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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un 28. 2023

‘친구같은 아빠’라는 판타지

썬데이 파더스 클럽 (14)

큰애가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가만, 얘가 언제 이렇게 길어졌지?


아이 키가 많이 컸다. 언뜻 청년 티가 나 보여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그래도 아직 애기애기하던 귀여운 모습이 남아 있다. 혹시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미 다 큰 애로 보이려나? 알 듯 말 듯한 모호함이 그저 아빠라서 느끼는, 고슴도치 부모 같은 심정 때문은 아닌지 슬쩍 헷갈린다.


아이의 성장 단계를 측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키나 몸무게와 같이 신체 발육상태를 볼 수도 있고, 국어나 수학 같은 과목들의 학습 수준을 보고 파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십여 년을 함께 복닥복닥 살아오다 보니,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건 아이가 마음을 쓰는 대상의 변화였다.


뽀로로와 로보카 폴리, 슈퍼윙스를 안고 자던 때는 고생대쯤 될까. 이미 아득히 먼 기억이다. 공룡에 미쳐 매일같이 잠들기 전 안킬로사우르스, 오비랍토르, 트로오돈 같이 생소한 공룡 이름을 같이 맞추고 놀던 다섯 살 무렵은 중생대쯤 되겠다. 유치원 때는 헬로카봇과 미니특공대로 대표되는 수많은 변신 로봇류와 사랑에 빠지는 듯하더니 그것도 잠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쥐라기 정도?)


초등학생이 되고 얼마 후부터 아이는 매일같이 포켓몬 도감을 보며 포켓몬들을 타입별로 외우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들어오는 집 앞 편의점 배송차량 도착 시간에 맞춰 아이는 편의점 문 앞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 포켓몬 빵을 샀다. 마트에 가면 장난감 코너 옆에 있는 포켓몬 가오레 게임기 앞에 앉아 마치 자기가 포켓몬 속 주인공 ‘지우’라도 된 마냥 배틀에 심취했다. 포켓몬 키드 아들을 둔 죄(?)로 부모들은 같이 옆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긴 줄을 서야 했다.


포켓몬에서 끝이겠거니… 했는데, 심심한 걸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라 하는 이 아이에게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다. 그런데 이번 대상을 보니 아이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 아들이 벌써 이 정도 나이가 된 건가…?


수현이는 요즘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빠져 있다. 새로운 관심사로 빠져들고 있음을 측정하는 인간 지표는 ‘아빠, ㅇㅇㅇ 이름 맞추기 놀이하자’라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건데, 그 ‘ㅇㅇㅇ’ 속에 어느새 원피스 캐릭터들이 자리 잡았다. 루피, 조로, 상디, 나미, 우솝, 초파, 니코로빈, 프랑키… 예전과 다른 건, 이번엔 내가 아이만큼, 아니 어쩌면 아이보다 더 신이 났다는 점이다. 아들과 같이 원피스 이야길 나누는 날이 오다니. 그렇게 야구장에 가도 축구장에 가도 시큰둥하던 아들과 드디어 통하는 게 생겼다…!


살아오면서 꽤 많은 만화를 봐왔지만, 원피스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내 ‘인생 만화’였다. 어린 시절 철 모르고 봤을 때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회사생활을 하며 봤을 때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었던 콘텐츠였다. 해적왕이 되고자 하는 주인공 루피가 하나하나 동료들을 규합해 나가며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스토리는 새롭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보여주는 성공 신화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으니까.


아이가 원피스를 접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제 아빠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기념으로 사 왔다가 까맣게 잊고 집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먼지투성이의 고잉메리호 프라모델 상자를 어느 날 아이가 꺼내 조립한 것.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프라모델을 그저 조금 세밀한 장난감인줄 알고 갖고 놀던 아이는 자신이 완성한 배가 만화 속에 나오는 범선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한 회 두 회 애니메이션을 보다 그만 푹 빠져버렸다. 아이는 심심하다 싶으면 굴러다니는 A4 종이들을 이리저리 접고 테이프로 붙여 원피스 속 검객 캐릭터 조로가 사용하는 검을 만들고, 엄마의 챙 넓은 모자와 빨간 후드티를 삐딱하게 걸친 채 루피 흉내를 낸다.


원피스 키드로 진화(?)하고 난 아이와는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빠가 자기와 급(!)이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포켓몬 때와는 달리 원피스 캐릭터들의 역사와 이력을 줄줄 꿰고 있는 걸 알고 놀라던 아이는 이제 아빠가 일하러 나간 사이 원피스 최신호(이 글을 쓰는 현재 가장 최근 단행본은 105권이다)를 먼저 보고 퇴근한 아빠에게 스포일러를 마구 살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원피스 105권 '루피의 꿈'


갓난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되어줘야지.’ 아마도 야구 모자를 눌러쓴 아이와 잔디밭에서 하하하 웃으며 서로 캐치볼 하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아무런 육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떠올리는 ‘좋은 아빠’의 이미지란 대체로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날의 그 바람이 현실에서 이뤄진 날이 대체 며칠이나 될까. 육아를 하다 보니 상상했던 것처럼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어릴 때는 분유 먹이고 기저귀 채우고 유모차 태우고 하느라 그저 정신없었다. 조금 커서 학교를 가고 대화가 통할 정도가 되니 밥 먹었니 숙제했니 TV 너무 많이 보면 안 된다 게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잔소리만 주구장창 해대는 것 같다. 친구 같은 아빠는커녕, 아이가 어디 안보는 데서 꼰대라고 부르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렇다고 아이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그저 아이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는 없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가 더 많다.


주말을 맞아 아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원피스를 본다. 오랜만에 보니 바삐 사느라 그간 까맣게 잊었던 루피 일행의 모험이 다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이도 원피스를 보며 함께 고락을 같이 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큰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아들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이 순간이 그저 행복하다. 와 진짜 재밌다. 하나만 더 볼까? 이렇게 서로 키득키득 맞장구를 치는 지금 이 순간.


태양계 행성들의 공전 주기는 서로 모두 제각각이라서, 태양을 기점으로 나란히 일직선상에 서는 것은 기껏해야 수십 년에 한 번 정도라고 한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모두 다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아이도 마찬가지일 테다. 서로 다른 궤도를 가진 행성들이 잠시 교차하는 것처럼 원피스 같은 경험은 아들과 나 사이에 앞으로도 많진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H2’와 ‘슬램덩크’, ‘하이큐’와 ‘중쇄를 찍자’를 아이가 나만큼 좋아할 만한 확률은 아마도 내가 공룡과 레고와 ‘신비아파트’를 좋아할 만큼의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찰나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한껏 즐기려 한다.


‘친구를 못 믿으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대체 어딨는 건데! 믿으라고!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했도 겉모습이 변했다고 해도 같은 깃발아래 똘똘 뭉쳤던 친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냐? 깃발의 색깔은 퇴색했어도 우정은 영원하니까!’

- 원피스 141화 ‘무지개 안개 전설 편’ 中


친구를 정의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나는 요즘 매일같이 좋은 친구를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아빠, 이번 주에 나 원피스 안 보고 있어. 왜 그런 줄 알아?”

“왜?”

“아빠 일하는 동안 내가 먼저 보면 아빠 김새잖아. 내가 맞춰 줘야지”

“…! (살짝 심쿵)”


시간이 흐르면 (아직은) 작은 이 친구도 언젠가 또 다른 관심사를 찾아 훌쩍 새로운 모험을 떠나겠지. 그래도 원피스가 완결되기까지는 아직 몇 년 더 남았으니 그때까지라도 이 관계를 잘 유지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원피스 엔딩은 아마 둘이 비슷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입장에서 한화 이글스의 우승을 기다리지는 못할지라도.



#썬데이파더스클럽





정민@jm.bae.20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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