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와 경제를 배우는 수요일
지난 글에 이어 <도시의 승리> 서문에서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글로 씁니다.
다음 글은 언젠가 페북에서 읽은 글을 떠올립니다.
도시의 빈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점도 많이 든다. 도시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즉 도시는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로테르담으로 몰려드는 현상은 도시가 가진 약점이 아닌 강점이다.
<중국의 디지털화는 불안정노동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라는 제목의 글인데요.
페벗님의 인간적인 이야기에 눈길이 갑니다.
하루 15시간, 2개월 연속노동에 단 하루만 쉬는 그들의 노동강도의 비참함에 내가 말문이 막혀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했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팩트풀니스> 저자의 진정성 있는 주장을 고려해 보면, 우리나라의 구로 공단도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단이 아니라 디지털단지가 된 것처럼 광저우도 변모할 것입니다. <진정한 도시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에서 '산업화라는 보편적 혁신: 가난으로부터 번영으로'를 읽고 쓸 때 깨달은 내용입니다. 또한, 비참한 노동강도 문제는 디지털화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건당 임금(piece rate)을 목표로 하는 유연노동자는 노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점이 문제일 수 있을 듯합니다.
국지적으로 보면 도농공의 문제지만, 넓게 보면 빈부 격차를 줄이는 대가로 지방이 소멸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나은 무엇을 찾기 위해서 뉴욕과 상파울루, 뭄바이로 몰려온다. 이것은 축하받아야 할 도시 생활의 한 가지 사실이다.
어쨌든 사람을 중심에 두면 저자와 같은 시각이 될 수 있습니다.
도시의 가난은 도시의 부가 아니라 시골의 부와 비교해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올바른 잣대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 저자는 생각의 힘을 지닌 사람인 듯합니다.
라우데자네이루에 있는 판자촌이 부유한 시카고의 교외 지역과 비교해 봤을 때는 끔찍해 보일지 몰라도 그곳의 빈곤은 브라질 동북쪽 시골의 그것에 비해서는 훨씬 낮다. 가난한 사람들이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지만 그들이 도시와 시골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다수는 분별 있게 도시를 선택한다.
<팩트풀니스>의 인상 깊은 내용과 지표로 보여준 좌표 평면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전에 메모했던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아메리카 1, 유럽 1, 아프리카 1, 아시아 4. 다른 모든 핀 코드처럼 이 핀 코드도 바뀔 것이다. 유엔은 21세기말이 되면 아메리카와 유럽 인구는 거의 변하지 않겠지만, 아프리카는 30억이 늘고 아시아는 10억이 늘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2100년이면 세계의 새로운 핀 코드는 1-1-4-5가 될 것이다. 세계 인구의 80% 이상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GapMinder를 떠올려 본 후에 다시 책으로 돌아가 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면서 도시는 역동적으로 변하지만, 가난의 집중화로 인한 비용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인접성은 아이디어와 상품 교환을 용이하게 해 주지만 박테리아나 소매치기의 전파 역시 훨씬 더 쉽게 만들어준다.
저자가 쓴 표현 중에 '가난의 집중화로 인한 비용'이란 매듭말이 눈에 띕니다. 어쩌면 앞서 인용한 <중국의 디지털화는 불안정노동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라는 페벗 님의 지적도 그중 하나로 볼 수 있을까요?
<팩트풀니스> 저자와 같은 주장입니다.
유럽과 미국 도시들이 이루어낸 도약은 21세기 개발도상국 도시들에서 재연될 소지가 높으면, 그로 인해서 세계는 더욱 도시화될 것이다.
물론 그는 '도시화'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지만, 그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시각화한 그래프를 보면 그러한 추세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포기말은 다른 생각을 내놓게 만듭니다.
도시는 우리가 같은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포기말 내용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도리어 저에게는 도시가 주는 기능보다 페이스북이 제공하는 기능이 훨씬 강력합니다. 페이스북은 도시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생각을 교류하게 해 주어서 '인접성'을 강화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되어줍니다. 일례로 페이스북이 없었더라면 (도시 생활을 하더라도) 최봉영 선생님과 묻따풀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슷하게 많은 다른 지인과의 저녁 식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 다발말(=단락)을 읽을 때는 <월말김어준>에서 박구용 교수님 강의를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시각선(sight line)이 조성될 수 있었던 중대한 이유는 파리에서는 뭔가를 지으려고 하면 보존을 우선시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축 건물 제한 때문에 과거 배고픈 예술가들을 환대한 것으로 유명했던 파리는 이제 부자들이나 살 수 있는 도시가 됐다.
저자는 경제학적 관점이 투영된 판단과 서술을 합니다. 반면에 박구용 교수님의 설명은 문화 상대주의적 해석이라 느껴집니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건축물과 도시 미관을 공공재 성격으로 본다고 합니다. 그건 지역민들과 그들의 역사를 관통한 합의 혹은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적 흥망성쇠로만 볼 수는 없는 문제죠. 하지만, 다음 표현을 보면 저자가 이를 모르지는 않는 듯합니다.
영국은 인도에도 높이에 대한 이런 반감을 수출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건물 신축 제한이 정당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동권을 주요 인권으로 여기거나 도보 이동을 장려하는 유럽 도시들과 자동차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 도시의 다른 양상을 바탕에 둔 내용도 있습니다.
운송 기술은 항상 도시의 형식을 결정해 왔다. 피렌체 중심부나 예루살렘 구시가지처럼 보행 도시(walking city)의 길들은 좁고 구불구불하며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걸어서 돌아다녀야 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 안팎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제공해 주는 수로들과 최대한 가깝게 다니려고 애썼다.
글로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저자는 확실히 경제학적 이점으로 사태를 판단한다 여겨집니다. 반면에 박구용 교수님 강의는 여행자 관점에서 도시의 매력을 주로 다룬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제 주관적 인상에 따른 것입니다.
아래 글을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제가 가 본 도시들의 기억을 더듬게 됩니다.
로스앤젤레스와 피닉스, 휴스턴의 상당한 지역이 그렇듯이 자동차를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들에는 거대하고 완만하게 구부러진 도로들만 있고 인도가 부족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장소들에는 매장과 보행자들이 도로가 아닌 쇼핑몰에 들어가 있다. 예전 도시들에는 일반적으로 이전에 건설된 항구나 기차역으로 표시되는 분명한 중심지가 있지만, 자동차 도시들은 그렇지 않다. 자동차 도시들은 그냥 아무런 구분 없이 쭉쭉 뻗은 도로들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시드니에 갔을 때, 유럽을 모방한 듯한 건물과 구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중에서는 철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앙역' 같은 것이 있어 유럽적 사고로 만들었구나 싶었는데, 이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육안으로 본 미국생활은 큰 차를 타고 다니고, 집들도 널찍널찍하다는 인상이었는데 그 바탕을 잘 설명해 줍니다.
속도와 공간은 자동차 위주의 생활이 갖는 두 가지 대표적 이점이다. <중략> 대량 생산된 자동차는 거주지의 인구밀도를 적절하게 만들어 평범한 미국인들이 세계적 기준에서 봤을 때는 엄청나게 호사스러운 생활양식을 유지하게 해 준다.
아직 남은 내용이 꽤 있어서 뒷부분은 다음 글로 넘깁니다.
(2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1. 디지털 마약 비유 때문에 살펴본 애플 비전 프로
23. <Tidy First?> 번역이 옵션 개념을 가르치다
29. 도시는 번영과 행복의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