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옷차림, 생활과 집
큰 잎의 잣나무 그늘을 걷고 있었는데, 기숙사 정문에서 배달음식을 받던 학생의 아이보리색 경량 패딩이 눈에 띄었다. 실내 에어컨 때문인가 보다 생각했더니, 갑자기 주변 사람들의 옷차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운 날은 아니지만 습도가 높았고, 해가 났지만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도 얇은 긴팔 차림이지만, 도톰해 보이는 검정바탕에 물방울무늬 카디건을 입은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반바지, 반팔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밀짚모자에 고무장화를 신고 텃밭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고, 크롭티셔츠를 입은 학생도 있었다. 제복의 경찰관도 있고, 교복 입은 학생들도 있고, 헬멧과 보호장비를 갖춘 배달기사도 있었다. 저 멀리 중년 부부만 화려한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다. 모두들 제각각인, 각자의 환경에서 튀어 오른 듯 맞춰지는 것이 없었다.
날씨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저녁에는 차가운 바람이고, 아침에는 그래도 여름을 향해가는 온기를 가졌다. 비가 오지 않으면 습도가 높아져서 제습을 위해서 에어컨을 작동시키기도 한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사무실이나 카페, 대중교통에서 그렇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난방과 냉방, 그리고 가습과 제습을 오간다. 보통 서울의 우리는, 추위-난방-가습 / 더위-냉방-제습이다. 하지만 이런 일종의 간절기, 아니 그보다는 복잡기에는 밤에 한 번씩 바닥 난방을 하여 온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에어컨을 작동시켜 제습으로 쾌적한 공간을 만들고 보송보송한 이불을 덮는다. 이건 우리 집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그 해 우리가 몽골에 여행을 간 이유는 단순했다, 그때까지 집에 에어컨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이고 뉴스에서 이미 무더위를 예고했으며,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는 못살겠다를 외친 j는 '에어컨을 사자.'가 아닌(살 수도 없었다.) '북쪽의 제일 추운 동네로 여름휴가를 가자.'라는 결정을 내렸고, 블라디보스토크 보다 고도가 높아서 더 춥다는 울란바타르, 몽골에 가기로 한 것이다. 에어컨은 그다음 해에 일찌감치 샀다.
옷이라는 것이 사람들마다의 개성이 드러나고 본래부터 환경에 대응하고 있었지만, 요즘같이 기능이 발전된 건 또 없었을 것 같고, 새로운 소재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소재들은 용도를 넘나들며 기능에 충실한다. 과일 상자에 적힌 타이벡 감귤이라는 것을 보고는, 이 것이 내가 아는 그 타이벡인가라는 혼란에 빠지기도 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어 박사님이 만든 텍스 같은 것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참, 지난겨울에 산 r의 패딩에는 내부의 습도 조절을 위한 그야말로 환기구가 두 곳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울 등산 고수들의 겹쳐 입기 같은 기술영역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는데, 그건 일종의 공간 없는, 이동가능한 밀착된 집이었다. 속건성 내부마감-단열재-투습, 방수재-공간-외피 그리고 여밈과 환기구.
몽골에서 차를 달리다가 이사 트럭을 본 적이 있다. 이 이사는 집을 포함한다, 장소로의 이동이다. 큰 트럭 가득히 집과 짐을 실어 움직이고 있었다. 게르의 나무 골조와 양털솜 단열재, 그리고 흰 막, 난로와 나무 침대 그리고 양털 이불들. 집의 이동이다.
예전에는 같은 계절, 날씨의 구간에서 비슷한 구석이 있었는데, 요즘은 정말 다양한 차림이고, 그런 것들이 포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럴 수 있다.'가 되었다. 날씨와 기술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외부환경과 실내환경이 각각 고려된다.
집은 어떨까,
또한 부엌은.
얼마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도쿄의 부엌"이라는 책을 보았다. 책의 제목과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보게 된 것인데, 저자는 도쿄의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부엌의 사진을 찍고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기록하였다. 생활하는 부엌의 모습들을 한데 모아놓고 나니, 그 집에는 누가 어떻게 살고 있다가 정리되었다. 마감 재료, 수납, 주방가전 등이 포함된 시스템 주방의 모습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부엌이 작던 크던 그곳에 머무르는 순간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드러났다. 저자 '오다이라 가즈에'가 시작 부분에 얘기한 '수다스러운 부엌'이다. 매일 사용하는 그릇과 관심사에 따른 도구들, 넓히고 걸고 칠한 수선의 흔적들. 자주 쓰는 양념들, 시간들. 그건 내가 원하는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변형이었고 그 집 생활의 매뉴얼이 된 구축이었다. 그 시간은 '매일 세번씩 일어나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적극 그 공간에 개입했고 그건 그 집에 꼭 맞는 변동부 설계였다. 그야말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로서 집 쓰는 모습을 엿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르 꼬르뷔지에의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작업
김칫독은 김치 냉장고가 되어 실내로 들어왔지만, 야채를 다듬고 배추를 절이던 마당과 마루는 들어오지 못했다. 물을 쓰는 외부의 서비스 공간은 특정기능, 세탁관련, 실외기, 면적조건 등에 의해 최적화되고, 많은 것이 아늑함에 할애되었다. 도시 생활에의 맞춤일까 아니면 집 기능의 축소일까? 작업기능의 공간을 얻기 어려웠고, 요즘 이 공간들은 다듬어진 제품들로 나타나거나, 공유주방, 공방 등의 공간로 동네에 나타나기도 한다. 카페도, 작은 나눔텃밭도 이곳에 넣는 것이 좋겠다.
나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을 보고는 자란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점점 변해가는 부엌을 지켜보았다. 부엌의 시스템주방은 종종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는 오히려 20대 때, 내 부엌이 없던 시절에 일로써 다양하게 디자인된 주방의 매장에 방문하기도 했었다. 멋진 마감재와 단순한 디테일, 편리하게 짜인 수납, 성능 좋은 일체형의 가전, 수전의 디자인들... 매우 멋졌다. (이 멋짐 들은 일단 이렇게 두자,)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얘기는 그 부엌을 이용하는 것, 다시 나의 몫으로 남겨진 나의 공간이니까. 그 곳은 나와 가족과 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편안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일종의 '에이징된' 시간과 함께 성숙하며 조율된 모습이니까.
지금 이 글은 그 후의 얘기들이다.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부엌을, 집을. 그렇지만, 그러기에 필요한 전제는 좋은 평면을 가진 집이다, 창을 통해 보는 것이 무엇인가. 설계가 잘 된 집인 것이다, 설계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어떤 집에 살고 그 집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몫은 다시 집주인에게 돌아간다.
집 생활, 집 요리의 시간이 많아진 시기이다. 딱 그 사이에 나는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들을 적어 올리고 살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이전보다 강력하게 우리 집 식탁의 모습을 만들게 한 것 같다. 나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서울의 부엌'은 어떤 모습일까.
부엌 , 작은집 글 모음
부엌 공간에 대하여
부엌 너와 나의
부엌 공간과 친해지는 법
부엌 과일가게와 장식
부엌 가까이 혹은 멀리
부엌 불과 공간
부엌 쾌적함에 대하여
부엌 엉뚱한 물건들
부엌 집 사용법
그리고 카페
카페 커피, 에스프레소
카페 쵸코, r의 초코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