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와 인지행동치료를 시작하다

“물이 반이나남았어!”의 놀라운효과

by 영글음

정신과 의사 캐서린과 함께 하는 인지행동치료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6주 동안 1주일에 하루, 한 시간 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신과에서는 이야기가 곧 치료다. '상담을 받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지만 당시를 떠올려 보면 친구와 만나 차 한 잔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기억에 남는다. 나이가 있는 베테랑 의사를 만나길 바랐는데 캐서린은 젊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하지만 차분한 말투와 웃는 인상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이 즈음에서 인지행동치료가 뭘 하는 것인지 궁금한 분들이 계실 것이다.


생각에 따라 감정과 행동이 바뀐다는 것, 그리하여 생각하는 방식을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바꾸면 그 결과로 좀 더 긍정적인 감정과 행동이 나온다는 것, 이것이 내가 받았던 인지행동치료(CBT-Cognitive Behavioral Theraphy)의 핵심이다. 더불어 왜곡된 사고체계를 바로잡아 치료를 하는 것이다. 무슨 소린지 내가 써놓고도 어렵다. 쉬운 예를 들어 볼까?




세상 어딘가에 영희와 철수가 있다고 해보자. 영희의 아버지가 길을 가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다. 병원에 입원해야 할 상황이다. 황급히 소식을 들은 영희가 병원에 도착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니 눈물부터 쏟아졌다. 시간이 지난 후 영희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다시는 일어나시지 못할 거야.
연세도 있으시잖아?
병원에 계속 입원해야 하면
어휴, 병원비는 얼마나 나오려나.
간병은 누가 하지.
나는 일하러 가야 하는데.
그러길래 정신줄을 바짝 잡으셨어야지
속상해 죽겠네.


이런 생각 끝에 영희는 걱정과 근심의 한숨을 짓는다. 공교롭게도 철수의 아버지도 길을 기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다. 병원에 입원해야 할 상황이다. 황급히 소식을 들은 철수가 병원에 도착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니 눈물부터 쏟아졌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생각한다.


다리가 부러지긴 했어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연세도 있으신데 까닥 잘못하다가는
더 큰 일을 치를 수도 있었어.
노인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야.
나중에 지팡이라도 사 드려야겠다.
금방 퇴원하실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 끝에 철수는 마음을 다잡고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아버지의 다리가 부러지는 같은 상황을 놓고 영희와 철수는 다르게 생각을 했고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감정도 달랐다. 이 감정에 따라 그들이 취하게 될 행동도 같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을 둘러싼 배경이 다르니 이렇게 단순 비교가 무의미하지만 지금은 그냥 예시라고 보고 넘어가자. (위의 예시는 온라인 인지행동치료에 실제 나왔던 내용이다.)


흔히 하는 말로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다” 고 생각하는 것과 “물이 반이나 남았다”라고 느끼는 것의 차이를 깨닫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초조하고 긴장되는 감정을 느낄 것이고 후자라면 여유롭고 안심이 되는 감정을 겪게 될 것이다. 치료를 위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도표를 잘 봐야 한다.


삼각관계.jpg <인지행동치료의 기본이 되는 생각과 감정, 행동의 상관관계>



인지행동치료를 받는 동안 캐서린은 끊임없이 나에게 이 연결고리를 강조하고 반복했다. 처음에는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정신과 의사에게 배우는 이유는 무얼까? 나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그리고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이것이 전부이면 어쩌지? 그리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당시 나는 CBT에 뭔가 비밀스러운 비법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만 받으면 ‘짠’ 하고 마법처럼 새 사람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한 주 한 주 치료가 진행되어도 의사는 계속하여 우리의 사고 체계와 그것이 감정,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했다. 속된 말로 인이 박힐 정도로. 어느새 내 머릿속에는 생각과 감정, 행동의 도표 자체가 박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주가 끝난 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도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인지행동치료의 처음이자 끝이라 할 만큼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다 안다고 여겼지만 실은 아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머리에 제대로 넣고 나의 생각에 적용하고 연습하는 훈련을 통해 왜곡된 생각들은 점차 수정되어 나갔다. 치료를 하면서 각 항목에 맞춰 나의 이야기를 썼다. 그러고 나서 바라보니 생각 부분에서 오류가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특정 질환을 진단받지 않았더라도 늘 근심 걱정을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거쳐봤으면 한다. 1) 상황, 2) 생각, 3) 감정, 4) 행동 각각에 맞춰 종이에 써보는 것이다. 머릿속에만 있던 나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보면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의 건강 염려증을 예로 들어 보겠다.



상황

- 쉽게 피곤해진다

- 목과 어깨 등 근육이 잘 뭉치고 통증이 있다

- 가만히 있어도 심장 뛰는 게 느껴진다

- 가끔씩 큰 숨 쉬기가 힘들다

- 목 안에 무언가 막혀 있는 것 같다


생각

- 암이나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 이 병 때문에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감정

- 가슴이 터질 정도로 슬프다

- 내가 죽고 남을 가족들이 불쌍하다

- 불안하고 무섭다

- 억울하고 화가 난다


행동

- 병원 투어를 하며 각종 검사를 받는다

- 검사 결과를 믿지 않고 계속 의사를 만난다

- 인터넷으로 각종 병들을 검색하며 걱정을 늘린다



신체적으로 몇 가지 증상이 있다고 모두 암 같은 심각한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나도 알고는 있었다. 게다가 이미 받았던 검사에서 암이라고 확신할 만한 아무런 정황도 없었다. 몇 가지 증상과 통증만으로 암에 걸린 게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성급한 결론”을 짓는 나의 왜곡된 생각 때문이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 맞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여러 왜곡된 패턴들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심어졌던 신념(나쁘게 말하면 고정관념)이나 경험, 습관 등의 영향으로 생길 수 있다. 경험해 보니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 제대로 인식해도 바꾸기가 훨씬 수월했다.


캐서린은 내가 썼던 생각을 조금 수정해 보자고 했다. 이때 너무 긍정적인 쪽으로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런 증상이 있어도 암 따윈 걸리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현재의 생각에서 한 단계 물러선 정도가 적당하다. “심각한 병은 아닐 거야. 혹시 암이라고 해도 치료가 가능할 거야.” 정도로. 처음엔 아무 차이가 없는 것 같았지만 계속할수록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매 시간 이 훈련을 반복했다. 강아지 입양 문제나 몇 년 후 아이들이 나를 떠났을 때 내가 느낄 상실감 등 당시 나를 괴롭히고 있는 고민과 불안에 대해서도 종이에 써서 나열한 후 하나하나씩 왜곡을 분석하고 단계를 낮추어 생각하는 연습을 했다. 그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인지행동치료는 몇 번의 상담으로 끝이 나는 치료방법은 아니다. 의사를 직접 만난 것은 6주, 온라인 과정은 8주가 전부였지만 그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을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연습을 해야 해서 시간이 걸린다. 마법의 금가루 같은 건 없었다. 생각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랄까.


치료가 끝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연습을 하며 살아나간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현재의 상황과 생각, 감정 등을 분석하고 부정의 단계를 살짝 낮추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물이 절반 들어 있는 컵을 보고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기뻐하며 춤출 수 있을 때까지 나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 영국 사는 용감한 주부의 불안 장애 분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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