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는 1929년에 처음 출판된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과 픽션’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여성의 창조력을 구속하는 제약을 표현한 말로, 문학을 생산하는 여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문학을 수용하는 사회 환경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했다. 비단 문학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로를 위해서도 ‘자기만의 방’은 필요하다. 물리적, 시간적, 감정적인 공간으로서의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가 처음 ‘자기만의 방’을 얘기한 때로부터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자기만의 방’은 여전히 모두에게 그냥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 살게 되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에 더 불리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평론가인 애너벨 크랩 Annabel Crabb은 그녀의 책 <아내 가뭄 The Wife Drought>에서 '아내'는 직업적 자산이자 경제적 특혜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내’는 시간제 근무를 하거나 일을 안 하면서 집안일을 책임지는 배우자로,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남자는 아내가 있지만 여자는 아내가 없다.” “여자들이 집안일을 다 떠맡고 남성은 그러지 않으려는 경향”이 오스트레일리아 일터가 돌아가는 현실이라고 한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의 현실도 못지않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라는 말은 듣기에 왠지 자연스럽지만, ‘미국 유학생 남편’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리서치를 통해 만난 ‘미국 유학생 와이프’ 들은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자신이 가사를 전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도 한때 일을 하며 일과 삶의 균형과 가사 분담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 사는 지금은 밖에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사와 육아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진로를 준비하는 경우, 자신의 몫으로 당연시 되는 가사와 육아를 나누고 덜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가족으로 인해 더 쉽지 않은 시간, 배우자, 자신의 부모∙형제∙자매와 배우자의 부모 사이에서 ‘자기만의 방’을 찾기 위해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배우자/이성친구를 위한 해외 이주에 앞서 보다 일찍 자신의 진로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부가 해외 이주를 계획하며 서로를 동등하게 고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부가 해외 체류 중 서로의 진로 계획을 감안해 가사와 육아를 효율적으로 분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을 쉬는 동안 가족들이 자신으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진로 계획을 가족들이 이해하고 인정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을 쉬는 사람에게 가족들이 지지 시스템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해, 일을 쉬는 기간, 진로가 불확실한 동안에 가족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에 대해 행동지침과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가족으로 살면서 또 나로 살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 출신의 미국 유학생 부부들에 대해 연구한 주디스 마이어스-월스 교수 등의 논문에서는 미국 유학생과 와이프가 겪는 스트레스의 구체적인 상황이 나온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한 한국인 유학생 와이프는 결혼 생활의 스트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남편은 식사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집에 왔을 때 식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저를 탓해요. 솔직히, 남편이 퇴근 후 아이를 봐주면 그 시간 동안 저도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데, 남편은 집에 와서 자요. 그리고 식사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제가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My husband thinks the meal is very important, so when he comes back from work and if there is no meal, he blames me. Frankly, if he would watch the child when he comes back from work, I could cook during that time, but he falls asleep and thinks that the meal has to be ready... He thinks that I'm not doing anything at home.)” 해외에 있고 결혼을 했고 부부끼리만 있고 배우자는 공부를 하고 경제적 여유가 없고 자신의 진로는 불확실하면 관계는 적나라해지고 약자는 더욱 약해진다.
‘주도권’은 주동적인 위치에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당연한 권리로 보이나, 이런 상황에서 '미국 유학생 와이프'가 자기의 주도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연세대학교 정보산업공학과의 임춘성 교수는 그의 책 <거리두기 - 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에서 공학자의 관점에서 보는 관계에 대해 설명하며, 나와 사람들 사이에 반응을 선택할 힘과 자유가 있는 '사이의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그 사이에 관계를 지탱하는 상세한 룰이 작용해야 한다고, 그 룰을 상대방이 정하게 두지 말고 스스로 룰 메이커가 되라고 조언한다. 잘 하겠다고 맹세하는 상대는 믿더라도, 잘하겠다는 말 자체는 믿지 말라고도 덧붙인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도 가능한 초기부터, 아니 출발하기 전부터 어떻게 살지에 대해 함께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같이 살지만 동시에 나는 주도적으로 어떻게 살지, 이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고 서로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의논하고 합의해야 한다.
인터뷰를 통해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를 만나며 자신을 둘러싼 가족, 친척, 친구 등과의 관계를 준비해 간 템플릿에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표시된 세 겹의 원에 가깝게 느끼는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해서 표시했을 때, 남편 또는 남편∙자녀만 가장 가까운 원에 표시한 사람들도 있었고, 남편∙자녀와 함께 자신의 부모∙형제∙자매를 같이 표시한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에 일상생활을 나누고 고민을 상담하고 의논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고민이 깊어지고 불안하고 어느 길이 맞는지 혼란스러운 순간에 함께 의견을 나누고 위로해주고 감정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이 첫 번째 원의 사람들이었다.
미소씨에게는 ‘해결사’로 불리는 언니가 있다. “제가 언니한테 의지를 많이 하거든요. 저희 언니가 약간 ‘해결사’? 그래서 고민 있을 때 항상 언니한테 먼저 물어보는데, 쉬는 시간에 대해서, 제가 불안해서, 나 회사 그만둬도 될까 그러면, 언니가 “그만둬” 되게 명확하게. 내가 “나중에 아무것도 안되면 어떡해?” 그러면 “뭐라도 하면 돼. 나중에 학원을 차려도 되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해요. 닥쳐서 고민하라고, 뭘 미리 고민하냐고.” 전공을 바꾼 혜원 씨에게는 남편의 격려가 있었다. “지금 학점도 중요하지만 이건 시험을 치더라도 계속 알고 있어야 되는 거고, 혹시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두더라도 지금 배우는 게 헛되지 않을 거라고 항상 얘기해줘요. 그럴 때마다 조금씩 부담감이 덜어지긴 해요. 사실 새로운 걸 시작해서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두려움이긴 해요. 왜냐하면 새로운 도전을 해서 그걸 이루지 못한 거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그렇게 얘기해줄 때마다 마음이 편해져요. 내가 이게 안 맞으면 이걸 끝까지 끌고 갈 필요는 없겠구나 생각해요.”
부부와 가족을 넘어 나를 위한 팀이 필요하다. 거리와 상관없이 시차와 관계없이 귀 기울이고 도와줄 수 있는 팀워크가 있으면 덜 불안하고 덜 흔들린다. 힘든 시간을 통해 진짜 친구를 알게 되는 것처럼, 힘들고 불확실한 시간을 통해 얻은 좋은 팀은 긴 시간 나에게 소속감을 주고 함께 가는 내 편이 된다.
부부 혹은 커플이 서로를 고려한 대책과 계획을 세우려면 서로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함께 눈을 맞추고 의논해야 한다. 애너벨 크랩 Annabel Crabb은 그녀의 책 <아내 가뭄 The Wife Drought>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 당수 크리스틴 밀른이 정치가의 길을 고민하는 여성에게 했던 직설적인 조언을 소개한다. “피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두 눈 똑바로 뜨고 들어오세요. 그리고 자신의 정치 활동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정치계에서 얼마 동안 몸담을 건지, 어떤 역할을 맡을 건지, 어느 정도의 책임을 맡고 싶은지? 그리고 이 일을 하기에 최적기인지, 교제 중인 사람이나 가족에게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지지는 받았는지? 이것들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여자들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정치가 아닌 ‘미국 유학생 와이프’의 삶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갖기 위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화해야 한다.
나의 동료였던 스페인 출신 친구가 최근 미국으로 이사했다. 암스테르담에 있던 남자 친구가 보스턴으로 발령이 나면서 바르셀로나에 일하며 장거리 연애를 하던 내 친구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자이너인 둘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워크샵을 계획했다. 서로의 필요와 의견을 조율하고 결정하기 위해 두 명은 금요일 저녁에 만났다. 둘 다 멋진 옷을 입고, 남자 친구는 맛있는 저녁과 와인을 준비했고, 내 친구는 워크샵을 위한 도구들을 준비했다. 한 테이블에 앉아 워크샵을 시작하며 서로에 대해 좋아하는 것들을 다섯 가지씩 얘기했다. 각자에게 중요한 우선순위에 대해서도 나눴다. 예를 들어, 내 친구는 가족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원했다. 그러고 나서 같이 터놓고 의논했다. 보스턴에 갈지 말지가 아니라, 함께 보스턴으로 간다면 어떤 상황이 최선일지. 그리고 의논한 내용에 따라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보여주는 로드맵을 짰다.
서로를 위해 최선의 팀이 되고자 한다면 인생을 같이 사는 한 팀의 팀원으로서 함께 테이블에 앉길 권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펼쳐 놓고 조율하고 협의해야 한다. 불안한 시기를 지나가는 동안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할 금기어도 미리 정해두는 것이 좋다. 가사와 육아 분담 역시 서로의 계획을 위해 각자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찾아야 한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서의 희생이나 '아내'의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남편들이 있어 가사와 육아 분담이 어렵다는 얘기도 듣는다. 그런 경우, <아내 가뭄 The Wife Drought>에 나오는 질문처럼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만약 서로 역할이 바뀐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 그랬듯 당신도 나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나라에 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어?”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여러분은 집에서 자신만의 방을 얻어냈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방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그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으니까요. 가구를 갖춰야 하고, 방을 꾸며야 하고, 나누어 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가구를 어떻게 들여놓고 어떻게 장식할 건가요? 여러분은 누구와 어떤 조건으로 방을 나누어 쓸 것인가요? 이것은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건축에는 설계도가 있고 디자인에는 스케치가 있다. 머리 속의 아이디어를 최선의 공간과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 형태와 구조를 만들고 더 나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다듬는다. 의논한 계획에 대해 두 사람이 같은 그림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 그림 안에 ‘자기만의 방’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계획을 시각화한 로드맵이 도움이 된다. 내 계획이 명쾌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실하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이해시킬 수 있다. 모든 계획들을 한자리에 펼쳐 놓고 종류별로 카테고리를 나누고 시간에 따라 순서를 배치해, 나와 우리의 생각을 보여주는 큰 그림을 만들고, 함께 세운 계획 안에서 나를 위한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다. 의사소통을 위해 단계 별로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진학과 취업을 걱정하고 임신을 재촉하는 가족들에게는 부부가 한 팀으로서 함께 정한 계획이 있고 그에 따라 각자 열심히 살고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은 이미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 살아온 사람들이 겪었던 이슈들과 뒤늦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매번 겪어온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구성한 지침과 아이디어다. 그러나 이는 참고사항일 뿐, 내 앞에 놓인 시간은 나만의 상황과 기대를 바탕으로 내가 직접 준비해야 한다.
제안했던 아이디어들을 사람들이 해외생활을 준비하며 공통적으로 겪는 단계인 ‘준비’, ‘해외생활 시작’, ‘일상생활 안정 및 진로 목표∙계획 설정 또는 조정’, ‘계획 실행’에 따라 배치하면 위의 그림과 같다. 내가 혼자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배우자와 함께 팀으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또, 그 단계에 이르러서 혹은 여유를 갖고 나중에 생각해도 좋을 일들이 있지만, 내 앞에 예정된 미지의 세계를 파악하고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보다 일찍 시작하고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일본을 구할 기업가 베스트 10’에 선정된 사토 가츠아키는 그의 책 <내가 미래를 앞서가는 이유>에서 말한다.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예측을 포기하고 변화에 바로바로 대응한다.’는 것이 언뜻 보기엔 합리적으로 보였던 전략이지만, 이젠 전략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일수록 사회 전체의 패턴을 파악하여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선점하는 기업과 개인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변화를 겪은 후 그때그때 마련하는 대안은 너무 늦다. 정신적으로도 가장 힘든 길이고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선택지도 줄어든다. 오히려 미래를 예측하고 앞질러 계획하고 준비해야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지켜갈 수 있다. 내가 동의해서 시작하는 해외 이주와 갭이어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처럼 불안과 암흑의 시간을 거칠 것인지, 아니면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여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차이의 시작은 여기부터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3.1. 준비와 실행
3.2. 진로
3.3. 가족
3.4. 주위 사람들
3.4.2. 편견과 나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4.5. 가족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터뷰 참가자들의 이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대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