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이 길을 잃을 때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8)

by 김정은 변호사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제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을,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글로 다시 풀어보려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변호사마다 일하면서 느끼는 재미나 보람이 다르겠지만,

나는 서면을 쓰는 시간이 가장 좋다.
소장, 준비서면, 변론요지서, 의견서…
사건을 정리하고 법리를 구성하고,

조용한 설득을 문장으로 쌓아나가는 과정이 나와 잘 맞는다고 느낀다.

재판은 결국 글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재판은, 재판정에서의 말보다,

재판부를 설득하는 글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변호사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글을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이다.

다행히 나는 쓰는 일을 좋아하고,

문장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즐긴다.


하지만 모든 글쓰기가 다 즐거운 건 아니다.
가장 고된 시간은, 정리가 안 된 상대방의 서면을 읽을 때다.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핵심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논점을 흐리기 위한 말들이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그런 글에도 대응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쟁점이 아닌 이야기에 대해서도,

상대방이 이미 서면에서 말을 꺼낸 이상,

왜 그게 쟁점이 아닌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써야 할 글이 점점 길어진다.
좋아하는 일도, 이런 순간엔 괴로워진다.


얼마 전 맡았던 사건도 그랬다.

의뢰인은 금융기관이었다.

상대방은 총 5억 원을 대출받았는데,

그중 3억 원은 부동산을 담보로 한 대출,

나머지 2억 원은 신용대출이었다.

하지만 대출을 받은 이후, 이자는커녕 원금도 한 푼 갚지 않았다.
결국 담보로 제공된 부동산은 경매에 넘어갔고,

금융기관은 그 과정을 통해 2억 원 정도를 회수했다.

여전히 담보대출 1억원과 신용대출 2억원으로 총 3억원의 대출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신용대출 2억 원에 대해 소멸시효 문제가 있어,

금융기관은 그 금액을 먼저 청구했다.
나는 그 소송을 맡게 되었다.


상대방은 말이 많았다.
대출 당시의 사정을 길게 설명했다.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누구의 말에 속았는지,

얼마나 어려운 형편이었는지.


한 줄 한 줄 따라가다 보면, 사건의 실체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금융기관의 도덕성까지 언급했다.

아주 뭐, 참으로 정의로운 분이시다.


이쯤 되면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그 사정에 대해 우리라고 할 말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 말들 하나하나에 맞서기 시작하면,
소송은 본래의 길을 잃는다.


게다가 마침, 부동산 경매로 회수한 금액이 2억 원.
신용대출로 남아 있는 금액도 2억 원.
금액이 같으니 설명이 부족하면 이 두 개가 뒤섞이기 쉽다.

실제로 재판부에서도 “두 2억 원은 다른 건가요?” 하고 물어올 정도였다.

이럴 땐 긴 설명이 독이 된다.
불필요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간결하고 분명하게 정리해야 한다.


신용대출로 2억 원을 받았고, 아직 갚지 않았다.
경매로 회수된 2억 원은, 별개의 담보대출에 대한 변제다.


이 두 가지는 명확히 다른 이야기이며,

신용대출금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

우리는 그 점만 조용히 강조했고,
다행히 잠시 길을 잃을 뻔 했던 재판부도 우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판결문에는 내가 정리한 문장이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어떤 사건도 ‘당연히 이기는 사건’은 없다.
사정이 단순해 보일수록, 숫자가 깔끔하게 떨어질수록,
그 안에는 오히려 더 큰 오해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중심을 붙든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열 문장을 덜어내고,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만, 조심스럽게 꺼낸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세상에 조용히 말을 거는 일이다.
법정에서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그 말이 닿기도 하지만,

닿지 않는 말도 늘 함께 남는다.


그 간극을 메우려 애쓰는 일.

서면을 쓰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기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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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1) 부동산 시세가 오르자 헤어진 그녀가 생각났다.

(2) 믿었다는 말의 끝에서

(3) 송별회는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4) 꿈은 이루어진다, 단지 나만 기쁠 뿐

(5) 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 - 그 아이 이름 앞에 '딸'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6) 감염, 그리고 손해배상

(7) 당신의 말이 틀렸던 건 아닙니다.

(8) 소송이 길을 잃을 때

(9) 계약서에 없던 불편, 가게 안으로 들어온 갈등

(10) 감귤을 주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1) 업데이트 중

(12) 그 말, 들은 사람이 없다면?

(13) 공감의 전제사실

(14) 특수하게 중한, 특수범죄

(15) 어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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