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 들은 사람이 없다면?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12)

by 김정은 변호사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제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을,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글로 다시 풀어보려 합니다.






명예훼손죄로 기소된 한 남성이 사무실을 찾았다. 공소장을 확인하니, 그는 전처의 직장에 찾아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적혀 있었다.


“너, 왜 이혼해 놓고 호적 정리를 안 해줘?”


그 문장 하나에 모든 상황이 응축돼 있었다.
피해자는 그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 가능한 한 알리고 싶지 않았던 개인사가 드러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피고인은 “너 왜 그거 안 해주냐”라는 말 외에는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밝혀진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사무실을 떠난 것이 맞았다.
그 말에 놀란 피해자가 나중에 직장동료들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면서,
오히려 본인의 비밀이 본인 입으로 알려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 모든 시작은 피고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피해자가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낀 것은
사실상 피해자 스스로 감정이 앞섰던 측면도 있었을지 모른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말은 한마디뿐인데,
그로 인해 ‘당신 때문에 내 사생활이 퍼졌다’는 비난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억울하다고 말했고,
"너 왜 그거 안해주냐"는 말 외에, '이혼'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누가 틀렸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과 오해가 겹쳐진 구조처럼 보였다.


형법은 ‘공연히 사실 또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를 처벌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공연히’라는 말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불특정 또는 다수가 듣거나 전해 들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 쉽게 말해 ‘소문날 수 있는 환경’에서 이루어진 말이어야 명예훼손죄가 성립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단둘만 있는 상황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만 있는 상황처럼 말이 쉽게 퍼지지 않을 환경이라면 공연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재판이 열렸고, 남성은 공소사실을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피해자는 피고인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고인은 별도의 공간에서 음성만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증인으로 나온 상대방은 내가 그의 진술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동안 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벌써 10년 가까이 법정에 서 왔지만, 그렇게 노려보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건조하게 질문했을 뿐인데, 그는 혼자 화가 난 듯 어쩔 줄 몰라 보였다. 재판부도 몇 차례 제지할 정도로 그의 답변은 답변이라기 보다 나에 대한 공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의 직장 동료는 이렇게 증언했다.
남성이 사무실에 찾아온 것은 맞지만, 전처가 그를 빠르게 데리고 나갔고, 그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기억나는 말은 “너 왜 그거 안 해주냐”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몹시 명확하게, 이혼했다는 사실은 그 피고인이 사무실에서 나간 후, 상대방이 말해줘서 그제야 알게 됐다고 진술했다.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언으로 명확해졌다. 검사는 더 이상 반대신문도 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공연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남성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 판결이 선고된 뒤, 나는 그 남성에게 경고했다.
“명예훼손은 무죄지만, 허락 없이 사무실에 찾아간 건 주거침입입니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스토킹처벌법 위반이 될 수도 있어요.”

당사자는 '절대 찾아갈 일 없다'며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하고 갔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누군가에겐 상처로 남고, 누군가에겐 억울함으로 남는 사건,
감정과 법 사이, 그 경계에서 만난 사람들.
법은 감정보다는 드러난 사실을 기준으로 삼지만,
그 판단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은 늘 그보다 복잡하다.

이 사건에서는 어쩌면, 내가 제일 복잡했던 것 같다.





다음 글 예고 :



시리즈 [법의 자리, 마음의 거리]

(1) 부동산 시세가 오르자 헤어진 그녀가 생각났다.

(2) 믿었다는 말의 끝에서

(3) 송별회는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4) 꿈은 이루어진다, 단지 나만 기쁠 뿐

(5) 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 - 그 아이 이름 앞에 '딸'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6) 감염, 그리고 손해배상

(7) 당신의 말이 틀렸던 건 아닙니다.

(8) 소송이 길을 잃을 때

(9) 계약서에 없던 불편, 가게 안으로 들어온 갈등

(10) 감귤을 주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1) 업데이트 중

(12) 그 말, 들은 사람이 없다면?

(13) 공감의 전제사실

(14) 특수하게 중한, 특수범죄

(15) 어른의 자리

이전 11화업데이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