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Oct 10. 2024

아장스망: 쪽인 나로 대상을 새로 차리기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아장스망'을 주제로 하는 두 번째 글입니다. 직선으로 묘사한 아래 그림에서 추가한 두 개의 점 이후에 쓰는 글입니다.

한편, <아장스망: 배치를 바꿔야 삶이 바뀐다>과 달리 제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는 글로서 비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논리적 모순에 대해서 지적해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다만, 정제되지 않은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님들은 취향이 아닐 수 있습니다.


쪽인 나로 대상을 새로 차리기: 아장스망

먼저 '아장스망'에 관련한 영상 두 편을 보고 느끼 점은 최봉영 선생님이 설명하신 한국말의 바탕과 굉장히 닮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느닷없지만 최봉영 선생님께 묻따풀을 제안하고 흔쾌히 받아주셨습니다. 가장 먼저 아장스망에 대해 선생님은 한국말로 하면 '차린다' 혹은 '차림새'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듣고 보니 '아하' 하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글을 쓰니, 아장스망에 대한 선생님 설명에 제가 살을 붙인 제목부터 붙여 보았습니다.


사실 저처럼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려면 '차리다'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2021년 11월의 글이 있습니다. 최봉영 선생님과 통화 직후에 쓴 글로 보이는데, 당시 '차리다'라는 말의 의미와 쓰임을 듣고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저도 글말과 입말로 '차리다'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써 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을 차리는 틀을 만들어보자>를 읽어 보니 '아장스망'과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유영만 교수님의 영상에 따르면 아장스망은 다른 차림새 속에 나를 놓아 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차리다' 보다는 '차려지게 하다'에 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쪽인 나로 일을 인식하는 과정 되돌아보기

그 차이에 대한 감각을 이해하려면 쪽인 나를 이해해야 합니다. <쪽인 나로 일을 인식하는 과정을 풀어 보기>를 다시 살펴봅니다. 누리에 우리가 존재하는 양상을 알아야 쪽인 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물(事物)이 事이면서 物이고, 物이면서 事인 이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존재는 시공간에서 지금 일어난 모습을 말합니다. 이러한 존재 인식을 질 들뢰즈는 '차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지금 여기 누리에 차려진 vs. 내 머릿속에 차려진

아장스망과 차리다의 차이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하려는 데에 최봉영 선생님이 주신 한국말의 바탕 논리식이 쓸모가 있네요. 사람이 무언가를 알아볼 때 밖에 자리한 것을 알아보고 내 지식과 경험 안에 자리한 것과 대응시킵니다. 대응이 잘 되려면 차려져 있어야 하죠. 이때의 차림은 생각의 차림이고, 각자의 머릿속의 일입니다.

출처: 최봉영

반면에 아장스망은 적어도 영상에서는 나의 바깥에 차려진 쪽과 쪽의 모습을 말할 때 쓰입니다. 반면에 최봉영 선생님은 말차림법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생각 속에 말이 잘 차려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인생길은 사연(事緣)을 만들어 가는 일

마치기 전에 지난 글에서 사태와 사건만 살펴보고 사연은 따져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연의 풀이를 찾았습니다. 인연 연(緣) 자가 친숙합니다.

생각해 보니 <사물과 사태는 인과 연의 일어남에 의한 것이다>라는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사연이라는 단어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연 속에서 학습을 한다는 질 들뢰즈의 말도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깨달은 듯합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점으로도 또 선으로도 대할 수 있는 일상>이라는 인식의 의미도 알게 된 듯합니다. 만들기라고 이름을 붙여도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이라는 연재를 시작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바로 <차리다에서 알고리듬으로 나아간 나의 기록>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일을 차리는 틀을 만들어보자>라는 글의 존재와 제목을 보며 이 모든 사연의 시작을 또 발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지식과 경험을 하나의 사연으로 엮는 시도를 도운 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신영복 선생님의 명언을 인용합니다.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8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81. 떨림과 울림, 어울리다 그리고 매력

82. 차림과 알아차림 그리고 헤아림과 어림

83. 정신이 팔리면 NPC처럼 휘둘리기도 한다

84. 사람이 마음 그릇의 울림판을 통해 함께 떨고 운다

85. 몸과 마음을 통해서 대상에 대한 느낌과 앎을 갖는다

86. 열린 우리주의(홍익인간)와 닫힌 우리주의(집단이기주의)

87.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밑바탕 마음에 대해서

88. 믿음에 바탕을 두고 꿈을 꾸거나 일을 꾀한다

89. 글 내용에서 내 경험과 공통점을 찾는 일은 대칭적인가?

90. 대칭과 대응의 흐릿한 경계를 묻고 따지다

91. '스스로 하는 나'에서 '위하는 나'로의 전환

92. 쪽인 나로 일을 인식하는 과정을 풀어 보기

93. 사물과 사태는 인과 연의 일어남에 의한 것이다

94. 줏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완벽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95. 그저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연민일까? 연민이란 무언가?

96. 사람이 무엇을 멋스럽게 느끼는 일의 차림새

97. 아장스망: 배치를 바꿔야 삶이 바뀐다

작가의 이전글 산업화라는 보편적 혁신: 가난으로부터 번영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