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다는 말의 끝에서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2)

by 김정은 변호사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제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을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글로 다시 풀어보려 합니다.





5년 전쯤, 한 중년 여성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결혼 후 외국으로 나가 하숙집 운영부터 시작해, 번듯한 카페와 식당을 일궈낸 사람.
남편은 거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고, 말로 그녀를 갉아먹었다.

“이제는 놓고 싶어요.”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말투로 이혼 소송을 의뢰했다.

자녀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고, 그녀는 이혼을 결심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삶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외국에서 운영 중인 사업체에서 발생한 수익은
남편 명의의 한국 계좌로 입금되고 있었고,
남편이 최근 상속받은 국내 부동산도 확인된 상태였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큰 난관은 없어 보이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외국의 부동산은 제 명의도 아니고,

그리고… 그건 그냥 넘기고 싶어요.”
상속받은 부동산에 대해서도

“그건 시어머니의 유산이니까요”라고 덧붙였다.
그녀가 원한 건, 외국에서 운영 중인 사업장 월 매출액의 4~5배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결혼기간, 기여도, 함께 형성한 재산에 비해 너무 적은 금액이니 더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소송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남편은 이혼에는 동의한다는 취지의 서면을 한 차례 제출했지만,
그 이후로는 대리인 출석도 드물었고, 필요한 절차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남편 측이 외국 부동산에 대한 권리 포기를 확인하는 서류를 반복해서 요구해 온 것이다.
국내 재판이었고, 해당 부동산은 모두 남편 명의로 되어 있어,
우리가 소송에서 더 이상 다투지 않는다고 이미 진술한 이상 결국 판결문으로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라 그런 확인서는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확실하게 확인서를 주지 않으면 이혼도, 재산 협의도 하지 않겠다"라며 버텼다.
나와 재판부 모두

'이미 원고가 다투지 않겠다고 했으니 의미 없다'라고 피고측에 다음 절차를 진행할 것을 촉구했지만,
이를 전해 들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다투면서 얻고 싶진 않아요.”
그 말속엔, 이 소송 자체보다 더 큰 심리적 피로감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확인를 받고 그제야 재판이 겨우 굴러가기 시작했다.

결국 남편 명의의 국내 금융자산만을 기준으로 재산 분할이 결정됐고,

그 금액은 그녀가 원했던 수준과 거의 일치했다.

판결문을 손에 쥔 그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남편은 연락을 받지 않았고, 결국 나는 추심을 권유했다.
추심업체를 통해 겨우 분할금의 3분의 1 정도를 회수한 어느 날,
남편 측에서 연락이 왔다.

“나머지 금액 다 줄 테니, 계좌 압류만 풀어주세요.”
남편의 대리인은 나를 통하지 않고 그녀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

그녀가 압류 해제를 요청하기에, 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남편 대리인이 전한 그 약속을 믿기엔,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이 벌어진 이후였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제가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결국 압류를 해제했고,
남편은 즉시 계좌의 돈을 모두 인출했다.


며칠 뒤, 그녀는 등기부를 보내왔다.
이혼 판결이 확정된 지 열흘 만에,
남편이 상속받은 국내 부동산들까지 전부 제3자에게 증여한 사실이 적혀 있었다.
강제집행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참았던 말을 꺼냈다.


아니, 제 말은 안 믿으시고… 상대방 변호사 말은 그렇게 믿으셨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끝까지 믿고 싶었던 건, 남편도, 상대방의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믿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믿는다는 말은 따뜻하지만, 때로는 잔인하다.
사람을 속이는 건 종종 타인의 악의가 아니라,
자신이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감정의 기억일 때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믿고 싶었던 마음을 믿었다.




다음글 : 송별회는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 짧은 실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멈춰 세웠는지 이야기합니다.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1) 부동산 시세가 오르자 헤어진 그녀가 생각났다.

(2) 믿었다는 말의 끝에서

(3) 송별회는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4) 꿈은 이루어진다, 단지 나만 기쁠 뿐

(5) 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 - 그 아이 이름 앞에 '딸'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6) 감염, 그리고 손해배상

(7) 당신의 말이 틀렸던 건 아닙니다.

(8) 소송이 길을 잃을 때

(9) 계약서에 없던 불편, 가게 안으로 들어온 갈등

(10) 감귤을 주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1) 업데이트 중

(12) 그 말, 들은 사람이 없다면?

(13) 공감의 전제사실

(14) 특수하게 중한, 특수범죄

(15) 어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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