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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Sep 06. 2020

가상공간 속 나에게 투자한다.

게임 아바타에 현질하듯, 인스타그램 속 나에게 '단 하루의 사치'를

유현준 교수의 <공간이 만든 공간> 두 번째 포스팅,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 온 공간에 대한 선호 변화에 초점을 맞췄던 첫 번째 포스팅에 이어, 이번에는 이 책의 8장과 9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 중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가상공간이라는 키워드로 독서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조금 더 전달해보려고 한다.






이제는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린 스크랩북


유현준 교수는 몇 살일까. 찾아보니 1969년생, 올해 52세가 된단다. 그가 한참 건축에 대해 배우던 시절만 해도 AutoCAD 같은 설계 프로그램이 아직 출시되지도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AutoCAD는 1981년에 출시되었다.) 도서관에 가서 좋은 건축물 사진이 담긴 책을 빌려다가 읽다가 인상적인 부분이 있으면 복사해서 스크랩을 해 두지 않았을까. 그 스크랩북에는 각자의 취향과 내공이 녹아있고, 새로운 디자인을 할 때 레퍼런스로 활용할 수 있어 소중한 자산이 된다.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굳이 손으로 스크랩북을 만들어 관리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스스로 웹사이트를 뒤져 즐겨찾기를 해 놓지 않아도 인터넷의 바다에서 내 취향에 딱 맞는 이미지를 골라서 보여주는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젊은 직원들의 작업방식을 보고 느낀 뜨악함(?)에 대해 적어놓은 구절이 재미있어서 밑줄을 쳐 두었다.


과거에는 계단을 설계할 때 콘셉트를 고민하고 난간을 어떻게 할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핀터레스트에 '계단'을 치고 사진을 고르면 컴퓨터가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사진을 수십 수백 개 더 골라서 보여준다. 디자이너는 그 안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서 더 발전시킨다.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작업방식이 아직은 아주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건축 분야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협업하고 있는 예시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인다. OO분야에서 인공지능과의 협업 이라고 하면 뭔가 굉장한 자본을 들여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출시된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 역시 그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젠가부터 한 번 특정한 인테리어가 유행하면, 비슷한 느낌의 공간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게 느껴진다. 언제까지냐면, 그 공간이 더이상 특별하지 않게 느껴져 다른 유행이 시작될 때까지다.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기까지 건축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누적된 취향과 창의성에 의존하기보다는, 핀터레스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레퍼런스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치환이 된다면, 인공지능 시대 건축이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든다.


예를 들면 이런 공간. 천장의 배관을 노출하고, 벽면을 칠하지 않은 듯 칠해놓은 인더스트리얼 양식의 공간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건축학의 연구분야 중에 쉐입 그래머(Shape Grammer)라는 게 있다고 한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에는 안도 타다오만의 스타일이 있다. 언어의 패턴을 분석해 문법(Grammer)을 만들듯, 안도 타다오의 건축 스타일을 분석해 일종의 문법을 구축하는 게 바로 쉐입 그래머이다. 이 기술이 조금 더 발전되면, 안도 타다오가 직접 건축에 관여하지 얺더라도, "안도 타다오라면 이렇게 디자인 했을거야"라는 안도 타다오 스타일의 건축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우리는 내 땅에 집을 설계할 때 세계 유명 건축가의 쉐입 그래머 소프트웨어를 사서 그 사람이 지은 듯한 집을 컴퓨터가 디자인하도록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이 가진 지적자산에 대한 수요는 많은데, 정작 그 수요에 일일이 대응할 시간이 없어서 충분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낼 수 없어 아쉽다는 의미다.


쉐입 그래머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고 나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라는 말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지 모른다. 건축 분야가 창출하는 가치도 지식재산권(IP)의 세계로 옮겨가, 뛰어난 건축가가 자신의 쉐입 그래머를 소프트웨어로 변환하여 그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상공간 속 나에게 투자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제목부터 아주 도발적이다.


가상 신대륙의 시대!


제목에서 이미 어느정도 유추가 되듯, 과거에는 실제 공간에서 이루어지던 상호작용이 가상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가상 공간을 지배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급격히 성장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애플은 제조 기업이기도 하지만, 부동산 기업이기도 하다. 임차인이 건물주에게 월세를 내듯, 우리도 앱스토어에서 앱 하나 내려받을 때마다 애플에 30% 수수료를 지불한다


인터넷 세상을 가상공간으로 이해하면, 인스타그램 같은 SNS는 가상공간 속 내 방과도 같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내 방과 다른 점은, 가상공간 속 내 방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SNS에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려는 심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어딘지 씁쓸하면서도, 저자 나름의 통찰을 잘 부여주고 있는 문장이라 밑줄을 쳐 두었다.


공간을 소유하는 대신 소비하면서 나를 표현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라는 가상공간을 구축한다.
이 때 사진은 디지털 벽돌이 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세대는 물질적 소유보다는 경험을 쌓는 데 가치를 둔다. 선데이수도 그렇다. 여행을 가면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을 찾아 비싸더라도 의미있는 한 끼를 먹어보려고 한다. 중저가의 비즈니스 호텔보다는 돈을 좀 더 내고라도 그 지역만의 특색을 가진 디자인 호텔에 숙박한다. 레스토랑의 식사도, 디자인 호텔의 공간도 내 것이 아니지만,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가진 가치의 일부를 내 안에 옮겨놓았다고 느낀다.


다만 내 경우에는 자기검열이 아주 심한 편이라 내가 경험한 것을 전부 인스타그램에 공유하지는 않는다. 돈 많이 쓴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서 좀 꺼려지기도 하고, 인플루언서들처럼 사진을 무척 잘 찍는다면 모르겠는데 막상 올릴까 싶어 찾아보면 올릴만큼 괜찮은 사진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하루뿐인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열심히 찍어둔다는 점에서는 나 역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디지털 벽돌'을 쌓아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일본도 TPO에 따라서는 사진 찍으면 안 되는 곳이 있다. 공간이 비좁아서 다른 사람 얼굴이 필연적으로 같이 찍히게 되는 식당이라든가, 사진 촬영이 금지된 미술관이라든가. 가끔 주의를 받아가면서도 부득부득 찍는다. 내 심리를 가상공간과 디지털 벽돌 이라는 키워드로 풀어주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모임 안에서도 인스타를 비롯한 SNS 플랫폼과 최근의 트렌드에 특히 관심이 많은 멤버가 두 사람 있는데, 이번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그게 좀 아쉬웠다. 그 자리에 있던 멤버들은 모두 SNS를 아예 안 하거나, 또는 어쩌다 한 번 상당한 자기검열을 거친 글을 올리는 정도로 활용한다고 했다. 저자의 인사이트에 대해 한 발 떨어져서 "그런가봐요"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딘지 김이 빠진 감이 있다.



힙스터의 역설


가상공간을 특별하게 꾸민다는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힙지로가 뜨는 이유에 대해 저자가 흥미로운 분석을 해 줘서 인상깊게 읽었다. 내가 기억하는 을지로는 왠지 얼쩡거리고 싶지 않은 동네의 이미지에 멈춰있는데,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엄청 힙해졌나보다.


작년에 "나도 힙지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검색을 좀 해본 적이 있다 을지로는 좀 신기한 곳이었다. 다들 아는 가게 말고, 간판도 뭣도 없고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갈 수 있는 가게들이 찐(?)이라고 했다. 영업시간도 딱 정해져있는 게 아니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때그때 확인하고 찾아가야 한다고. 나 참,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검색 좀 더 해보다가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라고 판단하고 관뒀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힙지로의 비밀스러운 영업전략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있다고 했다.


을지로 주변에는 근처 인쇄소에서 일하시는 50대 어른들이 있다. 가게 입장에서는 그런 분들이 우리 가게에 안 오셨으면 하고 바라는 경우가 있다. '물이 나빠져서' 다른 손님을 내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힙한 가게들은 일부러 간판을 내걸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게임 같기도 하다. 우리 모임에 VR/AR을 공부하는 멤버가 있어 허구헌날 VR/AR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자꾸 듣다보니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 힙지로에 대한 설명을 읽다보면, <포켓몬고>의 플레이어들이 포켓스탑을 찾아 핸드폰을 들고 올림픽 공원에 모여드는 것과, 힙스터들이 힙한 장소를 찾아 인스타그램을 타고 힙지로에 모여드는 것이 그다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위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핀터레스트를 직접 뒤져서 인공지능과 협업을 했듯, 힙지로를 즐기는 젊은 힙스터들도 인스타그램을 직접 뒤져서 증강현실과 협업하고 있다. 아주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충분히 증강현실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느껴졌다.


킹스크로스의 9와 4분의 3 플랫폼처럼,
힙지로도 그 곳에 있지만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7년 째 일요일마다 일주일에 한 권 책을 읽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온라인 독서모임 매거진 <일요일엔 책들>, 열세 번째 포스팅입니다. 다음주는 브랜드보이 라는 필명으로 브런치에도 글을 연재하고 있는 안성은 님의 브랜드 이야기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를 읽고 나눈 이야기를 전할게요. 매거진의 다른 글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제목을 클릭!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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