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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26. 2024

그저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연민일까? 연민이란 무언가?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감정의 발견> 읽기 모임 화상 회의 과정에서 연민에 대해 이야기 나눌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틱낫한 스님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을 읽지 않았다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단어가 연민입니다. 함께 책 읽기를 하는 한 동료는 '자기 연민'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어릴 적 생각에 눈물부터 나는 분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연민은 눈물을 흘리는 일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불명확하기 때문에 묻따풀 주제로 삼으려 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붙잡고 그 안을 깊이 살피기

우선 제 기록 속에서 '연민'을 찾아보겠습니다. 두 달 전쯤에 쓴 <이해와 연민 길러 내기>를 보면 바로 그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에서 인용한 다발말(=단락)에 연민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붙잡고 그 안을 깊이 살핍니다. 다음 그것을 연민으로 변용시키면,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찾은 겁니다. <중략> 마음챙김을 통해, 아프고 힘들었던 감정들이 아름다운 무엇으로 변용됩니다. 이해와 연민으로 만들어진 경이로운 치유 연고라 하면 어떨까요.

이제 막 연민을 배양 중인 터라 '경이로운 치유 연고'라는 말에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이블처럼 여겨서 세 번이나 읽은 <당신이 옳다>의 내용은 통째로 연민 실행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거기서 치유의 시작은 인정과 공감이라고 말하는데, 제가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어도 믿고 훈련하는 덕목입니다.

차선책으로 연민을 '자신의 고통을 붙잡고 그 안을 깊이 살피기'라고 해 볼까요? 지난 3월과 4월 사이 실제로 불안과 같은 고통을 겪을 때 다음 글들을 쓰며 스스로를 다스렸습니다.

감정과 행동 사이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일상에 마주하는 감정과 문제를 비슷하게 인식하는 법

불안이 알려준 비움과 채움의 경계

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일시적인 다스림이 아니라 다스리는 절차를 인지하기 위해 <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 연재를 만들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행복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편, 고통이라는 단어를 보니 최근에 쓴 <해석의 풍요로움 그리고 글로 만나는 현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고통을 연민으로 변용할 수 있다면 이미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교만을 다스릴 연민의 힘을 키우기

다시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을 인용합니다.

그 어떤 것도 반대 극 없이 존재할 수 없기에, 만일 교만의 씨앗을 갖고 있다면, 연민의 씨앗 또한 갖고 있습니다.

연민의 반대가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바로 떠오릅니다. 상대의 삶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채 몇 마디 말만 듣고 함부로 충조평판을 남발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유행병처럼 퍼져 있는 교만의 관행이라 하겠습니다. 지난밤 저는 동료에게 실수를 하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두고 '그럴 수 있다'라고 바라보는 일이 연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외에도 교만을 막는 역할도 하는군요.


그리고 지난달 <단단한 영어공부>에서 다음 포기말을 보며 느낀 개성의 포용도 연민의 의미 안에 넣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때 놓치게 되는 개별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페벗님의 글에서 발견한 '무던함'도 연민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저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식물을 키울 때 가장 필요한 건 무던함이 아닐까 싶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의 속도 속에 사는 생명체와 함께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북경에 있을 때, 급한 성격과 일터에서 습관이 된 태도를 극복하며 저는 '농부의 마음'이라는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그걸 그저 무던함으로 낱말로 대체할 수 있네요.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다음으로 근래 들어 두 편의 글을 쓸 때 나름의 연민에 대한 정의가 된 듯합니다.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생육이 되어 가는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는 연민의 힘

사전 정의와는 다를지 몰라도 제 삶에서 작동하는 연민입니다. 특히나 지난 7월 아침 루틴으로 추가한 후에 어제까지 44번 외우고 실천한 기도문에 '연민'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며 미소 짓네.
새로 받은 스물네 시간, 깊이 몰입하여 살리라 맹세하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연민의 눈으로 보리라 맹세하네.

아직은 평소 거들떠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효과가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페벗 님이 남긴 댓글 덕분에 알게 된 애니메이션에서 본 장면에서 마치 연민이 협업의 바탕이 되고 또, 연민의 바탕에서 배려심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본 듯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너무 주관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유의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연민과 가장 가까운 말은 인정이었습니다.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을 사용하여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연민일 수도 있을까요?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8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81. 떨림과 울림, 어울리다 그리고 매력

82. 차림과 알아차림 그리고 헤아림과 어림

83. 정신이 팔리면 NPC처럼 휘둘리기도 한다

84. 사람이 마음 그릇의 울림판을 통해 함께 떨고 운다

85. 몸과 마음을 통해서 대상에 대한 느낌과 앎을 갖는다

86. 열린 우리주의(홍익인간)와 닫힌 우리주의(집단이기주의)

87.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밑바탕 마음에 대해서

88. 믿음에 바탕을 두고 꿈을 꾸거나 일을 꾀한다

89. 글 내용에서 내 경험과 공통점을 찾는 일은 대칭적인가?

90. 대칭과 대응의 흐릿한 경계를 묻고 따지다

91. '스스로 하는 나'에서 '위하는 나'로의 전환

92. 쪽인 나로 일을 인식하는 과정을 풀어 보기

93. 사물과 사태는 인과 연의 일어남에 의한 것이다

94. 줏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완벽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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