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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서태지 14- 반전反戰/反轉의 서태지

서태지라는 사람 205

by 지현

세상에 불의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을 때 현실을 피하고 싶다. 서태지고 뭐고 글도 안 쓰고 소셜미디어도 접속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싶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가자 지역 인종학살이 해를 넘어 이어지고 있고 명백한 불의에 반항하는 목소리도 높아지지만 현실의 벽이 견고하다. 전쟁범죄자들이 도배되는 미디어를 맘편히 볼 수 없어 피하고 있던 상황에 '내 오랜' 서태지가 한 오래된 용감한 행동이 문득 생각났다.


2003년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었다. 누가 봐도 자원 확보가 목적인데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는 명분아래 정당성 없이 침략을 감행했고 미국의 제국주의 속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롭게 분노가 뻗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국에 있었다면 친구들도 있고 아는 조직도 있고 같이 화를 내고 행동을 하고... 적어도 욕을 같이 할 사람이 주위에 있었을 텐데 해외동포로서 큰 아이가 2살인 상황에서는 공분할 인적 네트워크가 주위에도 없었다. 얌전하게 한인교회 다니던 아줌마였는데 역시 교회 가려고 운전하다가 지나가던 포스터에서 이라크전 반대 시위가 1시에 시내에서 열린다는 광고를 흘끗 보고는 마음에 물결이 일었다. 2살짜리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12시 30분에 교회에서 점심봉사를 하다 말고 시내에 가는 버스를 타러 빠져 나갔다. 그게 외국에서 살면서 처음 참여한 시위가 되었다. 시내가 워낙 멀어 도착해 보니 이미 행렬은 자리를 떠났고 시위 관련 용품을 파는 노점과 젊디 젊은 문화패들이 남아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구호도 좀 외쳐보고 No War가 갖가지 디자인으로 새겨진 뱃지도 샀다. 성스럽게 보수적인 한인교회에서 미소를 짓고 밥을 푸고 있다가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전쟁을 반대 구호라도 따라 외치니 내가 다시 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안다. 내 구호는 이라크전을 종결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그날만큼은 참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고 반전시위에 인원수를 보탰다. 가끔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호주 동포로서도 가정의 주부로서도 아니고 인류Human Mankind의 일원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서태지도 그렇게 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야만적인 폭거로 규정, 명분 없는 전쟁 반대,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 철회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으며 총 70여 명의 솔로가수와 그룹이 성명에 참여할 때 그도 함께였다. (출처 : 여성신문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850) 성명을 주도했던 건 신해철이었고 신성우, 이상은, 이현우, 디바, 베이비복스, 신화의 김동완, 봄여름가을겨울, 자두, 체리필터, 황신혜밴드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함께 모였지만 원타임의 성백경이 대리 낭독한 것은 서태지의 이라크 파병 반대 성명서였다.


서태지의 파병 반대 성명서 (전문)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이미 6.25 전쟁을 통해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과 살아도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수백만의 이산가족의 비극과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전세적인 반전여론 앞에서도 평화 및 외교적 해결을 버리고 행해진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는 이라크전쟁은 전인류에게 인간다움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도 수없이 많은 민간인과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미국행정부에게 죄 없는 이라크의 많은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부시 미국행정부는 즉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여 이라크국민들이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 60억 인구에게 정의에 대한 믿음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부시미국행정부의 이라크침공을 반대하며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세계인들의 행렬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부끄러운 전장앞에 대한민국 젊은이의 파병을 반대합니다.

특정국가의 자국이기주의가 빚어낸 침략전쟁에서 대다수 국민의 여론과는 반대되는 한국정부의 파병계획에 반대합니다.

대한민국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여 정부는 더 이상 국익을 명분으로 이라크전에 대한 굴종적인 지지를 통해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단 한 사람의 대한민국 젊은이도 당당하지 못한 외교의 희생물로 내몰아서는 안될 것이며 2002 월드컵 당시 세계에 널리 보여준 우리 민족의 저력이 강대국의 침략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라는 부끄러운 현실로 가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지지 및 이라크 전쟁파병계획을 즉시 철회하기를 촉구합니다.

저는 한국 대중음악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라크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며, 반전평화운동을 펼치는 문화인의 대열에 서서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https://www.seotaiji-archive.com/xe/taijimania_memorial/358745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오랜 은퇴생활 끝내고 팬들과만 소통하고 '서태지 죽이기'놀이하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며 웬만한 일에는 입을 여는 법이 없는 그였기에 이 성명서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갑분 성명?'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음악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외적으로 의견을 내지도 않았고 시사 문제에 발언한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시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어찌 보면 상당히 정치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팬사이트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반전 서태지 면모라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만 팬들은 이미 10년 전 1994년에 발해를 꿈꾸며 노래로 반전과 평화 메시지를 전달했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돌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했다. 비활동기라 얼굴도 보지 못하지만 서태지가 우리의 같은 절망을 느낀다는 신호에 우리는 상당히 동질감을 느끼며 행복해했다.


그는 병역 대상자의 수가 넘쳐 군대를 가지 않은 행운의 x세대지만 군필 팬들의 충성 경례에 멋지게 거수로 필승을 외칠 줄 안다. 소중한 것을 지키며 원칙에 따라 사는 군인들에 대한 존중과 아낌이 없으면 사실 나올 수 없는 것이 '단 한 사람의 대한민국 젊은이도 당당하지 못한 외교의 희생물로 내 몰아서' 는 안될 것이라는 저 문장이다. 22세에 발해를 꿈꾸며 함께할 평화와 미래를 그려보자고 외친 것도 젊은이들에게 주는 제안이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오랜동안.


서태지와 아이들(Seotaiji and Boys) - 발해를 꿈꾸며(Dreaming of Bal-Hae) M/V

https://youtu.be/7kr1IXHMUrc


53세인 서태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제노사이드가 횡행하는 이 지구 위의 어느 한 도시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한 시위에 하루쯤 동참하지는 않았을까. 반전反戰의 서태지, 반전反轉의 서태지가 새삼 그리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2025년의 하루가 간다.





아무튼 서태지-서태지는 왜 10집을 내지 않는가

1부: 8집 수록곡으로 본 서태지의 음악

102: 서태지의 자연사랑과 방랑벽 - 프리스타일, 모아이, 숲속의 파이터

103: 서태지의 반항과 비판의식 - 교실이데아, 틱탁, 시대유감

104: 서태지의 고유성, 지키기 위한 싸움 - 레플리카, 수시아

105: 서태지의 플라토닉 러브 - 줄리엣, 10월 4일, 영원

106: 서태지의 이성애적 사랑 - 버뮤다[트라이앵글]

107: 서태지의 본업, 기계취미 - 휴먼드림, 로보트

108: 서태지의 절망, 고독, 비탄 - 코마, Take 3, Zero


2부: 서태지 이야기

201: 그가 이룬 것은...

202: 지극히 사적인,

203: 페미니스트 서태지

204: 세계속의 서태지(?)

205: 반전의 서태지


3부: 서태지 팬 이야기


301: 서태지와 응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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