하나의 이미지로 주어질 때, 내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오드아이 사람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내 오드아이는 무언갈 마주하지 않고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진실에 속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곤 한다. 혹은 나만 모르는 나의 비밀은 아닌지, 싶다. 별도의 매개체 도움 없이 내가 내 눈으로 오드아이인 나를 온전히 볼 수 없으니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양 쪽 눈 색이 다른 선천적 오드아이였고, 학창시절에 눈 색의 다름을 감추기 위해서 한 쪽 눈에만 검은색 렌즈를 착용했었다. 그로 인해 약간의 시력 차이는 있을지 언정, 처음부터 눈 색이 다르다고 해서 시력 차이가 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시력 차이와 같은 별도의 불편함이 없어서 더더욱 내 눈 색의 다름을 나 스스로 인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내가 오드아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산다. 그래서 일상에서 때때로 내가 오드아이라는 점에 나 스스로 흠칫 놀랄 때가 있다. 헉, 내 눈은 남들과 달리 양쪽 색이 다르구나, 하고. 그러나 그로 인한 내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이 없다, 단 타인의 시선을 빼고. 아무래도 사람 오드아이를 처음 접하면 궁금한 점이 많을 것이다. 상황을 바꿔서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궁금증을 투명하게 밖으로 꺼내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왔다. 흔한 질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외국인이시냐(아뇨, 모두 한국인이십니다), 시력 차이가 크냐(모두가 갖고 있는 미세한 시력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등.
그리고 매우 매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바로, 왜 렌즈를 한 쪽만 착용하냐, 이다. 이에 아니라고 대답을 하면, 보통 ‘아, 패션 때문에 한 쪽만 렌즈를 착용해서 오드아이를 연출한 줄 알았다’는 답변이나 ‘원래는 두 쪽 모두 렌즈를 착용했는데 한 쪽 렌즈가 빠진 줄 알았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사실, 오드아이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는 이 모두 자연스러운 감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 역시 오드아이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구나, 라는 작은 위축감을 마주하곤 한다. 나는 원래 그냥 이런 건데,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직도 완벽하게 적응되진 않는다. 비(非) 오드아이인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이 세상에서 나는 오드아이가 자연스러운 세상을 종종 상상해본다. “어머, 눈 색이 같아요? 신기하다”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름이 자연스러움으로 인지되는 SF문학을 애정한다. 정세랑, 김초엽, 천선란 작가 등 현재 현대 대중 문학에서 많은 지지층을 갖고 있는 SF 작가님들의 문학 세계를 따라가며, 내 다른 눈 색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되는, 그러니까 눈 색이 다른 것이 기본 설정(디폴트)인 세계를 기대해 보고 그려보게 된다.
천선란『어떤 물질의 사랑』나로 태어나 나를 사랑하기까지 (brunch.co.kr)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세계의 설정은 그렇지 않다. 내 눈의 다름을 시시각각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나와 같은 인간 오드아이는 흔한 종족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부정할 생각이 없다. 어린 시절은 이 오드아이로 인해 진득하게 힘든 시기였지만, 많은 상처들을 마주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게 되었고, 오드아이가 아닌 나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꽤 어색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나를 온전히 긍정하고 싶다. 내 눈으로 내 눈 색을 볼 수 없는 재미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의미로 풀어내야 할지를 즐거운 숙제로 받아 들인다. 흔한 비 오드아이 속에 오드아이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내 멋대로 생각해 보곤 한다. 아직 종교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있다면 나를 금방 찾아 내려고 내 눈 색을 다르게 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혹은 내가 일찌감치 다름을 품고 태어났기에 타인의 다름에 있어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태도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법을 배울 수 있던 건 아닌지 의미를 밝혀내곤 한다.
비록 내 눈동자 색깔의 오묘함을, 특히 빛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는 나의 왼쪽 눈 속 해바라기를 손등이나 손가락을 보듯 매번 확인할 순 없겠지만. 때문에 내가 오드아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마침과 동시에 또 한 번 잊어버릴 순 있겠지만. 그럼에도 ‘진짜 이야기는 긍정에서 시작된다’던 정한아 작가의 <달의 바다> 마지막 페이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대한민국의 오드아이 사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거다, 끝끝내 내가 나에게 더 닿을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