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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Jul 26. 2020

욕 나오는 상사, 어디까지 만나봤니?

나는 왜 퇴사했나 - 석유화학회사 근무기(2)

새삼 대한민국 취업 관문의 빡셈을 절실히 깨닫고 힘겹게 들어간 회사. 관련 자격증도 따고 환경부 장관을 대상으로 소송도 하면서 좌충우돌 나름 뿌듯하게 다니고 있는데, 근데 상무님? 해도 해도 이건 아니잖아요?

(실화 주의, 해당 글에는 단 1의 MSG도 첨가되어 있지 않습니다)

※ 퇴사를 고민하는 많은 직장인 여러분... 이 글 읽고 '그래도 우리 상사는 이 정도는 아니니니까...' 하고 위안 받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팀장 때부터 직원들 여럿 퇴사시킨 악명 높은 A 상무. 그의 회사 사랑만큼은 정말 인정합니다. 그는 습관처럼 이렇게 얘기하곤 했어요. '나는 셰퍼트야. 멍멍 개. 회사의 개. 그러니까 자네들도 개처럼 일해' (싫은데요? ^^) 

셰퍼드는 귀엽기라도 하지...

처음부터 A가 저희 팀 직속 상무는 아니었고, 제가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상무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저를 싫어했는데, 종종 '너는 이전 상무랑만 친하지? 너 나 왕따 시키냐?'라고 하셨답니다. 허허, 상무가 사원한테 이런 얘기를요..? 안 부끄러우신가. A 상무 이야기를 하자면 3박 4일이 걸리기 때문에 대표적인 에피소드 2가지만 공개합니다.



Ep 1. 우리 아들 자소서 써와


어느 초여름, A상무가 저를 긴밀히 상무실로 부릅니다. 상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또 뭘로 꼬투리를 잡으려는 거지.

 

A상무 : 윤대리 여기 앉아봐. 내 아들이 J대 기계과인 거 알지?
나 : 네.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모름, 노관심)
A상무 : 이번에 B대학교 기계과에서 편입을 뽑는다고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자네가 우리 아들 자소서 좀 써와.


나의 내면 : 응? 응...? 응....?!!!!!!!!!! (제가 왜요?)


직접 작성하라고... 직접!!!


'아니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요즘 어떤 시대인데 아들 자소서를 써오라고? 야, 아니 것보다 J대학교랑 B대학교가 무슨 차인데' 하고 터져 나오는 외침을 가슴으로 삼키고 최대한 침착하게 답합니다.


나 : 상무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드님을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해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배경을 알지 못하고, 제가 사범대라서 공대/기계과의 자기소개서를 써본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소개서를 써드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신 두 가지를 제안드릴 수 있습니다. ① 아드님께서 자소서 초안을 작성해주시면 미약하나마 첨삭을 해드릴 수 있겠고, 지인 중 ② SKY 포함 명문대 기계과 합격 자기소개서 샘플을 모아 공유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이 정도면 예의 바르게 잘 대처했다...라고 생각하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충격적입니다.


A상무 : 아니, 그게 아니고... J대랑 B대학교 기계과 홈페이지 들어가서 입학요강 분석해서 차이점을 도출해서 써봐. 일단 아직 정확한 전형은 발표가 안되었으니까, 자기소개서 문항이 공지되면 다시 부를게. 

와놔, ㅅㅂ.....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것은 제 업무가 아닙니다. 써드릴 수 없습니다. 아드님도 성인인데 직접 쓰셔야죠. 이거 부정행위 아닙니까?'(마음의 소리)라고 돌직구를 던졌어야 했지만 (물론 지금도 저렇게 말할 깜냥은 없) '네...'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때부터 평생 연락 안 하던 친구, 과학고 다니던 동생 지인, 동아리 선배까지 인맥을 총동원해서 기계과 합격 자소서를 닥치는 대로 모았습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모은 자소서를 A 상무 메일로 보내고, 확인 부탁드린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돌아온 답변. '올해는 B 대학에서 편입을 뽑지 않는다고 하네.'

이것이 멘붕인가...



Ep 2. 나 Goja야!!!


한 번은 여수로 워크숍을 갔습니다. (여수에 공장 단지가 있습니다) A 상무는 사원 때부터 오랫동안 여수에서 일을 했습니다. A상무의 아내분도 여수에서 오래 거주하셨기에, 겸사겸사 친구들 만날 겸 워크숍 때 A상무와 함께 오셨죠. 저희끼리는 회의를 하고, 아내분은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고 계셨을 겁니다. 


회의 후 회식 자리. A상무가 자꾸 저를 포함한 직원들에게 술 사들고 자기 호텔방으로 오라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게 막 추행 이런 것은 아니었고, 아내분께 '우리 직원들이 나를 엄청 좋아해서 이렇게 술도 사들고 올 정도로 충성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너무 싫고요.
우리끼리 2차를 가도 아쉬울 판에 님 방에 술을 왜 사들고 갑니까.


회식이 끝나고 식당을 나옵니다. 여수 시내 한 복판. 다들 허허 웃기만 하고 호텔방에 간다는 직원이 없으니 A상무가 더 닦달하기 시작합니다. 나라도 실드 쳐야지... 

'상무님, 그래도 오래간만에 사모님과 여수 오셨는데 즐거운 시간 보내셔요.'

그러자 갑자기 소리치는 A 상무...

나 고ja야!!!!!!!!!!! (데시벨 조절 실패)
그런 것치곤 아들 2명 잘 순산하셨네요...

다들 깜짝 놀라서 A 상무를 쳐다봅니다. 본인 빼고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 술이 들어가서인지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외친 터라 더욱 당황. 이게 인간적으로 가능한 상황인가....? 팀장님이 '어휴 상무님, 얼른 들어가시죠' 하며 뒷수습을 하십니다. 



이 뿐 아니라 정말 천일야화 급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퇴사한다고 얘기했을 때 까지도 '부모님이랑 다 얘기된 거 맞냐고, 내가 확인 전화해볼 테니까 부모님 전화번호 적어놓고 가'(초등학생이냐...?) 라며 떼쓰신 분... 

이렇게 던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렇게 2년간 시달리며 멘탈에 굳은살이 얼마나 박혔는지. 그래도 너무 불행하잖아. 행복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이건 불행이다... 그렇게 반년 정도 조용히 퇴사를 준비합니다. 근데 퇴사하면 뭐할 건데? 동종업계로 가고 싶진 않다고.



퇴사 후 세 가지 안


1. 석사 유학 : 정식으로 UN에 도전하자. 입사하려면 석사 학위는 있어야 하니까. 회사 다니면서 야금야금 준비해서 독일 소재 환경대학원은 합격장은 퇴사 전 따냈습니다. 

합격했던 독일의 모 대학교

2. 다시 UN 인턴 : UN 근무 때 팀장님이 다시 같이 일하고 싶다고 메일이 왔네. 인턴이긴 하지만 경력 구멍 없이 감 익히고 그 이후에 석사 유학 가도 괜찮지 않을까?


★ 3. 아 몰랑 : 나 근데 진짜로 UN 가고 싶은 이유 없잖아. 꼭 가야 하는 거야?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데? 석사 유학? 공부 더 하고 싶어...?


모로 가도 독일로 가자. 대학원 합격장을 캐리어에 소중히 넣고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대학원엔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UN 인턴으로 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고 돌아 그 해 겨울,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평생 순수하게 행복한 일은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 있는 어떤 직업을 나열해도 이 일보다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우연하지만, 어쩌면 필연적으로 찾은 일. 그 에피소드를 다음 화에 공유합니다. 

 


덧) 결과적으로, 제가 퇴사한 후 A상무의 행패를 참지 못한 직원들이 10명 넘게 모여 100쪽 이상되는 탄원서를 회사 사장님과 컨플라이언스팀에 보내기 이릅니다. 그 사안이 너무나 심각하여 (제가 겪은 것은 귀여운 정도) 회사에서 김앤장 변호사를 고용하여 여러 사람의 진술을 확보하고 A상무는 결국 나가리

A상무가 없었으면 아마 전 회사를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떠날 수 있도록 큰 원동력을 주신 그분께 무한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아주 평생 은인임 ^^)


한 번 사는 인생, 기깔나고 간지나게 살아야지.
누구보다 찬란하고 눈부시게.



Upcoming.. 목차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다

· 에필로그





UN에서 일하는 가장 쉬운 방법 (이전 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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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전)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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