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10)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제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을,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글로 다시 풀어보려 합니다.
열 번째 글입니다.
예상보다 더 많은 글을 나누게 되었고,
뜻밖의 좋은 만남들도 있었습니다.
처음보다 지금이 더 조심스럽고, 그만큼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끝이 멀지 않은 만큼 한 편, 한 편, 더 마음을 들여 써보려 합니다.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육지'에서는 제주를 '감귤국'이라고도 부르던데,
실제로 제주는 그 명성에 걸맞게 감귤과 관련한 분쟁들도 꽤 많다.
감귤이 맛있어질수록, 감귤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심도 함께 무르익는 걸까.
감귤 대금 문제는 생각보다 흔하다. 감귤을 납품하고도 대금을 못 받은 농가, 상품용 감귤과 가공용 감귤의 품질을 두고 벌어진 다툼 등 사건의 양상도 다양하다.
내가 맡은 사건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엔 감귤의 품질이나 가격이 아니라, '그 감귤을 사 간 사람이 누구냐'는 문제였다.
원고는 감귤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늘 A라는 사람이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 감귤을 주문했다. 대금도 언제나 A의 명의로 입금됐다. 감귤은 A가 지정한 선과장(감귤 선별 및 포장 업체)으로 보냈고, 그렇게 수확철마다 거래가 이어졌다.
“그 사람이 매번 전화했어요. 그리고 항상 그 사람 이름으로 돈이 들어왔고요.”
실제로 원고와 나눈 문자메시지에서는 A가 감귤을 주문하고, B가 대금을 요청한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감귤 수확이 막바지에 이를 때쯤 대금 지급이 점점 늦어지더니, 결국 총 5천만 원에 이르는 대금이 미지급됐다. 몇 번이나 독촉했던 원고는 A가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자 A를 상대로 대금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동안 쌓인 신뢰를 생각하면 불편한 선택이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소송에서 A는 이렇게 주장했다.
"저는 단지 B법인의 이사로서 주문을 대신한 것뿐입니다. 실제 구매자는 B법인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항변이었다.
알고 보니, 원고가 감귤을 납품했던 선과장은 B법인이 운영하는 선과장이었고, A는 그곳과 관련된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원고 입장에서는 늘 A가 주문했고, A 명의 계좌에서 돈이 들어왔으며, A의 지시에 따라 감귤을 납품했을 뿐이었다. 원고는 B법인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원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말이 안 돼요. 그렇게 몇 년을 거래했는데, 이제 와서 자긴 아니라고요? 감귤 품질 직접 따져가며 수령증 써 준 것도 본인인데?”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그 말투가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A와 B법인의 계좌를 확인하기 위해 금융거래정보제공명령을 신청했고, 법원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몇 주 뒤, 법원에 제출된 거래내역을 확인한 순간, 상황이 분명해졌다.
B법인에서 A에게 돈이 입금되면, A는 그중 일부만 원고에게 송금했다.
중간에서 일정 금액을 챙긴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단순히 “법인을 대신해 전달만 했다”는 설명으론 부족했다. 말하자면 A가중개인으로 직접 원고와 거래를 한 셈이었다.
또 다른 주장도 해결됐다.
A는 자신을 ‘B법인의 이사’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B법인의 등기부 등본에는 A의 이름이 없었다. 급여를 받았다는 내역도 없었고, 법인 내부 장부에도 해당 감귤 매입 관련 기록은 전혀 없었다. 그저 여러 과수원에서 납품받을 때 일정 비율의 수수료 지급만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원고와 B법인 간에 오간 영수증, 수령증 같은 문서도 전혀 없었다.
그 모든 기록과 정황은 A가 단독으로 거래를 주도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결국 법원은 A의 책임을 인정했고, 원고는 승소했다.
감귤 사건을 여러 건 다루다 보면 의외로 ‘대금이 얼마냐’를 두고 다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해마다 감귤 시세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가격에 대한 다툼은 드물다. 하지만 누가 감귤을 주문했고, 누구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지는 계약서 하나 없이 시작된 거래가 대부분이라 언제든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
현실적으로 계약서를 쓰기 어렵다면, 납품을 완료했다는 문자 한 통이라도 남겨두어야 한다. 거래의 흔적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
감귤수확철이 되면, 제주에서는 어느 식당을 가든 후식으로 먹으라고 계산대 근처에 귤이 잔뜩 들어 있는 상자들이 놓여있다. 제주 사람들은 자연스레 들어가면서 한두 개, 나오면서 한두 개 챙겨서 먹는데, 매일 먹으면서도 맛있게 먹는 제주 출신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물리지 않아?"
친구가 대답했다.
"너는 귤을 과일로 생각하니 질리는 거야. 귤은 물처럼 먹는 거야."
감귤이 이렇게나 맛있는 만큼, 감귤을 둘러싼 분쟁은 조금 덜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모든 농가들이, 제값을 받고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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