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길모어 걸스 Gilmore Girls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16살에 딸을 낳아 키워 온 로렐라이와 어느덧 16살이 된 딸 로리가 친구처럼 살며 성장하는 얘기를 보여준다. 2000~2007년에 방송되었다가, 거의 10년 만인 2016년에 Gilmore Girls: A Year in the Life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볼 때 대학생이던 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삶을 보여준 로리의 이야기에 공감했는데, 미국에 와서 넷플릭스를 통해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로렐라이의 이야기에 더 공감하게 됐다. 그리고 예전에는 무심하게 넘겨버렸던 드라마 속 사소한 내용들을 이제야 하나하나 이해하고 즐거워한다. 예를 들어, 시즌1에서 고등학생 로리가 시험날 늦잠을 자고 교외의 집에서 정신없이 차를 몰고 산길을 지나 다운타운의 학교로 가는 중에 산길에서 사슴이 튀어나와 차에 부딪치고 사라지는 장면. 싱가포르의 Botanic Garden이 State Park이나 National Park란 이름으로 도처에 널린 미국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장면이다. 이곳에선 자동차를 타고 가다 길 옆에서 사슴을 발견하기도 하고 찻길을 정신없이 가로지르는 아찔한 청설모는 차를 타고 가며 꽤 자주 만난다.
이 드라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동적으로 떠올릴 오프닝 송이 있다.
If you're out on the road 네가 길을 벗어나
Feeling lonely, and so cold 외롭고 정말 추울 때
All you have to do is call my name 네가 해야 할 일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And I'll be there on the next train 그럼 내가 다음 열차에 있을게
Where you lead, I will follow 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게
Anywhere that you tell me to 어디든 네가 말하면
If you need, you need me to be with you 네가 나와 함께 있어야 하면
I will follow where you lead 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게
오프닝송의 ‘나 I’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진로일 수도 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일이 생각났다. 익숙했던 길을 벗어난 나, 외롭고 낯선 환경, 삶과 경력이 초기화된 느낌. 자신의 진로가 흔들릴 때 모든 사람의 낙폭이 같지는 않다. 어쩌면 나는 특히 더 많이 흔들리고 고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 리서치에서는 극단적인 사람들 extreme users을 눈여겨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직업에 꽤 완성도를 추구한 사람 중의 하나다. 간호학과 디자인이라는 두 개의 다른 전공을 공부하고 헬스케어 분야에 특화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두 전공을 통합하기 위해 애써왔고 박사를 마친 후의 일은 그 통합의 실행 같았다. 그리고 제품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제조사인 대기업에서 의료기기를 위한 디자이너로 일하다, 서비스 경험 중심으로 병원, 정부기관, 제조사, 제약사 등의 다양한 클라이언트들과 일하는 헬스케어 전문의 디자인 컨설턴시로 옮겨갔다. 헬스케어에서 제품과 서비스 경험의 통합, 너무나 균형 잡힌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과 가정의 갈림길에서 가정을 택해 미국에 온 이후 예상치 못하던 제약을 겪게 된 작년 여름 이후, 이 모든 게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의 완성도’ 이전에 ‘언제 어디서든 일과 가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삶’이 중요함을 알게 됐다.
그동안 연재했던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는 디자인 리서치 보고서이면서 동시에 내 성찰록이기도 하다. 일이 거주의 이유였던 싱가포르에서 가정이 거주의 이유인 미국으로 옮겨온 후 내가 오롯이 채워야 하는 시간들을 살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주위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만난 상황이 하나의 프로젝트로 다가왔다. 직전에 싱가포르 정부기관과 1년 간 진행했던 사회복지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치매 엄마와 뇌성마비 아들처럼 질병이 있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 중 대표적인 열 명의 가족 caregiver들과 그들의 다른 가족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집, 학교, 병원, 사회복지센터 등을 따라다니며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 서비스와 정책을 제안했다.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삶이었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 역시 살다 보면 어느 날 만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의 미래다. 그러나 이 길에는 환상과 오해와 편견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러워요, 좋겠어요’는 이 시간의 밝은 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밝음 뒤에는 어두움이 있고 자유 뒤에는 불확실성이 있다. 새로운 진로를 찾기 위한 직장인들의 갭이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해외이주 역시 비슷하다. 멋진 기회인지 잘못 선택한 실수인지는 나중에 결과가 말해준다.
예상하지 못했던 불안의 시간을 거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눈 앞에는 넓은 하늘이 펼쳐지고 경비행기가 그림처럼 지나가고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다채롭게 들려도 내 머리 속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혼란의 시간을 거치고 생각의 부유물들이 가라앉으면서 차차 알 수 있었다. 내 안에 무엇이 남았는지, 나는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인생의 묘미는 뭔가 일이 벌어지는 데 있으며, 그러고 나면 예전과는 다른 삶이 전개되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된 덕분에 공부보다는 소설 쪽에 걸맞은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너무나 확고해 보였던 하나의 길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시간을 통해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 단 하나 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내가 해온 일의 틀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틀을 넓혀야 하는 것임을 배우고 있다.
길모어 걸스에서 로렐라이는 로리의 친구인 레인에게 고민상담을 해주며 다음과 말한다. "Everybody screws up. That’s what happens. It’s what you do with the screw’s. It’s how you handle the experience. That’s what you should judge yourself by. I have a great life and an amazing kid, and I took a detour. I ended up someplace good." 모든 사람들이 일을 망치지만, 망친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가는지로 자신을 판단해야 한다는 조언. 16살에 임신했던 자신은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그 길을 통해 좋은 곳에 도착했다는 얘기. 잘 가꿔온 커리어든 벗어나고 싶었던 일이든 익숙한 길을 벗어나 만나게 되는 '이상한 나라'는 결국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떠나온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아니라 지금부터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는 지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만이 이상한 나라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길게 일해야 하는 시대에 다들 한두 번쯤 어디선가 자신만의 '이상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 지금 혹은 언젠가 '이상한 나라'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나와 내 주위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의 경험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3.1. 준비와 실행
3.2. 진로
3.3. 가족
3.4. 주위 사람들
3.4.2. 편견과 나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