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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onuk song Sep 29. 2015

2. 종을 뛰어 넘은 표범의 사랑과 훔친 머리카락

독일아내와 한국남편의 한국 생활기

2004년, 군 제대를 하고 3학년으로 복학해서 취업 준비를 시작하던 철없는 시절에 어쭙잖은 영어와 급수도 없는 어정쩡한 중국어 외에는 스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전공이었던 포르투갈어도 학점은 그럭저럭 받았지만 그 나라 가서 뒹굴지 않은 한 외국어를 잘 하기는 힘들었다. 미리미리 준비한 생각 있는 친구들은 한 번씩 다 한다는 인턴을 한 것도 아니고, 영어를 기똥차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전공도  학점뿐이었지 말은 제대로 한다고 하는 수준이 못 되었다. 한 마디로 사회로 나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제대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예비역 육군 병장 복학생의 근거 없는 자신감만  충만했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무엇을 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지를  먼저 생각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 나이에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가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임을 알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공사 또는 대기업 입사를 위해 취업 준비를 했다. 특별한 스펙이랄 것이 없었던 나는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뭔가로 차별화를 해야 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전공인 포르투갈어를 잘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 나이 스물여섯에 36시간에 걸쳐 지구 반대쪽 브라질로 포르투갈어 어학연수 떠나게 되었다.


내가 1년 동안 공부하기로 한 곳은 꾸리찌바(Curitiba)라는 브라질에서는 비교적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도시 중 한 곳이었다. 이명박이 서울 시장 시절 이 곳의 버스 시스템을 벤치 마킹하여 서울의 버스 차선을 도로 한 가운데 옮긴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브라질은 축구만 잘하고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거대한 아마존만 있는 나라가 아니다.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며, 소형 비행기 생산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인 만큼 제조업이 매우 발달한 나라이다. 다만 한국에서 멀고 가기 힘들어 관심은 있지만 쉽게 가지 못할 뿐이다.


브라질에는 많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고 또한 많은 외대 학생들이 브라질 여러 도시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꾸리찌바에도 몇 명이 있었고, 먼저 와있던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구하고 어학코스를 등록했다. 실력이 비슷한 대여섯 명이 같이 갔기 때문에 같이 간 한국 학생만 잔뜩 있는 반에 들어갈 수도 있어서, 반편성 인터뷰를 따로 준비 했고, 조금 무리지만 나 혼자 중급반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정을 받은 반에는 브라질 남자와 결혼한 이란 출생의 예쁜 미국 아가씨, 여유가 철철 넘치는 은행원으로 은퇴한 네덜란드 노신사, 철없는 한국 대학생 그리고 NGO 비영리단체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는 파란 눈의 금발 독일 아가씨, 바로 운명의 그녀가 있었다. 수업 첫 시간에 그 독일 아가씨는 회사에서 바로 오느라 책을 안 가져와서 나와 같이 봤었다. 지금의 아내인 그녀는 전혀 기억을 못한다. 쓸데없는 것도 기억 잘 하고 쫌생이 같은 남자와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그래서 어제 싸운 것도 왜 싸웠는지 모르는 그런 여자라서 여지껏 같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질은 문화의 용광로라고 할 만큼 다국적의 다양한 인종이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 학교 교실 벽에 인상적인 사진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보통 표범 한 마리와, 몸 전체가 검은 흑표범이 다정하게 같이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브라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가 과연 브라질은 브라질이구나를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매일 쳐다보게 되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의 힘이었는지, 브라질의 자유로운 영혼의 힘이었는지, 나와 그녀의 운명적인 만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반 인원이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자주 내 옆 자리에 앉았는데, 나는 가까이서 보는 그녀의 금발 머리가 참 신기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샛노랗게 염색을 했던 내 머리카락 말고 진짜 금발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햇살에 비치는 그녀의 가느다란 금발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유유히 흐르는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가에 누워 햇살을 쬐는 듯한 평온한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 크레파스로 사람을 그리면 항상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지만 어떻게 머리카락이 검은색이 아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해 본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머리색에서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넓은 세계를 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금발이 신기했던 나는 책상에 떨어진 금발 한 올을 주워 간 적이 있는데, 그 금발을 매일 보게 될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종을 뛰어넘은 표범의 사랑을 담아낸 사진의 힘이었는지, 훔친 머리카락의 힘이 이었는지, 나는 매일 마법 같은 나날을 살고 있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 독일 아가씨는 나 보다 두 살이 많았고, AIESEC(아이섹)이라는 국제 학생 자치 단체의 국제 인턴십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브라질로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캐나다, 헝가리,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AIESEC 회원 친구들이 있었고 브라질 회원들과도 네트워크가 많았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의 다양한 기업에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것 같아 좀 아쉬웠다. 그녀와 친해진 후에는 자주 그녀의 아이섹 외국인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고, 자동차를 빌려 여행도 같이 다니고, 저녁에는 누군가의 집 앞에서 브라질식 바비큐를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삼바를 추었다. 그리고 덕분에 내 포르투갈어도 많이 늘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각자 관심이 다른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 내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북한과 남한과의 관계를 물어보고, 음식과 풍습에 대해  궁금해했고, 각자의 나라에서 만났던 한국 친구들 얘기를 들려줬다.


캐나다 학생은 콜롬비아 학생과 사귀었고,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의 생각을 들으며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어린 나이에 낯선 곳에 혼자 힘으로 찾아와 사람을 사귀고 살아가는 그들을 보았다. 기회를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비고, 말을 배우는 그들을 보았다. 브라질 친구들은 그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모르는 것은 물어보며 그렇게 영어공부를 했고, 그들도 그렇게 포르투갈어를 익혔다. 어느 누구도 토익 공부는 하지 않았고, 면접 스터디를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국을 대표하여 그 자리에 있는 마냥 항상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많은 언어가 그러하겠지만 포르투갈어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브라질에서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생활을 한 것은 나의 세계를 보는 시야와 각 국의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인종 간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동시에 자기의 문화에 대해 깊은 자긍심과 사랑을 보이는 그들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라질의 융합의 정신에 물든 많은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자유의 상징인 브라질 국기를 사랑했고 브라질식 베베큐 슈하스꾸와 까이삐링냐 그리고 브라질 맥주를 좋아했다.


한 번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청소하시는 분이 옆에 앉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내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참을  얘기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브라질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깜짝 놀라며 그럼 어디서 왔냐고 물은 적이 있다. 외모가 다른 나를 당연히 브라질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내 어설픈 발음이 탄로 나지 않을 정도의 간단한 대화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들이 보는 세계는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지 않고 그들이 느끼는 그것 만큼 크고 넓은 것이다. 그 것이 오늘날 지구촌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한다.



- 목 차 -

00장. Prologue

01장. 만남

   1) 낯선 곳에서의 인연

   2) 종을 뛰어넘은 표범의 사랑과 훔친 머리카락

   3) 네가 나무를 알아?

02장. 반찬의 나라로

   4)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5) 반찬의 나라로 편도 티켓

   6)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7) 먹 가는 독일 처자

   8) 낯선 곳으로 씩씩하게 내 디딘 첫 걸음    

03장. 결혼 (가제)

   9) 검정 턱시도와 검정 구두? (결혼 준비)

   10) 결혼 할래? 출장 갈래?

   11) 왜 하필 한국 사람이니?                

04장. 씩씩한 독일 여전사

   12) 한국은 극단주의인가봐

   13) 비닐봉지는 "No"

   14) 외갓집 차례지내기

   15) 아름다운 대한민국

   16) 명품 가방

05장. 아이 키우기

   17) 임신과 출산

   18) 혼혈아에 대한 생각

   19) 금지하는  것보다 위험함을 가르치는 것

   20) 육아휴직과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

   21) 어린이집 (육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

   22) Bilingual

06장. 한국 회사와 외국인

   23) 외국인을 위한 자리

   24) 우리의 현실

   25) 우리는 왜 이렇게 일에 미쳐있나

07장. 세계 속 한국, 한국 속 세계

   26) 다문화 사회

   27) 국제커플에 대한 인식

   28)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그것

   29) 한류에 대한 생각

08장. 인생에 대해 생각하다

   30)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결심

   31) 계속되는 방황

   32) 철밥통을 버리다.

09장.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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