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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_스페인 야간비행

by 영진

89

리스본은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곳이 아주 많았어. 수많은

층위들이 있었어. 이 때문에 예상치 못한 풍경들이

나와. 그런 도시에서는 수많은 관점을 포용하기가

우리보다는 더 수월할 거야. 리스본을 걸으면서

나는 올해의 유행 상품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어느 기업이 가장 크고 돈이 많은 곳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웠어. 뭔가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지배적이다, 압도적이다, 라는 느낌을 덜 받았어.

이런 곳에서라면 다른 무엇과 내 것을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43]



90

나는 그날 일몰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어. 그리고

앞으로도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바로 그렇게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존재해(물론

어려운 문제는 있어.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품고

있는 세상은 어떻게든 다르게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주 골치 아픈 문제야).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43]



91

주어진 것들을 소박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주는

마음의 평화가 있지? 포르투에 머물 때 내가 여러

차례 그 앞을 지나갔던 바다를 향해 있던

야외 카페가 기억나. 모두들 휴대전화 따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

아름다운 뒷모습들이었어. 그런 모습은 그 사람들을

보게 만들지 않아. 대신 그의 자리에 앉아서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싶게 만들어. 잠시나마 ‘나’로부터

벗어난 모습들은 그토록 다정하더구나.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54]



92

토니 모리슨은 나무들처럼 여러 가지 감정의 색을

입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버리라고 말했어.

작고 성급한 감정들을 믿지 말라고. 큰 감정을

따르라고. 보다 큰 감정, 보다 차원 높은 감정을

따르라고. 사실 너도 나도 잘 알고 있지?

“나는 외로워” “나는 혼자야” “나는 하찮아”

“나는 못해” “나만 불행해” “너는 행복하잖아”

같은 작은 감정들로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60]



93

고요 속에서 삶을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란 것이 있더구나.

단,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 돌아볼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될 거야.

그 경험 속에서 뭔가를 다시 한번 선택할 거야.

그 고요와 침묵의 공간은 나에게 바로 그것을−

돌아보고 다시 경험하기를, 변하기를, 새롭게

만들기를−촉구했어.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61]



94

눈을 감았다 떠도 달은 변함없이 떠 있었어.

가장 좋은 것은 늘 항상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떠 있었어. 가장 좋은 것은 변한 것처럼 보여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떠 있었어.

가장 좋은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떠

있었어. 선택했기 때문에 길은 우리 눈에서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고개를 돌리면 우리가 사랑하는 얼굴들이

같이 걷는 것을 보게 될 거야.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61]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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