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회사 근무기(1)
독일서 꿈같던 6개월 간 UN 인턴 생활이 끝나고... 대학 졸업장은 따야지 하고 돌아온 한국. 근데 나 뭐하고 싶었더라. 왜 UN 들어가고 싶었지. 돈 많이 주고 간지나니까. 근데 UN 정직원 되려면 웬만하면 박사까지 따야 되는데, 나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긴 해? 그냥 취업이나 할까? 아니 근데 취업은 왜 이렇게 어려운데... 미친 거 아님?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스펙이다 생각했는데 (오만하게 서류 정도는 프리패스라고 착각...) 면접은 커녕 서류부터 줄 탈락합니다. 높았던 콧대와 자존심은 한없이 낮아집니다. 취업이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원래 멘탈 잘 안 나가는데 불합격 통보 메일 받을 때마다 가슴은 바사삭 낙엽처럼 부서졌지요. 그러다 드디어 저를 받아주는 회사가 나타나고 여기에 목숨 걸겠다 생각하며 입사합니다.
XX 석유화학회사의 경영지원 직무(이라 쓰고 전공 무관이라 읽는다). 사범대 출신인 제가 지원할 수 있는 직무는 정말 한정적이었고, 사실 뭘 하고 싶다기 보단 일단 당시엔 취직 자체가 최종 목표였지요. (벌써 UN에서 일한 건 생각도 안남) 무슨 일을 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입사합니다. 약 2주간 그룹 계열사 전체(백화점, 면세점, 건설 등) 신입 연수원 생활이 끝나고 (아침마다 얼마나 체조를 했던지)
그룹 연수가 끝나고 석유화학회사 단독 연수가 일주일 진행됩니다. 그때였어요. 제 운명이 조금 바뀐 것은.
당시 환경안전경영팀의 팀장님과 수석님께서 신입사원들에게 대한민국 환경법 개요를 강연하는 세션이 있었습니다.
환경경영, 환경법.... 내가 대학교 때 공부했던 거잖아? UN에서도 했던 업무고.
저 팀 무조건 들어가야 된다.
강연이 끝나고 떠나는 두 분을 100m 달리기 급으로 따라잡습니다. 헉헉대며 예전에 인턴 때 쓰던 명함을 건네며 '저 XXX 한 사람인데 강연해주신 파트가 진짜 제가 하고 싶던 일이었어요. 저를 뽑아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외칩니다.
당황하신 팀장님 : '우리 팀은 화학공학 출신 아니면 잘 안 뽑고, 무엇보다 신입을 안 뽑는다'
나 : 물론 제가 신입사원이지만 환경정책 관련해서는 전공 수업도 많이 들었고, 국내외에서 인턴도 했고... (구질구질 구구절절)
팀장님 : 음... 한 번 생각해볼게. 기대는 하지 마라.
회계팀으로 배치되어 재무제표 읽는 방법, 전표 치는 방법 등을 한참 배우던 어느 날. 신입사원 입사 후 꼭 2달 후에 인사이동 발표가 납니다.
윤누리 - 환경안전경영팀 사원
전례 없는 인사이동이었습니다. 연수 때 제가 막무가내로 들이대지 않았다면 결코 없었을 결과입니다. 나중에 팀장님께 들어보니... 워낙 회사가 보수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해서 저의 돌발행동(?)은 그야말로 당돌 그 자체였답니다. 어쨌든 오매불망 바라던 팀에 (입사 전까지는 이런 팀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들어가게 되니 더욱 신이 납니다. 일도 재밌습니다.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규 정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마침 예전부터 관심 있어 공부를 했던 분야였습니다. (온실가스 배출권 관련) 더군다나 법이 막 시행된 시기라 사내에 그 분야 전문가도 딱히 없었습니다. 관련 자격증을 따고 실무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윤누리 사원은 과장처럼 일하네'라는 칭찬도 듣습니다.
어느 날 일이 터집니다. 환경부는 전체 업종에게 특정 기준으로 3년 분량의 온실가스 배출권을 나눠줬는데 석유화학 업종에 특히 부족하게 나눠준 것이죠. 배출권 구매 비용으로 인한 손실을 계산하면 무려 300억 - 600억 수준입니다. 당시 제 월급으로 따지자면 거의 꼬박 1000년 치인 어마어마한 금액이죠. (초비상 사태 ㅠ) 저희 회사뿐 아니라 다른 석유화학회사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총 16개 석유화학 회사가 협심하여 환경부 장관에게 소송을 걸기로 합의하기까지 이릅니다. 소장 작성을 위한 자료 제출은 당연히 실무자인 제가 맡습니다. 5명의 김앤장 변호사를 고용하여,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지나한 소송이 시작된 것이죠. 결과적으로 소송은 2년이 넘게 진행되었고, 석유화학회사들이 패소했습니다. 그 와중에 평생 한 번 가볼 일 없었던 법원을 몇십 번 뺀질나게 들날날락 했지요.
하지만,
표면적으로 패소했으나 당시 주장했던 부분들이 2기 정책 때 반영되었고, 추가 배출권을 받아오는 소소한 쾌거를 이뤘죠. 그 당시 생각했었습니다. '아, 그래도 대기업이라서 이렇게 한국 최고 로펌 변호사를 고용해서 장관한테 소송도 거는구나. 개인으로서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기업이라는 이름과 돈을 등에 업고 할 수 있구나.'
나름 뿌듯하고 즐겁게 다니던 대기업, 결과적으로 3년 만에 퇴사했습니다. UN 보다 재미없어서? 연봉이 적어서? 집에서 멀어서? 누구나 입에 달고 얘기하는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싫어해본 적은 또 처음이었는데요, 지구 상에 70억 인구가 있다면 단 한 명, 유일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미생에 나오는 웬만한 상사 저리 가라 하는 만행과, 하지만 덕분에 최고의 선택을 하게 된 저의 에피소드를 다음화에 소개합니다.
한 번 사는 인생, 기깔나고 간지나게 살아야지.
누구보다 찬란하고 눈부시게.
· 70억 인구 중 유일하게 싫어했던 사람, 상사 (석유화학회사 근무기)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다
· 에필로그
(부록)
· UN 붙었다고 끝이 아니다. 출국 전 준비해야 할 A to Z (피곤 주의)
· 독일에서 둥지 틀기 - 완벽한 워라밸이란 이런 것?
https://brunch.co.kr/@wine-ny/80
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전)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