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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ys Feb 04. 2020

티처뷰_정진화 선생님의 살며 가르치며

티처뷰 / 정진화_서울 강신중학교 

2014년부터 4년간 새로운학교네트워크 지원센터장으로 일하신 정진화 선생님이 명예퇴직을 하십니다. 새넷지원센터장 이전에도 전교조위원장, 전교조 서울지부장, 해직교사로 삶을 살아온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정진화 선생님 / 출처: 노컷뉴스

Q / 선생님, 방학인데 학교 다녀오셨다요?

A / 네. 아직 학급 문집 마무리도 못 했는데, 학년 문집도 해야 해서요. 학급 문집을 만들고 싶어 100만 원 예산을 남겼더니 자유학년제라서 아이들 글쓰기로 학년 문집을 만들자고 문집 두 개를 만드느라 바빴어요. 아이들 글을 충분히 잘 쓸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그렇지 못해 안타까워요! 


Q / 담임 선생님이세요? 

A / 마지막 해를 부장을 안 하고 담임을 하게 돼서 참 다행이에요. 


Q / 감사한 일이네요. 선생님 근무하시는 학교는 어디세요? 

A / 서울 강신중학교라고, 양천구 신월동에 있어요. 목동과는 떨어져 있는 외곽에 있는 학교에요. 학생이 900명 되는데 그곳에서 1학년 담임을 하면서 도덕을 가르쳐요. 


Q / 인터뷰를 보시는 새넷 선생님들에게 정진화 선생님 소개를 해주실까요? 

A / 글쎄요, 소개하라니까 쉽지는 않네요. 지금 제가 올해로 37년째 교직에 있네요. 1983년에 학교에 나와서 서울의 중학교에서 계속 있었죠. 그러다가 6년 반쯤 되었을 때 전교조가 만들어졌어요. 그때는 학교에서 상명하복 문화가 교사를 힘들게 했을 때예요. 그때 전교조가 만들어졌고, 해직된 후 학교 밖을 많이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니 정말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렇게 복직이 되었어요. 1993년 복직이 된 후 전교조에 계속 몸담고, 또 참교육 실천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후 30년 가까이 지나서 새로운학교운동이 일어날 때 이번엔 새로운학교운동에 몸을 담게 되었어요. 교사들의 운동이 솟구칠 때 첫 번째 20대 때 전교조를 만났고, 그 후 30년 후 50대 때 새로운학교운동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다행히도 운 좋게 교육운동의 큰 의미를 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Q / 선생님이 쓰신 새넷 총서 첫 번째, ‘교사, 학교를 바꾸다’에 담긴 교육운동 이야기가 마치 정진화 선생님의 삶의 궤적으로 느껴지네요. 

A / 그래서 제가 30년 만에 새로운학교운동이라는 또 다른 교사운동, 교육운동과 같이 있게 돼서 기쁘다. 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아요. 2016년도에 그동안의 교사운동을 기록한 ‘교사, 학교를 바꾸다’가 새로운학교 총서로 나왔어요.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되었을 때 그동안 내가 했던 일이 무엇일까 돌아보고 싶었어요. 그다음 2005년, 2006년 전교조 서울지부장, 2007년, 2008년 전교조 위원장 역할을 연속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 가운데에서 많은 것을 경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어요.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지요. 해방 이후 교사운동의 흐름 속에서 전교조 운동이 있고 그 연속 선상에서 새로운학교운동이 일어나 교육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해방 이후의 교육운동부터 책 안에 담고자 했어요. 해방정국, 4·19 혁명 공간, 5·18 민주화운동 이후, 6월 항쟁 이후 교사들이 좌절하고 또 좌절하고 그러면서 다시 일어서서 이제 새롭게 새로운학교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Q / 선생님이 쓰신 ‘교사, 학교를 바꾸다.’가 우리 교사운동을 담아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A / 우리가 한 일에 대한 기록과 돌아보기의 시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그동안 참 안타까웠어요. 교육적으로 돌아보기, 기록이 없으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더라구요. 예를 들어 새로운학교, 혁신학교를 만든 것을 누가 자기가 만들었다고 원조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제가 대학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학생들이 혁신학교를 처음 만든 것이 어떤 교사라고 발표할 때 그곳에 참여한 분들이 들으면서 다 그런 줄 아는 거에요. 지금은 우리 교사들이 만들어 온 것을 인정하고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기록이 없다면 우리의 실천은 사라질 수 있어요. 2000년 초반부터 혁신학교를 직접 만든 사람, 밑바탕부터 만들어 온 사람들의 기록이 있어야 제대로 역사가 정리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총서는 해마다 나오기를 바랍니다. 


Q / 새로운학교지원센터에서 전국의 새넷 선생님들의 교육 실천을 총서로 묶겠다고 했으니 기대하셔도 될 듯합니다. 선생님, 어려운 시기, 해직 때는 어떠셨는지요? 

A / 제가 결혼을 25살 때 하지 않았겠어요? 학교에서 졸업한 지 일 년 반만에 결혼을 했어요. 학교에서 만난 남편은 노동운동을 한다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제가 해직되었을 때는 아이도 있었는데 90년대 초반에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어요. 저는 졸지에 가장이면서 해직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전교조의 많은 선생님이 해직교사를 위해 후원금을 내주어 생계를 지원해주었어요. 직위와 상관없이 식구 수에 따라서 생계비를 주었는데, 우리 집은 식구가 있는 편이어서 생계비를 더 받았어요. 저는 한 달에 35만 원씩 받고 상근을 했어요. 그때 윤영규 위원장님 따님이 일곱 분 되셨고, 사모님도 계셨는데 38만 원을 받으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죠.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 4년 반 되는 해직 기간 동안에 기쁜 일도 많았어요. 해직되어서 학교 밖의 많은 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분들과 교육 현실이 어떤지, 무엇이 문제인가를 이야기하고 또 듣기도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Q / 죄송하고 또 감사해요. 선배님들의 애쓰심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005년, 2006년 전교조 서울지부장을 하셨는데 그때는 어떠셨어요? 

A / 1999년 합법화되었고, 저는 2005년 전교조 서울지부장으로 활동하였어요. “합법화되었는데 교육하는 것이 왜 달라지지 않을까? 학교는 왜 달라지지 않을까 ?” 질문을 품게 되었어요. 합법노조가 되자 제도 개선 투쟁을 많이 하고, 조합원이 십만까지 늘어나자 비합법 시대에 하던 연대보다는 교사 중심 투쟁을 하게 되었어요. 합법화가 되면 여러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게 쉽게 현장의 학교가 변화하지 않았어요. 그런 질문과 답답함을 갖고 있는데 권유를 받아 선거에 나가게 되었어요. 현장 교원의 의견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전교조가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성찰하고, 현장교사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며 학교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다짐했지요. 그간 정부의 몇 가지 정책에 대한 반대로 한정되거나, 합법화 이후 참교육 실천이 교사 집단적 실천이 아닌 교과별 모임, 분과의 활동에 머무르고, 개인의 실천에 맡겨지는 데 대한 아쉬움이 많은 시기였어요. 



Q / 바로 이어서 2007년, 2008년 전교조 위원장이 되셨어요. 

A / 서울지부 일할 때 현장교사 동아리를 지원했어요. 그 동아리가 17개까지 늘어나고……아! 물론 지회 차원에서 대의원 의견 모아오기, 교사 동아리 지원 등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 노력 등이 이어져 전교조 위원장에 당선되게 되었어요. 제가 전교조 위원장을 할 때는 참여정부 마지막 해 2007년이었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직교사들의 단절된 경력과 호봉을 인정받게 하려고 정부와 교섭하는 데 힘을 기울였어요. 정진후 수석부위원장님이 애를 많이 썼어요. 저도 그때 문재인 비서실장과 통화도 몇 번 했어요. 역대 전교조 위원장은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는데, 그때 저는 세 번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어요. 스승의 날, 민주노총과 함께 하는 대화의 자리였죠. 그리고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 연금법 개악 반대, 장애인 교육지원법 등을 추진했어요. 장애인 교육지원법은 실제로 통과가 되었고 농산어촌 작은학교에 대한 대책 등을 요구했지요. 민주 정부라고 말할 수 있는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 때에도 농산어촌 작은학교의 위기가 계속해서 가속화되었어요. 그렇게 2007년이 마무리되면서 12월 19일이 대통령 선거인데, 그 전에 태안 기름 유출사건이 있었어요. 대선 다음 날 기름을 닦으러 태안으로 가자. 검은 기름때를 벗기고 오자. 하며 대선 실패를 아프게 받아들였어요. 


Q / 참여정부 다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잖아요. 영어 몰입교육, 고교 다양화 정책 등 우리 교육을 헝클어뜨린 정책이 쏟아져 나왔을 때인데, 우리 교육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사건이 있을까요? 

A / 아! 참여정부 다음이 바로 이명박 정부예요. 시작부터 엄청난 정책을 쏟아내어 정신이 없었어요. 영어 몰입교육, 다양한 학교 만들기 정책 아래 마이스터고, 자율형 사립고 300개 등의 정책이 쏟아져 나올 때여서 그 정책 하나마다 대응해야 했어요. 또 학교의 규제를 없애겠다고 발표해, 보충수업, 우열반 부활 등이 예견되었어요. 이를 막기 위해 4월 청와대 단식을 시작했어요. 청와대 단식이 이어지는 동안 5월 2일 중학생들이 청계천에서 먼저 광우병 촛불집회를 열었어요. 더 자세히 말하면 여중생 중심이지요. 그다음 날부터 규제 철폐를 선언한 4·15조치 반대 단식과 광우병 촛불집회 양쪽을 합쳐 광우병 위험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청계천에서 열렸어요. 학생들과 함께하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부터 함께 하자! 조직적인 동원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라고 외치고, 우리는 우열반 부활, 새벽 보충학습 부활을 막자 이런 마음들이 광우병이랑 합쳐지면서 청소년들의 자발적 요구가 촛불집회로 이어졌어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큰 약진인 촛불집회의 시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Q / 새로운학교운동과는 어떻게 만남이 이루어지셨나요? 

A / 2008년 황호영 선생님이 부위원장님이셨어요. 황호영 선생님이 학교를 변화시키는 자발적 모임들과 관계망을 연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정진후 수석부위원장님이 중심이 되어 2007년에 여러 단체의 요구를 모아 교육복지를 위한 교육대개혁안을 대선 때 제출하고 사회적 의제를 만들었는데, 2008년부터는 계속 정부 정책에 반대할 일만 생겼어요. 자율형 사립고 반대, 규제 철폐 반대 등이었어요. 2005년에 서울지부 일할 무렵 이준범 선생님이 초등위원장님이셨는데 새로운학교 만들기 운동이 있다고 하시며 공부하는 모임을 소개해주신 거예요. 그때까지 전교조는 반대만 하는 집단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어요. 너희끼리 전교조 학교 만들어서 잘해 보아라! 하는 이야기도 보수진영에서는 하였어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학교에서 질 높은 교육을 하는 것이 목표이니, 전교조 학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학교를 좋은 학교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안을 만들고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였는데, 2008년 황호영 선생님이 새로운학교를 만드는 자발적인 소모임들을 묶어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미 학교의 변화를 만들어낸 경기의 남한산초등학교, 전북의 삼우초등학교, 부산의 금성초등학교, 천안의 거산초등학교, 상주의 남부초등학교 등이 연결되어 작은학교교육연대 등으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전교조와는 별개로 학교를 바꾸는 데에 방점을 찍은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안정적으로 학교개혁에 힘을 쏟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황호영 선생님과 의견을 나누었어요. 교사뿐만이 아니라 연구자, 학교의 교사, 교장, 교감이 모두 함께 하는 단체가 되어야 학교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러면 교원노조와는 달리 다양한 교육 구성원이 회원이 되는 조직이 되는 거였지요. 참교육 운동이 개인에게 그 책임이 맡겨지고, 교과 운동이 주제분과로 후퇴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차에, 새로운학교운동을 하는 선생님들과 학교를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고 김주영 선생님이 그때 전교조 조직실장이었어요. 김주영 선생님이 경기도의 새로운학교운동을 자주 이야기했었고 서길원 선생님, 인천의 배제택 선생님을 초청해 함께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지금까지 새로운학교운동과 인연이 이어지고 있어요. 


Q / 새로운학교운동을 통해 행복한 학교의 변화도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A / 2013년 학교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왔어요. 양천구 목동중학교에서 학생자치, 동아리, 학생축제 등 창의적 체험활동 부서를 맡아 학교 일을 신나게 했어요. 그렇게 아이들과 행복하게 만난 것이 참 좋았어요. 그때부터 목동중학교는 선생님들이 창체 부장을 내부에서 추천하여 제가 맡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4대째 이어오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연속성을 가지게 되었고, 창체부장이 학생 중심 활동을 이끌고 있어요. 동아리, 학생회, 학생축제, 방과 후 활동 등을 담당하고 지금까지 이어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역대 창체부장들과는 작년에 아일랜드로 평화교육 기행도 다녀왔어요. 기획을 담당하는 3년차 새내기 젊은 선생님도 함께 갔어요. 그 시작은 소박한 희망이었어요. 서울은 혁신학교를 만들기 위해 의견을 모으기가 힘들어서 학생중심 활동을 먼저 만들어내자고 했지요. 동료 선생님들의 도움을 얻어 11월 3일 학생의 날, 지금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인데 그때 학생의 날을 학생축제로 만들었어요. 학생독립운동가와 같은 농민복과 유관순 옷을 주문해서 그날을 재연하고, 학생회 임원들은 그날의 유래, 기념식, 퀴즈를 준비했어요. 점심시간에는 선생님들이 운동장 곳곳에서 솜사탕 만들어주기, 달고나 만들어주기, 전통놀이마당을 열어 딱지치기, 비석 치기 등을 했고, 어떤 선생님들은 타로점을 봐주기도 했어요. 모두 선생님들의 희망을 받아서 했어요.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은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점심시간이 45분이었는데 너무 짧아서 그때부터 점심시간을 70분으로 늘렸어요. 해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학생회 활동, 동아리 활동, 학생축제는 목동중학교의 창의적체험활동의 중심이에요. 


Q / 당연히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실 줄 알았는데, 퇴직하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명예퇴직을 결심하셨어요. 

A / 사실 정년까지 갈 생각을 했는데……지금의 학교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제가 바깥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2030교육포럼 준비위원회 활동도 있고, 새로운학교네트워크에서 참여하는 교육혁신연대 대외협력위원장도 맡게 되었어요. 양천 교육혁신지구 선생님들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고요, 그밖에 혁신지구 심사 등 학교 바깥의 일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아버님도 어머님도 이제 연세가 많아지셨어요. 제가 새넷 지원센터장을 맡은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80살이 훌쩍 넘으셨고,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보살펴 드리고 싶었어요. 이제 3년 후엔 정년퇴임인데 그땐 90이 넘으셔서,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을 제가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에서 할 일은 할 만큼 했고, 이제 오히려 학교 밖에서 지원하고 혁신을 돕는 일, 그리고 우리 교육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저에게 주고 싶어요. 퇴직하면 시간을 내서 여기저기 학교도 가고 싶고, 전국의 교육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학교와 마을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Q / 혹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다면 좀 말씀해주시겠어요?

A / 제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이 기억에 남아요. 김재순 선생님. 당시 처음 발령 난 여자 선생님이셨어요. 특별한 추억이 있다기보다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따뜻하고 싱그러운 느낌이에요. 제가 선생님을 마음속으로 좋아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Q / 제자, 기억에 남는 제자들도 있으실 것 같아요! 

A / 교직 중반까지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고, 또 어렵기도 하지만 가족관계도 안 좋아서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이 종종 있었어요. 그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나고, 교직 후반으로 가면 4차원 같은 아이들, 엉뚱하고 친구가 없는 아이들이 많이 생각나요. 

    제자 중에는 지금까지도 첫해 제자들이 가장 많이 생각나요. 화곡여자중학교 아이들이에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내가 스물네 살 때 그 친구들을 처음 만났어요. 저와 6살 차이가 나요. 크리스마스이브 때 모두 둥글게 둘러앉아 기타에 맞춰 노래 부르며 촛불을 켜 들고 자기 소원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다 같이 껴안고 눈물을 쏟아냈는데, 지금도 그 아이들이 기억에 남고, 가슴에도 남아 있어요. 지금도 종종 만나는데 이제는 같이 늙어가고 있지요. 


Q / 선생님들께 꼭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A / 결국 우리가 교육운동, 새로운학교운동의 핵심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내 식으로 사랑하거나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픔을 줄 수도 있다고 봐요.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아이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아이들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때부터 교육이 가능한 관계가 된다는 것이에요. 아이들에게 잘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지켜보고 왜 그런가 물어보고 해야 하지요. 저는 인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칭찬이 아닌 인정 말이에요. 아이들 하나하나를 인정해주고 경청해주고, 그제야 저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그제야 그 아이가 저로부터 배우지 않을까 합니다. 


Q / 새넷의 선생님들께 특별히 더 말씀해주시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A / 혁신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혁신을 만들어 왔고, 이제 또 그 혁신을 디딤돌 삼아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우리가 너무 많은 일에 둘러싸여 있으면 건강도 잃고, 사람도 잃을 수 있어요. 어려움을 느낄 때 돌아보면서 쉬어가야 사람들과 오래 갈 수 있어요. 더불어 함께 가면 오래 기쁘게 할 수 있어요. 일에 치이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쉬어가도록 해요. 


Q / 혹시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A / 저는 새넷 회원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제2의 교육운동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새넷 선생님들은 그 자체로 자부심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시절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그 맨 앞에 교사들이 있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어깨를 겯고 함께 뚜벅뚜벅 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육을 우리 상황에서 우리에게 맞게 계속 깊이 있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노력을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핀란드와 덴마크에서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혁신 교육을 내놓고 세계 여러 나라와 토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봅니다. 


 들어가는 글 _ 새넷 2019 Winter


1. 시론


2. 포럼 & 이슈


3. 특집


4. 전국 NET


5. 수업 나누기 & 정보 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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