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 해 극장에서 관람한 개봉작 들 중 가장 좋았던 12편.
2019년을 시작하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2018년 동안 극장에서 보았던 개봉작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12편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대략적으로 1위부터 3위 정도까지는 어렵지 않게 순위를 정할 수 있었는데 그 아래 작품들은 한참을 고민했네요. 작년 극장 정식 개봉작만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재개봉한 작품이나 영화제에서 본 작품, 특별전 혹은 기획전으로 관람한 작품들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장률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아리 애스터의 ‘유전’ 등이 정말 아쉽게도 빠지게 되었네요.
사실 이 리스트는 제가 이전에 올렸던 상반기 / 하반기 BEST 10과 거의 겹칩니다. 총 20편의 영화 중에서 미개봉작들을 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다행히 12편 모두에 대해서 긴 리뷰를 쓴 적이 있으니,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링크를 타고 들어가 각 영화의 리뷰를 보셔도 좋겠네요.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전혀 없지만, 각 영화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우글우글합니다.) 그럼, 12위부터 역순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을 노래할 줄 아는 애니메이션.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매개하는 이 영화는 이야기를 관통하는 물질(사진)과 관념(기억) 사이의 활용이 탁월하고, 두 세계를 오가기 위해 필요한 소재들(꽃잎과 신발) 사이의 관계가 인상적이다. ‘코코’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삶이 끝났을 때가 아니라 모두에게 잊혀졌을 때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집단적인 성질로 정의하는 ‘코코’는 픽사 스튜디오의 가장 간절한 위령제다. 그 위령제에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그건 신발로 꽃잎을 딛는 행위와 사진에 기억을 싣는 행위일 것이다. 오랜 부진을 딛고, 애니메이션 명가 픽사 스튜디오는 이렇게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또 한 편 세상에 내놓았다. (Coco, 2017)
과시적인 촬영 테크닉과 직설적인 종교적 상징에도 불구하고, 코르넬 문드럭초의 신작 ‘주피터스 문’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에두르지 않고 강력하게 밀어붙일 줄 아는 압도적인 영화적 에너지가 있다. (목성의 위성('에우로파')를 제목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특정한 인종('아리안')으로 설정했다는 데서 드러나듯) 이 영화는 유럽 세계가 직면한 난민 문제를 지극히 장르적으로 다룬다. 일종의 초능력을 얻게 된 아리안(좀버 예거)과 그의 주위를 맴도는 가보(메랍 니니트쩨) 사이에서 환기되는 수직적 관계가 인상적이고, 초월적 존재로서 아리안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오는 난민(피지배층)과 구호자(지배층) 사이 지위의 역전 역시 흥미롭다. ‘주피터스 문’은 서사의 단점들을 초월하는 담론을 담고 있다. (Jupiter Holdja, 2017)
→ [리뷰] 그 아이는 눈을 가리고 있었다, ‘주피터스 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는 마치 다양한 변인을 통제한 채 인물들을 던져놓은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전작 ‘더 랍스터’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감정사회학 실험실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신작 ‘킬링 디어’는 복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윤리사회학 실험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통제된 울타리 속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철저히 개인일 뿐이라는 데에서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는 지독히 염세적인 무력감으로 싸늘하다. 그리고 ‘킬링 디어’에 담긴 인간의 본성과 신화의 물성에 대한 스산한 성찰은 닮음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닮음의 비극을 바꿀 수 있는, 혹은 끝낼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킬링 디어’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자신의 세계를 단단히 여며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한다.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전작 ‘포스 마쥬어: 화이트 배케이션’보다도 더 널리 뻗어나간 루벤 외스틀룬드의 신작 ‘더 스퀘어’는 발칙하리만큼 흥미롭다. 백인 기득권의 시선에서 백인을 풍자하고, 예술 종사자의 발상으로 예술을 풍자하며, 위선적 군상의 입장에서 위선을 풍자하는 ‘더 스퀘어’는 결국 예술과 도덕 그리고 영화라는 추상에 대한 영화다. 영화 안팎으로 환기되는 (동명의) 설치미술 ‘더 스퀘어’와 영화예술 ‘더 스퀘어’를 자가당착의 모순 속에 밀어넣음으로써 얻어지는 이 영화의 신묘한 화법은, 풍자라는 요소를 유희에 가깝게 활용하고 있는 루벤 외스틀룬드의 거대한 놀이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위선이라는 역설이 놓여있다. 자기모순적 정언으로 가득한 수작. (The Square, 2017)
마치 필름자욱처럼 '남김'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작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아네트 베닝)의 삶 중 마지막 부분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현실적인) 현재와 (영화적인) 과거를 매듭지으려 노력한다는 점에서도 필름에 대한 헌사로 켜켜이 쌓아낸 영화. 피터 터너(제이미 벨)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인물에 대한 존중을 표할 줄 아는 영화. 인물에 스며든 아네트 베닝과 제이미 벨의 뛰어난 호연으로 빛나는 영화. 형식적으로는 과거에 천착하면서도, 황금기를 반추하는 대신 황혼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맞이할 줄 아는 영화. '필름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라는 원제처럼, 이건 스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회자될 이야기가 된다. 섬세한 결과 아련한 향을 지닌 정통 멜로.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 2017)
→ [리뷰] 필름 시대의 사랑에 대한 헌사, ‘필름스타 인 리버풀’
영화 속에 관능적인 순간을 녹여낼 줄 아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실력은 그의 신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현재의 사랑을 간절하게 끌어내려는 당김의 멜로다. 편광 효과 혹은 필름 자국을 삽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삶에 평생 동안 반복적으로 투사될 사랑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결국 수동적으로 결합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습적인 관계를 능동적으로 뒤섞음으로써 이미 규정된 세상의 질서에 조용하게 항거하는 일이다. 결국,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행위를 통해 반짝였던 그 여름의 사랑을 영사(映射)하려 한다. (Call Me by Your Name, 2017)
→ [리뷰] 그 여름의 사랑을 영사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린 램지의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두 가지 시간대를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라는 인물의 도식은 적확하게 겹쳐진다. 극중 현재에 불현듯 난입하는 과거 속에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인물은 조(호아킨 피닉스)이다. 환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그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사건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지만, 결국 그의 존재를 구원해주는 것은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이 영화는 ‘여기’라는 직시적 표현에 드러나는 불특정한 장소에 대해 ‘너’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구원하려 한다. 린 램지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통해 수가 많지 않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획을 그었다. (You Were Never Really Here, 2017)
→ [리뷰]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오는 구원, ‘너는 여기에 없었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세계의 한 정점이다. 불완전한 이들이 이루는 가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을 통해서 그는 본질적 관계와 (일본이라는) 특수한 사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이번에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은 ‘도둑질하는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라는 특성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혈연이 아닌 관계로 묶인 6인의 모습을 처음부터 하나의 덩어리처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며, 도둑질이라는 소재는 물론 그가 만들었던 여느 영화보다도 직설적인 묘사를 통해 일본 사회의 뒷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감없이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느 가족’은 ‘환상의 빛’으로 데뷔한 이래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천착해 왔던 가족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고찰과 상념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万引き家族, 2018)
→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영화의 정수(精髓), ‘어느 가족’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공동작업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삶의 풍경화를 액자에 넣어 품은 것만 같은 소중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하며 살아가는 얼굴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혹은 촬영의 주체를 중심으로 보면 로드무비의 플롯을 지니는 이 영화는 카메라 밖의 관찰자로 초점을 옮겨가는 메타영화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벽에 붙이는 행위는, 그 자체로 흔적 혹은 순간을 마치 벽화처럼 아로새기는 행위를 통해서 세대, 성별, 나아가 개인의 다름을 표용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는 관찰자의 시선과 카메라의 순간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구성되는지에 달려있다 할 수 있다. 여기, 현실을 재구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하나가 있다. (Visages Villages, 2017)
→ [리뷰] 안긴 사진과 안은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미국의 근현대사를 파헤치던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극의 배경을 영국 런던으로 옮겨 만든 신작 ‘팬텀 스레드’에는 시공간을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오묘한 신비로움, 그리고 시공간을 기워내는 바느질과도 같은 우아한 매끄러움이 공존한다. 당연히, 이 영화는 레이놀즈(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알마(비키 크리엡스) 사이의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건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지의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손에 완전히 넣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 영화 속의 애증에 서린 기이한 독성은 결국 영화 속 ‘유령’의 유일성과 정당성이 부정당할 때 비로소 퍼져나간다. 대체 이런 기이한 멜로영화를 폴 토마스 앤더슨 말고 누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Phantom Thread, 2017)
→ [리뷰] 유령의 흔적과 애증의 독성, ‘팬텀 스레드’
기괴하고 아름답다. 혹은 지극히 기예르모 델 토로스럽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는 델 토로가 천착하고 있는 크리처물에의 애정과 미소 냉전 시기의 역사가 멜로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된다. 이때 그의 작품들이 훌륭한 것은 영화라는 형식적 틀을 빌어 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환상을 펼쳐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근원’으로서의 물이 이야기 속의 다른 요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이며, 그래서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농인인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그녀의 시점으로 치환해 보아야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토록 기괴하게, 허나 이토록 아름답게, 담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환상을 담아낸다. 물 속에서, 사랑을 담아, 영화를 통해. (The Shape of Water, 2017)
→ [리뷰] 물로 빚어낸 환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알폰소 쿠아론의 최고작. 그가 직접 밝혔듯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게 바치는 자전적인 영화 ‘로마’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공적이고, 지극히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지만 더할 나위 없이 보편적인 모두의 이야기다. 생명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다.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시네마스코프 비율 속 완벽하게 짜여진 모든 프레임의 안과 밖은 서로 시청각적으로 조응하고, 마치 서로 공명하는 듯한 쇼트와 쇼트 그리고 시퀀스와 시퀀스는 러닝타임 내내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마치 거울의 상 같은 ‘로마’의 황홀한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한 ‘로마’의 모든 순간들을 나는 마음 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다. (Roma, 2018)
네, 올해 최고의 영화 세 편은 '팬텀 스레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그리고 '로마'입니다. 세 편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점에 도달한 걸작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폴 토마스 앤더슨, 기예르모 델 토로 그리고 알폰소 쿠아론 세 감독 모두 제가 원체 좋아하는 감독들이라서, 이렇게나 훌륭한 걸작들을 그들의 신작으로 만나게 되니 감흥이 남다르네요. 지난 한 해도 좋은 영화가 많아서 참 행복했습니다. 올해에도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조금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