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이 틀렸던 건 아닙니다.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7)

by 김정은 변호사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제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을,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글로 다시 풀어보려 합니다.





소송을 스스로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억울한 마음을 안고,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결심일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소장을 작성하고, 법정에 선다.
그런 모습을 보면 놀랍다.
용기도 대단하고, 스스로를 믿는 마음도 강해 보인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삶을 지키려는 그 마음 자체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소송이라는 것은 ‘무엇을 주장할 수 있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를 다투는 일이기에,
본인의 이야기만 되풀이하거나

청구할 수 없는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온 이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특히 피고를 잘못 지정한 채 소를 제기한 경우엔,

애쓴 마음도, 들인 시간도, 비용도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경우에 따라 법원이나 경찰서에서 운영하는 무료 법률상담을 받아보거나,
법률구조공단을 통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조금만 방향을 틀었더라면,

훨씬 수월하게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일들이 많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나는 피고 측 대리인으로 재판에 출석했고,

원고는 소송을 직접 제기한 당사자였다.

그는 피고에게 돈을 빌려줬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차용증은 없었고,

메시지나 대화 속에도

돈을 빌려줬다는 뚜렷한 정황은 없었다.

오히려 그 무렵 피고가 원고의 일을 도운 사실이 확인됐고,

받은 돈은 그에 대한 보수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나는 ‘대여금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했고,

재판부는 변론기일에 원고에게 말했다.

“원고가 ‘대여금’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입증책임은 원고에게 있습니다.”


그러자 원고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여금은 아니고요, 빌려준 돈입니다.”


말끝에는 확신이 실려 있었다.
마치 재판부의 말에서 뭔가 잘못된 점을 발견한 듯,

본인의 말이 훨씬 정확하고 분명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정적이 흘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빌려준 돈’을 ‘대여금’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오히려 자신의 표현이 더 맞는 말이라는 듯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해졌다.
법정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낯선 언어로 구성돼 있는지,
그리고 그 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얼마나 쉽게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는지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재판은 감정이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다.
정해진 언어와 절차, 증거와 논리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리 진심이 강해도 그 자리에 닿지 못한다.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말하려고 왔다가,
어떤 말을 써야 하는지도 몰라 무력하게 돌아가는 사람을 보면,
그 마음이 닿지 못한 이유가 너무 사소하고 작게 느껴져 더 안쓰럽다.


사실 소송이란, 한 사람이 법이라는 낯선 언어 앞에 선다는 의미다.
그 언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조차 불리하게 보일 수 있고,
어떤 진실도 증거가 되어주지 못할 수 있다.


몸이 아플 때 민간요법이 통할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병원을 찾는다.
법도 마찬가지다.

아프지 않기 위해, 더 억울해지지 않기 위해,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음글 예고 : 소송이 길을 잃을 때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1) 부동산 시세가 오르자 헤어진 그녀가 생각났다.

(2) 믿었다는 말의 끝에서

(3) 송별회는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4) 꿈은 이루어진다, 단지 나만 기쁠 뿐

(5) 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 - 그 아이 이름 앞에 '딸'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6) 감염, 그리고 손해배상

(7) 당신의 말이 틀렸던 건 아닙니다.

(8) 소송이 길을 잃을 때

(9) 계약서에 없던 불편, 가게 안으로 들어온 갈등

(10) 감귤을 주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1) 업데이트 중

(12) 그 말, 들은 사람이 없다면?

(13) 공감의 전제사실

(14) 특수하게 중한, 특수범죄

(15) 어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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