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성기선_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
학교 교육은 공정성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최근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수많은 불평과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학종과 정시의 논쟁 속에서 공정성이라는 준거가 제기되면서 정시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판단의 준거로 작동한 것이 ‘일반 국민의 70% 정도가 정시가 공정하다는 생각을 한다.’라는 여론이었다. 한 나라의 입시제도 개편이 여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은 별도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그래도 국가교육회의를 비롯한 많은 단체와 교사들이 꾸준히 입시제도 개편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허망하게 만든 점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는 교육계에서 말하는 공정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
일반적으로 교육학계에서는 공정성(equity)보다는 평등성(equality)을 더 많이 중시해 왔다. 그 유명한 미국의 콜먼 보고서(Coleman Report)가 1966년에 나오면서 교육학계에 교육 평등에 대한 담론을 본격적으로 던져 주었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이렇다. 즉,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계층 간 격차가 확대되었다. 상층과 하층의 불평등은 한 세대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세대 간 불평등이 확대 재생산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계층 간, 계급 간 갈등이 고조된다.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하층계층들은 빈곤의 악순환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불만은 더욱 높아져 국가 체제의 불안요소로 등장한다. 그래서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불평등의 세습을 깨뜨려야 한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의 학교환경을 개선한다면 가정에서 받지 못한 지원을 공교육을 통해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만큼 계층 간 학업성취 격차도 줄어들고 계층 간 불평등도 해소되리라 전망하였다.
미국 의회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재정투자를 지역별, 학교별로 차이를 두고자 하니 콜먼 교수에게 이러한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조사연구를 수행하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방대한 연구의 결과는 상식과는 배치되었다. 학교의 물리적 재정적 환경과 같은 투입요소를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학교 들어오기 전 보였던 계층 간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학교는 계층 간 격차를 좁히는 데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미 의회에서는 다방면으로 하층계층, 불이익 집단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이른바 Affirmative action이라 불리는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하지 않으면 출발선 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획일적인 평등의 시각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약자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등, 보상적 평등의 개념까지 나아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근 동양계 미국인들이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정책들이 오히려 인종차별이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정책이 오히려 공정하고 타당한 정책이라고 찬성을 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적 불균형, 불평등이 심화 되어 양극화 현상도 심화 된다면 사회체제의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범죄가 증가하며 공정한 사회 구현에 방해요인이 증가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한 배려나 공감이 없이 획일적인 평등, 기계론적 공정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경쟁 위주 사회의 병폐이다.
공정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 고민해야 한다. 먼저 1차원적이며 표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정성은 과정의 투명성, 게임 규칙의 공평함을 의미한다. 운동경기에 비유해 본다면 누구나 출발선에 같이 섰다고 생각하면 동일 기준에 따라 결과를 측정하여 순위를 매기는 일을 해야 한다. 누구에게는 유리한 규칙을 적용하고 누구에게는 불리한 규칙을 적용하는 순간 모두의 불평을 살 수밖에 없고,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하지 않게 된다. 과정과 절차의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하는 공통요소임에는 틀림이 없고 이의를 달 만한 내용도 없다.
그런데 2차원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경제학도 미시경제학이 있고, 거시경제학이 있듯이 공정성에 대해서도 미시공정성이 있고 거시 공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차원적인 수준을 미시공정성이라 한다면, 2차원적인 수준을 거시 공정성이라 명명해 본다.
그렇다면 거시 공정성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보상적 평등의 개념과 일치한다. 사회적 약자는 아무리 게임의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게임을 한들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상위 계층 자녀로 태어나 부모의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 수준의 수혜를 입은 아이들은 학교 교육을 받기 전부터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폭적인 교육적 지원을 받는다. 이들은 이런 수혜의 효과로 모두가 선망하는 대학에 비교적 쉽게 진학할 수 있다. 반면 하위 계층 자녀로 태어난 아이들은 생계에 허덕이는 부모의 방임 혹은 방치 속에 자라날 가능성이 크고, 이로 인해 유아기, 아동기에서부터 교육의 격차를 보이게 된다. 문화 자본, 경제 자본, 사회적 자본 모두가 결핍된 상태에서 공교육을 시작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계층 간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구조이다. 아무리 개인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회 구조적 여건 안에서는 하층 아이들이 희망하는 진로진학의 결과를 얻기 매우 어렵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 구조의 문제이다. 실패한 개개인이 게을러서, 노력하지 않아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비난을 하면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나의 게임 룰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 그것을 공정성이라 부른다면 참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우리나라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하게 불평등이 심화 되어 양극화 사회가 되었다. 비정규직, 시간제 근로자, 계약직 등 노동 불안이 가중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강화됐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용어가 이를 일컫는 용어로 새로이 등장하기도 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1차원적인 공정성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학교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불평등이 완화되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가 내려져 있다. 그렇지만 2차원적인 공정성 확보를 위한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의 안정화를 위한 적극적 정책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돌봄, 배려, 복지, 인권, 회복 등을 강조하는 여러 정책을 통해 사회통합과 포용성을 강화해야 한다.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 돌봄교실, 무상급식, 고교무상교육 등의 정책들이 이어지고 있다. 공정성 강화를 위해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들이 더 많이 제시되어야 한다. 포용적 혁신국가와 공정성은 표면적으로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거시적 공정성의 시각에서 본다면 매우 친화력이 있다.
공교육 장면에서 이러한 공정성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특히 민주시민의식을 기르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넓은 의미의 공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똘레랑스’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위한 공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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