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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희 Aug 16. 2021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듭니다

그동안 제가 올렸던 코로나 관련 글에서 사람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내용은 아마도 건강한 사람들의 경우 코비드 19 정도의 감염병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고 지나가는 편이 개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더 낫다는 주장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코비드 19에 대한 분위기가 상당히 바뀐 지금도 건강한 사람들에게 코비드 19는 그리 위험한 병이 아니다 정도의 주장은 받아들여집니다만, 감염을 경험하는 편이 “더 낫다”와 같은 주장에는 여전히 거부감이 심한 듯합니다.


이는 제가 연구자 생활 내내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노력했던, 그리고 이 블로그를 시작한 계기이기도 한 <호메시스>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힘든 것과 비슷합니다. 호메시스란 “적절한 스트레스에 대한 노출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정도로 아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언뜻 듣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평범한 삶의 지혜 정도로 보입니다만, 호메시스는 20세기 내내 유사과학의 대명사로 불렸던 이론입니다. 그 이유는 실제 과학의 영역에서 적절한 스트레스의 사례로 가장 많은 연구가 되었던 주제가 바로 <방사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호메시스 이론을 방사선에 적용하면, “저용량” 방사선에 대한 노출은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방사선과 같이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종류는 제로만이 안전한 것이고 노출량이 증가하면 증가하는 것만큼 더 해롭다는 전제하에 현대사회의 모든 제도가 만들어졌고, 국가는 모든 전권을 가지고 관리하고 통제합니다. 이런 판국에 “저용량” 방사선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 정도도 아니고,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사회의 근간을 위협하는 천하의 사기꾼, 돌팔이 취급을 받게 되겠죠.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반전이 시작됩니다. 무엇보다 호메시스를 언급하는 논문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유사과학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터라 호메시스가 아닌 다른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읽어 보면 결국 호메시스인 논문들이 많죠. 또한 최근 나온 건강 관련 대형 베스트셀러들도 모두 호메시스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입니다.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가 쓴 <노화의 종말>이 그렇고, 플랜드 패러독스를 쓴 스티븐 건드리 박사의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죽는 법>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 호메시스는 반 쪽 짜리라고 봐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호메시스만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간헐적 단식, 저탄수화물식, 소식, 냉온욕, 햇빛, 숙면과 같은 건강한 생활습관들을 호메시스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죠. 반면 이 저자들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믿고 있는 요인들이 보이는 호메시스 현상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호메시스의 진정한 이해는 우리가 위험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래서 무조건 피하면 피할수록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요인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방사선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노출되는 수많은 유해물질들이 다 해당합니다. 이러한 저농도 노출은 0으로 만들 수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만,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은 0에 가깝게 가면 갈수록 좋다는 소모적인 패러다임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죠.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제가 코비드 19 사태 전에 올렸던 글들, 특히 “라돈침대과 라돈온천의 괴이한 공존"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좀 더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분은 케미포비아환경호르몬, 미세 플라스틱, 미세먼지 등에 대한 글들도 함께 읽어보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껏 올린 코로나 관련 글들을 계속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방사선이나 유해물질 자리에 코비드 19를 넣어도 아주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듯합니다. 네, 맞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바이러스,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들도 호메시스를 유발하는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가 남긴 명언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 문장은 호메시스에 대한 매우 직관적인 표현이기도 해서 호메시스에 관한 학술논문에도 가끔 등장하곤 합니다. 바이러스든 박테리아든 뭐든 외부에 존재하는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 이들이 나를 죽이지 못하면 결국 이 경험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듭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코비드 19 정도의 감염병이 유행할 경우, 치사율 0에 수렴하는 건강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감염을 경험하고 지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본인한테 가장 유리합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노출 자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되었을 때 가능한 한 무증상, 경한 증상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도와주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유행 초기에 올렸던 "신종 코로나 대응, 면역력 일깨우는 방법 ABCDE"를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이러스 노출 제로를 만들기 위하여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모든 것들은 서서히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쪽으로 작동한다는 점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방역 vs. 면역: 공존 불가능한 두 세계"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감염을 경험하고 지나가는 건강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사회가 가진 감염병에 대한 저항력은 점점 더 올라갑니다. 집단면역이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집단면역은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위하여 일정 수준 올라와 주어야 하는데, 끊임없이 변이가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호흡기계 감염병의 경우 자연감염의 경험을 통하여 올라가는 집단면역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연감염이 올려주는 집단면역과 백신이 올려주는 집단면역은 차원이 다르다고 봐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자연감염을 통하여 획득하는 면역은 항상 우월합니다”와 “백신 접종으로 집단면역에 도달하겠다는 헛된 꿈”에 자세히 나옵니다. 4차 유행이 시작될 때 정부에서는 2030을 유행의 주범으로 지목한 바 있으나, 지역사회 전파 후 건강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지나가는 감염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코비드 19는 유행 초기부터 고위험군과 저위험군간 치명률 차이가 수천 배에 이르며, 대부분 사망은 고령의 기저질환자에게 발생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던 감염병입니다. 이런 감염병에 대한 방역 정책은 고위험군과 저위험군을 구분하여 접근하는 것이 되었어야 했으며, 우리나라와 같이 단순히 전체 확진자 수 줄이기가 정책 목표가 되는 것은 중대한 실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의료시스템 과부하가 예상될 경우에는 “단기간 전체 사회 셧다운"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와 같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이 때도 의료시스템 재정비가 끝난 후에는 다시 사회를 열고 건강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교육, 경제, 문화 등 사회의 기본적인 기능이 돌아가면서, 한 사회가 치러야 할 유무형의 장단기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고위험군의 중증도를 낮출 수 있는 백신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신이 세상에 나온 지 반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방역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은 K방역에 대한 환상과 집착이 자초한 禍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지난주 중앙임상위원장이신 오명돈 교수님께서 다시 한번 확진자 수 줄이기를 목표로 하는 방역이 아니라 고위험군과 환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인터뷰를 하셨더군요. 즉, 건강한 사람들에게 자연감염의 기회를 허용해도 괜챦다는 의미입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예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듯했지만, <의료 붕괴>를 걱정하면서 무책임하다고 비판하는 댓글들도 여전히 많은 듯합니다.


현재 <의료 붕괴>란 단어는 어떤 반론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K방역을 이끌어 왔던 전문가 집단에서는 현 방역 정책이 불가피한 이유로 계속 강조하고 있죠. 그러나 유행 초기도 아닌 유행이 시작된 지 1년 반 이상이 지난 지금, 그 어떤 국가보다 의료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에서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봅니다. 의료시스템이란 준비상황에 따라서 천명의 환자가 발생해도 과부하가 걸릴 수 있고, 만 명의 환자가 발생해도 별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의미 없는 확진자 수 헤아리기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정작 했었어야 할 중요한 일은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방역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전문가들도, 지금까지의 방역은 훌륭했으나 델타 변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으므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데 코비드 19와 같이 무증상자가 많은 감염병을 상대로 전파 최소화를 목표로 했던 K방역은 처음부터 되짚어봐야 할, 그리고 한 사회의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재검토되어야 할 정책입니다. 특히 사회 구성원들 간에 증오, 혐오,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양산하고 감염병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조장한 결과는 이 유행이 끝난다 하더라도 델타 변이보다 더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사회 구석구석으로 퍼져갈 것이고, 코비드 19의 그 어떤 후유증보다 더 오래 우리 사회에 머물 것입니다.


어쨌든 오명돈 교수님의 인터뷰에 대한 정부의 답변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목표로 했던 백신접종률에 도달하기 전 정책 방향을 바꾸면 K방역의 실패로 비칠까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어떻게 이야기 하든 이미 많은 국민들이 K방역을 의혹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처지는 이해합니다만, 또다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는 소탐대실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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