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주부의 불안장애․공황 분투기
테이블 위에 항우울제인 플루옥세틴 한 알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물과 함께 삼키면 1초 만에 내 몸에 집어넣을 수 있는데. 먹을까, 말까. 먹을까. 말까. 시험에서 답을 몰라 3번을 찍을까 4번을 찍을까 고심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확률 게임을 떠나 결과는 언제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맞거나 틀리거나. 먹거나 안 먹거나.
“언니, 영국 사람들은 그런 약 다들 먹고살아. 내 주변엔 다 그래. 걱정 말고 먹어.”
정인은 나에게 다들 약 몇 알씩은 먹으며 산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약 먹고 정말 좋아졌어. 지금도 복용 중이지.”
카린은 약물치료의 효과가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불안 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약을 먹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먹고 나면 증상이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작용이 걱정되었다. 손 떨림, 체중 증가 등은 괜찮았지만 약이 효과가 있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우울감이 심해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지금도 우울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여기서 더 우울해진다고? 그것이 얼마간 지속될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고? 그렇다면 한 달이 될 수도, 두 달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차라리 절대 권력자가 나타나서 먹어라 마라 명령을 내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내가 이 약을 어떻게 받아온 것인데.
선생님, 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제 인생은 망가진 것 같아요!!
헬렌 앞에서 나는 이성을 잃고 울부짖다시피 했다. 너무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환자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들렸을 게 뻔했다. 지난 시간 이후 헬렌과 2주마다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한 터였다. 그녀는 10분씩 있는 진료 시간을 두 번 예약하라고 했다. 내게 주어진 20분 동안 완벽하지도 않은 영어로 (그땐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음을 꺼내다 보니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약을 먹을 때가 온 것 같다면서 심장 뛰는 게 느껴질 때 먹는 약과 항우울제인 플루옥세틴을 처방해 주었다. 그녀와 만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두 번째 공황 발작 후 우울감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심해진 데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바로 강아지 입양 사건. 잠시 약을 처방받기 2주 전으로 돌아가 볼까?
나의 불안 장애는 각종 검사를 마치며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심전도 검사, 폐기능 검사, 폐 CT 촬영, 목 MRI 촬영, 복부초음파까지 한 뒤에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증상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만 해도 자만했었다. 건강염려증이라는 것이 검사만 받고 나면 해결되는 간단한 것이라 생각했다. 잘 극복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곧이어 강아지 입양 사건이 터졌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불안 장애라는 것은 나의 머릿속 인지 시스템의 오류라는 것을.
아이들과 강아지를 키우기로 약속을 했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데려오자고 했다. 태어난 지 3주 된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하고 5주를 기다렸다. 근처 농장에서 양을 치는 엄마, 아빠 개에게서 태어난 강아지였다. 그때는 온 가족이 새 식구를 맞이할 마음에 한껏 들떠 있었다. 물고기 이외에는 생천 처음 키워 보는 동물이라 나도 기대를 했다.
그러나 강아지를 데려온 첫날밤, 부모, 형제와 떨어진 그 녀석은 잠을 쉽게 들지 못했고 아기 늑대 같은 소리를 내며 하울링을 해댔다. 새벽에 깬 남편과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강아지를 안고 어르고 달래느라 잠을 설쳤다. 그러니까 첫날부터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일은 며칠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자리 잡으려면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너무 어려서 혼자 집에 놔두고 장 보러 갈 수도 없었다. 반려견에 관해 미리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손이 많이 가는 강아지를 보고 있자니 다시 목 이물감, 호흡 곤란 등의 불안 증상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머릿속에는 강아지 때문에 펼쳐질 나의 어두운 미래가 끊임없이 그려졌다. 개를 돌보느라 내 인생은 망가질 것이다, 평생 발목 잡혀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예쁘지 않다, 다시 돌려주고 싶다, 하지만 좋아하는 가족들을 보니 돌려줄 수가 없다....... 나는 망했구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했다. 이성적으로는 나 또한 그럴 것이라 여겼지만 당장의 머릿속 사고체계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망했구나....... 망했구나.......
몸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오히려 전보다 심해졌다. 눈물이 더 자주 흘렀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숨쉬기 힘든 증상도 새로 생겼다. 어떤 날은 밥을 한 숟가락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먹다가 식도가 막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바나나 반쪽으로 하루 종일 버틴 날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강아지를 만질 수조차 없었다.
의사 헬렌도, 소피와 카린도, 심지어 남편도 그렇게 힘들면 강아지를 데려다주자고 했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 나 때문에 가족의 행복이 망가질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그 마저도 마음 편히 결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좋은 엄마 & 좋은 아내 증후군, 완벽주의 등이 불안 장애를 만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무척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내 인생에서 나는 쏙 빠지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것도 완벽을 추구하며.
결국 약을 먹지 못했다. 대신 헬렌의 권유대로 웰빙센터에서 정신과 의사가 진행하는 인지행동치료(CBT) - 6주 간의 상담치료 과정을 받기로 했다. 약을 아예 먹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언제든 상황이 최악으로 나아가면 바로 먹을 수 있게 한 손에 꼭 쥐긴 했으되, 그전에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볼 작정이었다. 남편은 논문 위주로, 나는 책과 유튜브로 참고할 정보를 찾았다. 그리고 생활습관부터 바꾸어 보기로 했다.
* 영국 사는 용감한 주부의 불안 장애 분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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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주부의 불안장애․공황 분투기
여는 글
1부 - 나의 불안, 너는 누구냐
2부 - 일상 되찾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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