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데이 파더스 클럽 (11)
“아빠, 꼭 가야 한다니까! 이번에는 진짜 꼭 휴가 내야 해! 약속해!”
아이가 봄방학을 맞았다. 2월은 졸업과 입학이 교차하는 묘한 시기다. 학년을 마쳤으되, 새로운 학년은 시작되지 않은 미완의 시간.
저학년도 고학년도 아닌 이 미생의 시간을 심심하게 보내고 있던 아이는 갑자기 사촌 동생과 롯데월드에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사전에 저들끼리 무슨 교감이 있었다.) 아빠가 사장님도 아니고 예고도 없이 휴가를 어떻게 갑자기 내느냐 아들에게 통사정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개학 전에 하루 휴가를 내고 아이들과 롯데월드에 가기로 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을 리 없다.
첫째와 둘째 모두 롯데월드가 처음이었다. 인파 많은 곳은 원체 질색인 부모를 둔 덕분에 아이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롯데월드에 가본 적이 없었다. 놀이공원으로 범위를 넓혀도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몇 해 전 서울랜드에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였다. 한 해만 지나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하는 아이들의 시간관념 속에서 몇 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전생과도 같은 느낌이리라. 롯데월드로 향하는 와중에 예전에 서울랜드 갔던 것 기억나느냐고 물어봤더니 아이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래, 아빠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생각해보니 나도 롯데월드를 찾는 게 실로 수십 년만이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느릿느릿 강변북로를 지나다 보니 예전 어릴 때 기억이 줄줄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롯데월드를 보려고 단체로 우르르 버스에 오를 때의 설레던 마음이 기억난다. 처음 봤을 때 ‘우와 세상에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그전에 갔던 놀이공원은 으레 야외에 있었는데, 유리 천장이 덮인 실내에 롤러코스터와 후룸라이드, 바이킹 같은 탈것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롯데월드에서 하루 신 나게 놀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샀던 로티 마술봉이 아직 기억나는 걸 보면, 30년 전 국민학생에게 롯데월드는 그야말로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가 맞았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아이들과 함께 롯데월드에 입장하면서 슬며시 올라오던 불안감은, 도착한 순간 현실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살아오면서 이래저래 다른 경험들을 쌓아 올린 40대 아저씨에게 2023년의 롯데월드가 30여 년 전 만큼의 감흥을 줄 수는 없다. 예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돌고 있지만, 어딘가 세월의 흔적을 지우기 어려운 회전목마와 후룸라이드, 신밧드와 매직아일랜드는 세월이 훌쩍 지난 후 다시 모교를 찾았을 때의 기억만큼이나 애잔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아이들은 달랐다. 나와는 달리 아이들의 눈에 롯데월드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곳으로 비치는 것 같았다. 회전목마 하나를 타려고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도, 아이들은 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츄러스와 팝콘과 다른 주전부리를 먹으면서 서로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 놀이기구를 타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시간은 없다는 것처럼 ‘까르르 까르르’ 웃어주었다.
문제는, 나는 거기서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있는지 알아보고, 행여나 중간에 배고프고 목마를까 버터구이 옥수수와 음료수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다 보니 정작 나는 계속 쉴새없이 피곤해지고 있었다.
“아빠, 근데 아빠는 재미없어?”
매직아일랜드로 향하던 중이었을까, 정신이 번쩍 든 건 옆에 손잡고 가던 아이가 한마디 했을 때였다. 첫째가 보기에도 아빠 얼굴이 영 별로였나 보다. 무심결에 피곤해 보이는, 심드렁한 표정이 읽혔던 걸까. 아차 싶었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같이 온 아빠가 재미없어 보이면 온전히 즐겁게, 신나게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장 어려운 순간 중 하나는 아이의 눈높이로 마음을 다해 놀아주는 것이다. 사실, 바이킹을, 후룸라이드를, 자이로드롭을 탔을 때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다 아는 입장에서는 아이들과 같은 즐거움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미 결말을 알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드라마를 봐야 하는 상황이랄까. 비단 놀이공원에서만 그러할까. 솔직히 함께 보드게임을 할 때도, 포켓몬을 잡을 때도, (이미 본) 애니메이션을 또 볼 때도 비슷한 감정을 마주할 때가 많다. 별수 없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의 마음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귀신같이 안다. ‘아 이거 아빠가 별로 재미없어하는구나’, ‘아빠가 마지못해 대충 놀아주고 있구나’ 마음을 읽으면 아이들도 그 순간 태도가 거짓말처럼 바뀐다. 반대로 게임도 놀이도, 축구도 테니스도, 내가 어느 순간 진심을 담아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하고 있음이 전해지면 아이도 함께 신이 난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내게도 전해진다. 이심전심이라는 게 괜한 말이 아닌 거다.
아이들과 함께 놀기(?) 시작한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로 돌아가는 게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첫째는 한 살 터울의 사촌동생과 노는 걸 가장 좋아하고, 둘째도 한살 터울의 사촌 언니랑 노는 걸 가장 좋아한다. 사촌들은 아빠처럼 대충이 아니니까. 진심을 담아 포켓몬 카드를 뽑고, 온 마음으로 인형놀이 소꿉놀이를 하니까.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초등학생이, 유치원생이 되고 싶다. 머릿속에 수북이 쌓여있는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잊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는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그래서 놀이기구를 탈 때도 아이들과 같은 행복감을, 충만감을 느끼고 싶다. 문방구 앞에서 천 원짜리 뽑기를 할 때도 같은 마음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싶다.
어른이 되어 동심(童心)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바란다면, 부모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렇게 매 순간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까.
긴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돌아왔더니 첫째가 또 가고 싶단다. 이번에는 무서워서 못 탔지만, 좀 더 커서는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단다. 인파 많은 건 여전히 질색이지만, 그나마 같이 타자고 잡아끌 때 최대한 열심히 타보려 한다. 모험과 환상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뛰는 아이의 마음을 장착한 채로.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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