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4)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제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을,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글로 다시 풀어보려 합니다.
의뢰인과 변호사의 마음이 하나로 향하면 좋겠지만,
가끔 그 반대일 때도 있다.
의뢰인은 자신의 말이 옳다고 믿고 찾아오고,
종종 그 믿음이 확신을 넘어선다.
변호사는 법률과 판례, 정리된 현실 속에서 반대의 가능성을 설명하지만,
확신이 강한 사람에게는 듣고 싶은 말만 들릴 뿐이다.
변호사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확신에 찬 의뢰인의 사건을 맡게 되었다.
주위토지통행권을 구하는 소송이었다.
주위토지통행권이란,
도로와 직접 연결되지 않은 토지의 소유자가
주변의 타인 소유 토지를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다.
물론 타인의 소유권을 제한하는 일이므로
가능한 가장 손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의뢰인의 땅은 숟가락 모양이었다.
손잡이 쪽은 공로에 닿아 있었지만,
거의 쓰이지 않았고
실제 생활의 무대는 동그란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이 맹지였다.
즉 동그란 부분의 땅에서는 공로로 통하는 길이 없어
타인의 땅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자면,
의뢰인의 소유의 한 필지의 땅은 공로에 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용 빈도와 무관하게, 한 필지 안에서 공로와의 연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의뢰인이 주장하는 통행권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는 말했다.
“여긴 집도 있고, 다 여기서 사는데.
당연히 통행권이 인정돼야죠.”
재판부 역시 초반부터 부정적이었다.
현장검증 신청도 처음엔 기각됐다.
주위토지통행권이 법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우니
굳이 현장을 볼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의뢰인의 생활을 설명한 자료,
지적도와 지도, 구민법과 일본 판례까지 뒤져
현장검증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다행히, 현장검증은 이루어졌고
그날 이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재판부는 현장에서,
그 땅의 손잡이와 동그란 부분이
사실상 연결되지 않은 두 개의 세상처럼
단절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동그란 부분에서 손잡이 부분으로 가려면
약 20미터 높이의 절벽을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기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이상
승소 가능성은 여전히 낮았다.
상대방 대리인은 전관 출신의 노련한 변호사였다.
법정에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이건 볼 것도 없는 사건입니다.
성립될 수 없는 걸 청구하고 있어요"
라고 말했을 뿐, 그 외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현장검증 당시 재판부가 직접 확인한 내용을
핵심 논점으로 삼아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승소 판결을 받았다.
사무실 안은 술렁였다.
패소를 전제로 사건을 준비했기에
이 결과는, 누구에게도 예견되지 않은 일이었다.
놀람을 안고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승소했어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의뢰인의 말.
“…그럴 줄 알았어요.
애초에 질 이유가 없었잖아요.”
기쁨도, 안도도, 심지어 감사도 없었다.
그저
“상대가 괜히 욕심 부렸죠.
길 쓰면 얼마나 쓴다고.”
“빨리 끝날 걸 괜히 질질 끌었네.”
그 말들 사이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의뢰인에게 내 마음은 끝내 닿지 않았지만,
적어도 통행권이라는 목적은 이루어졌다.
그러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꿈은 이루어졌다.
단지, 나만 기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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