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데이 파더스 클럽 (12)
1.
길을 걷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벚꽃비가 떨어진다. 낮에는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로 바람이 제법 따뜻해졌다. 봄이다. 만물이 생동한다는 계절.
“아빠, 캠핑 가자! 캠핑 가서 불도 피우고 하자!”
“캠핑? 은이 봄바람이 들었나 보네? 그래 아빠도 좋아. 가자! 근데 당장 캠핑을 갈 수는 없으니 공원 산책은 어때?”
이렇게 날이 좋은데 집에만 있을 수 없지. 둘째도 겨우내 집에만 있다가 밖에 나간다니 제법 신이 난 모양이다. 이참에 주말에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아주는 아빠가 되어볼까?
공원에 나갈 채비를 하는데 첫째가 옷도 안 갈아입고 부동자세다.
“나는 싫은데?”
“아니 밖에 나가서 같이 바람 쐬면 좋잖아.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도 괜찮은데?”
“귀찮아. 집이 제일 좋아. 주말엔 좀 쉬자. (나 평일에 피곤했는데 주말에 아빠랑도 놀아줘야 해?)”
“...”
첫째와 둘째 의견이 다르면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한 건 매번 부모다. 결국 첫째 설득에 실패하고 둘째만 데리고 집을 나섰다. 흥, 은아 우리 오빠가 나중에 듣고 엄청나게 부러워할 정도로 재밌게 놀자! (부드득)
둘째 손을 잡고 월드컵공원에 갔다. 사람들 생각이 다 똑같은 건지 이미 꽤 많은 이들로 공원은 붐볐다. 돗자리를 펴놓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깔 수다를 떠는 사람들, 탄성을 지르며 벚꽃 목련꽃 진달래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 선글라스를 낀 채 텐트 앞 의자에 늘어져서 망중한을 보내는 사람들. 모두 봄을 맞아 한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사람 구경을 하며 걷다 공원 놀이터에 닿았다. 아파트 놀이터와 비교하면 꽤 큰 모험놀이터다. 미끄럼틀 길이도 두 배는 되고, 집라인과 암벽등반 코스도 있다. 놀이공원에 비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놀기에는 썩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놀이터가 아이들로 빽빽하다. 놀이터만 보면 저출생 시대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놀이터에서 둘째와 신나게 놀았다. 집라인도 타고, 클라이밍도 했다. 집라인은 가벼운 아이 혼자 타기엔 속도가 안 나서 어른이 힘껏 끌어줘야 했다. 그네보다 훨씬 스릴 있다고 하는 고객님(?) 덕분에 몇 번이고 모래밭을 전력 질주해야 했지만, 나도 즐거웠다. 클라이밍 코스는 어른 키 높이 정도의 인공암벽이 옆으로 쭉 이어져 있는 형태였는데, 부드러운 소재였지만 그래도 일곱 살 아이가 혼자 움직이기에는 아직은 살짝 위험해 보였다. 행여나 헛디딜까 봐 아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다음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해할 때면 이쪽으로 디디라고 코칭을 해줬다. (두 번째 시도부터는 자기도 아빠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불평을 하긴 했지만.)
집라인과 클라이밍과 미끄럼틀을 바쁘게 오가다 보니 금세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이와 공원 매점에 가서 소떡소떡과 오뎅으로 간단히 요기했다. 딸과 같이 매점 앞 평상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가며 웃다가, 입가에 머리카락에 묻은 소스 닦아주며 흐르는 시간이 자못 평온했다. ‘우리 딸 많이 컸다. 분유 타고 기저귀 갈던 게 엊그젠데, 이제 엄마 오빠 없이 둘이서 데이트도 하고…’ 이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2.
놀이터에서 나와 조금 걸으니 한강이었다. 달리기 하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 섞여 쉬엄쉬엄 강가를 걸어 내려가다 보니 홍제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합류 수역에 닿았다. 요즘 비가 안 와서 물이 별로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다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개천과 강이 만나는 어귀에 어른 팔뚝만 한 잉어들이 가득했다. 양어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수십, 수백 마리의 검푸른 잉어들이 바글바글 한데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강 수질이 너무 안 좋아져서 그런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라 하염없이 잉어 떼들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르신께서 별일 아니라는 듯 설명을 해주신다.
“잉어들이 많죠? 요즘 잉어들 산란기라 그래요. 한강에 잉어들이 많이 사는데, 한강에서 알을 낳으면 오리나 다른 새떼 같은 천적들이 많아서 새끼들이 위험하거든. 그래서 개천 상류로 올라가서 알을 낳으려고 하는 거에요. 거긴 좀 더 안전하니까. 근데 저기 둑 보이죠? 콘크리트 둑이 개천을 막고 있으니 잉어들이 그 위로 쉽게 못 올라가. 그런데 한강도 밀물이랑 썰물이 있어서, 물때가 차면 잉어들이 올라갈 수 있어요. 하루에 두 번. 이것들이 그걸 다 알고 저 둑 아래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밀물 돼서 수위가 높아지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 잉어들은 수온이 20도로 상승하는 5월 전후에 산란하며, 물가에 잡초가 우거진 곳에 알을 낳는다. 한강이 직선화되며 알을 붙일 수초 등이 줄어들자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위키백과 참조)
그런데 갑자기 ‘퍼덕’하는 소리를 내며 몇몇 잉어들이 물 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날이 가물어 햇볕에 바싹 마른 새하얀 콘크리트 위로 잉어들이 몇 번이고 튀어 올랐다가, 바로 콘크리트에 부딪히곤 다시 강물 속으로 꼬르륵 잠겨 내려갔다.
조금이나마 더 안전한 곳을 찾아가려는 산란기 잉어들의 몸부림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그게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을 따라 필사적으로 펄떡이고 있는 저 잉어들이나, 정신없이 회사 집 회사 집 하며 아이들 키우고 있는 우리나 뭐 다른 게 있을까. 그런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지금 저렇게 무리해서 올라가려 하다 보면 알은 물론이고 상류까지 가기 전에 제 몸도 같이 상할 것 같은데.
3.
집에 돌아오니 첫째가 툭 하고 말을 건넨다.
“아빠, 배드민턴 하고 올게.”
“(그러니까 나랑은 안친다는 얘기지?) 누구랑?”
“어, 친구들.”
시크하게 답하고 나간 아들이 누구랑 같이 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슬쩍 따라나가 보니 근처 배드민턴장에서 동네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정신없이 승부를 겨루고 있다. 보아하니 벤치에 앉은 아빠는 이미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맞은편 네트에 있는 친구와의 경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는 이제 또래들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부모와 노는 것도 가끔이야 재미있(다고 믿고 싶)지만, 이제는 척하면 탁하고 통하는 친구들과의 세상을 점점 더 편해하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편의점에 우르르 몰려가 라면도 나눠 먹고, 같이 땀 흘리며 운동하며 승부도 겨루고, 가끔은 게임 속에서 만나 서로 키득거리며 친구들 사이의 유대감을 만들어가고 있다. 늘 아들에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던 아빠로서, 그 광경을 보는 마음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사뭇 복잡하다. 지금까지는 무얼 하나라도 더 해줄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무얼 덜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해야 하는 때가 온 걸까.
“아빠 먼저 집에 들어갈게. 조심히 치고 와.”
한 시간 넘게 배드민턴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아들과 아들 친구들에게 이온음료 한 병씩을 쥐여주고는 먼저 집에 돌아왔다. 첫째는 창밖이 어둑해진 뒤에야 땀에 푹 젖어 들어왔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첫째에게는 조금 덜, 그리고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은 뒤에서 이것저것 챙겨줘야 할 둘째에게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매일, 매 순간 교차하고 있다. 각자의 성장단계에 맞춰 언제 힘을 보태줘야 할지, 언제 힘을 스윽 빼야 할지 부모로서 잘 가늠하고 둘을 대해줘야 할 텐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비슷한 고민이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 터울 차이 때문에 늘 크고 작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변화는 또 처음 맞닥뜨리는지라, 아이들에게 적정한 개입은 과연 어디까지가 맞는 것일지 부모로서 앞으로 점점 고민이 커질 것만 같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잉어를 떠올렸다.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다. 멀리서 보면 육아의 본질도 봄철 잉어의 퍼덕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때를 잘 알아보고 현명하게 움직이는 잉어들과 같은 마음으로, 양육자로서 들고 날 때를 잘 맞춰야 하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에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면, 드라마 ‘더글로리’ 속 부모들 같은 일그러진 모습이 긴 육아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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