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면서 즐기는 불안 한 잔의 여유

용감한 주부의 불안장애․공황 분투기

by 영글음

칼바람이 부는 12월이었다.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었다. 추울 까 봐 등산용 양말을 신었더니 잘 들어가지 않아 힘을 줘야 했다. 모자를 뒤집어썼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날씨가 어떻든 꼭 달릴 것이라고 되뇌었다. 집 밖을 나섰다. 가려지지 않은 양 볼 사이로 겨울의 찬 기운이 달라붙었다. 보폭을 크게 하여 걷다가 속도를 높였다.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그러다 지치면 걸었다.


때때로 눈물이 났다. 이유는 없었다. 뛰면서 위아래로 흔들리는 오장육부에 맞춰 감정도 마구 흔들려서 그랬는지 조절이 잘 되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하는 수 없었다. 그저 뛰고 울고 걷고 울고 그랬다. 마음속으로 “내 반드시 불안 장애 너를 없앨 것이다”라는 다짐만 반복했다. 흡사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를 꿈꾸는 무협 드라마 속 대사 같았다.


매일 오전 30분에서 한 시간 가량 뛰었다. 오후가 되면 문제가 되었던(!) 그 강아지와 남편, 딸들과 함께 산책을 했다. 저녁 준비를 할 때 스쾃 100회씩 반복했다. 시간이 좀 더 있을 때는 고수들이 찍어 놓은 동영상을 보며 홈트레이닝을 따라 했다.


그러다가 슬쩍 유튜브에 있는 다른 동영상을 보기도 했다. 화면 속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웃고 있었다. 어찌나 다들 삶에 의욕이 넘치는지 전기선 같은 게 있어서 그 줄로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도 한땐 에너자이저라 불렸던 것 같기도 한데. 고작 1여 년 전이지만 너무 먼 과거가 되어버린 것 같은 나의 옛 모습이 그리웠다.


웃고 싶었다. 아니, 그저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죽어라 움직였다. 그래야 된다기에.

효과는? 최고였다.




몸의 기능을 늘려야 해


약물치료 없이 불안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했던 많은 시도 중 ‘몸을 움직이는 것’ 즉, 운동은 중요성이나 효과로 보아 첫 손에 꼽고 싶다. 운동하면 몸에 좋다는 조언. 참 도덕적이다. 담배 피우지 말고 기름진 음식 먹지 않아야 건강에 좋다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어쩔 땐 1 더하기 1이 2인 것과 같을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안다. 알면서도 못할 뿐. 하지만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몸을 움직이라는 것은 제1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과제라 말하고 싶다. 나의 불안 증상을 없애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정의학과 의사 유태우 님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생각과 몸의 합은 일정하다”라고 하면서 “생각이 커지면 몸의 기능은 감소한다”라고 덧붙였다. 불안과 우울을 느끼는 것도 생각을 통해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커지면 몸의 기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생각을 줄이거나 몸의 기능을 늘리거나. 생각, 즉 불안을 쉽게 줄일 수 있었다면 그것이 장애라는 단어까지 달고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다. 바로 몸의 움직임을 늘리는 일이다.


물론 불안, 공황이 있는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는 것이 쉬운 조언은 아니다. 만사가 힘들고 움직일 힘조차, 삶에 의욕조차 떨어진 이들에게 자꾸 움직이라니. 첫 발을 디디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결과가 어떻든 일단 믿어야 한다. 오늘 내가 움직인 몸뚱이가 훗날 건강함을 장착한 신체가 될 것이라고. 내 안에 있는 불안 따위는 그와 함께 날아갈 거라고.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마음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그렇다고 시작한 다음날부터 짠 하고 좋아지지는 않았다. 2개월쯤 지났을 무렵부터 서서히 나의 불안 증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감정 밑바닥에 카펫처럼 깔려 있던 우울한 감정이 옅어졌다. 집 나갔던 식욕이 돌아왔다. 사람들 모인 곳에 가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물론 운동뿐 아니라 앞서 말한 생활습관 바꾸기와 인지행동치료를 꾸준히 한 것이 버무려진 결과라 생각한다.


운동이라면 모든 종목에서 젬병이었던 내가, 초등학교 때 체력장도 5급을 받았던(우리 반에 딱 2명만 5급이었음) 내가, 숨쉬기나 눈 깜빡거리는 것 외에는 별로 운동할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내가 지금은 매일 산책을 하고 홈트레이닝을 한다. 그때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덕택이다. 아침에 산책을 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드드하다. 운동의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영국 와서 고칼로리 음식 덕분에 빵빵해졌던 몸도 5kg가량 줄어 1년째 유지다.


가끔 마음이 울컥할 때가 있다. 큰 숨 쉬기가 힘들거나 심장박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불안 장애 증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려고 하는 순간이다. 그러면 무조건 나가 마을 한 바퀴 뛰고 돌아온다. 어두컴컴한 밤이라면 스쾃 개수를 100개에서 200개로 늘린다. 진짜 숨이 차 심장이 콩콩 뛴다. 운동으로 오히려 더 날뛰게 만드는 나만의 요법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하고 나면 증상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심장에게 눈을 흘기며 묻곤 한다.


“내가 뛰니까 너도 힘들지? 불안 때문은 아니지?”



※ 덧붙임: 생활습관 개선, 운동, 인지행동치료 등을 하고 난 후로는 지금까지 공황 발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전 같은 안절부절못한 느낌에 우울한 감정도 사라졌고요. 다만, 가끔씩 (위에서 쓴 데로) 큰 숨 쉬기가 힘들다거나 심장 뛰는 게 느껴지는 증상은 나타나요. 잘 조절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글에서 다시 언급할 예정입니다.




* 영국 사는 용감한 주부의 불안 장애 분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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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주부의 불안장애․공황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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