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주부의 불안장애․공황 분투기
어떤 이들은 술보다 술자리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술 자체가 좋은 사람이다. 맛도, 향도, 마실수록 오르는 취기도 사랑한다. 풀바디 칠레 와인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삼키면 지나치는 목구멍 부위마다 포도 향과 알코올이 퍼지는 느낌이 황홀하다. 스모키한 오크통 숙성 싱글몰트 위스키는 첫 잔부터가 축제 같다. 술이 세지 않은 덕에 조금만 마셔도 알딸딸해져서 가성비도 굿이다.
커피 애호가이기도 하다. 근처 가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갓 볶은 원두를 배달시킨다. 매일 아침 원두를 넣고 직접 갈아 반자동 커피 머신으로 내려 마신다. 에티오피아, 브라질, 자카르타, 콜롬비아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향이 그날의 하루를 감싸 안는다. 아니, 사실은 카페인 때문에 안 마실 수가 없다. 거르는 날에는 하루가 다 멍해지니 말이다.
술과 커피를 끊다
전문가들이 말했다. 술은 알코올 분해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가 뇌신경전달물질의 활동을 방해한다고. 커피 속 카페인은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심박동수를 늘린다고. 하여 불안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둘 다 멀리 하라고 조언했다. 술과 커피를 끊었다. 여기에 금연까지 포함되는데 그것은 젊었을 때 호기심으로 몇 번 빨아본 적밖에는 없어서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안할 때 혹은 불안 장애 증상이 있을 때 술을 마시면 물에 소금 녹듯 마음속 불안이 사라지고는 했다. 자주 착각했다. 내가 다 나았다고. 하지만 다음날이면 도루묵. 알코올이 잠시 나의 뇌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괴로우니 자주 마셨지만 지금은 비상체제라 생각하고 꾹 참았다.
카페인의 영향력은 더 직접적이었다. 언제부턴가 커피를 마신 직후부터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게 느껴지는 날이 늘었다. 그렇잖아도 뛰는 심장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사랑하는 커피까지 증상을 보태다니. 기절할 노릇이었다. 하루에 아침, 점심 두 잔씩 내리곤 했는데 단칼에 끊어버렸다. 슬과 커피 대신 내가 취한 것은 다름 아닌 규칙적인 수면&식사 습관, 햇볕 받는 시간 늘리기, 건강기능식품, 운동 등이었다.
햇볕아 내게 오라, 건강기능식품 섭취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일어나며, 식사 시간을 맞추는 것은 할 수 있었는데 햇볕 받는 시간 늘리는 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영국의 날씨 탓이다. 우중충하고 비 자주 오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햇살을 어찌 내게 가져온단 말인가. 게다가 그때는 겨울이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겨울은 아침 9시가 되어야 밝아지고 오후 3시 반엔 이미 어둑하단 말이다.
햇볕을 자주 쐬는 게 중요한 이유는 세로토닌과 멜라토닌 생성을 돕기 때문이다. 모두 신경계 전달물질로, 세로토닌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감정을 전달하며 멜라토닌은 밤에 잠을 잘 자게 도와준다. 몸속에 얘네들이 없으면 불안감, 우울감이 높아지거나 불면증이 생긴다. 실제 불안 장애나 공황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세로토닌, 멜라토닌 수치가 낮다고 한다. 또한 햇볕을 받으면 만들어지는 비타민 D도 수준이 낮으면 우울한 감정이 늘어날 수 있다고 하니, 해 잘 안 뜨는 나라에 사는 게 세상 억울했다.
하는 수 없었다. 햇볕이 없는 날도 밖에 나갔다. 구름이 온 하늘을 덮었어도 날이 환한데 설마 볕이 다 가려질라고?! 단 10%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땡큐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맑은 날이 오면 팔, 다리를 다 걷어올린 채 태양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미, 주근깨가 걱정도 되었지만 지금은 뭣이 중헌디.
비타민, 무기질을 섭취하다
칼슘과 비타민 D 복합체는 원래부터 먹고 있었다. 거기에 남편이 찾은 해외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마그네슘, 비타민 B6, 5-HTP라는 건강기능식품을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의사나 약사가 권한 것이 아니라 효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는 심정이었다. 처방받아온 항우울제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놓았겠다, 그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으니까. 건강기능식품은 약에 비해 부작용이 적다는 것도 한몫했다.
마그네슘은 뇌와 신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비타민B6는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생성을, 5-HTP 역시 세로토닌의 생성을 돕는단다.
아마존의 구매후기를 읽어보니 나처럼 불안이나 우울을 줄이기 위해 시킨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이는 효과를 보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여러 커뮤니티 공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처방약도 약효나 부작용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건강기능식품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세 가지를 함께 먹은 지 하루 만에 안절부절못한 증상이 줄어들었다. 기분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3주 동안 먹었다. 3주째가 되었을 조금씩 양을 줄여 보았는데 그래도 증상이 확 올라오지 않길래 이틀에 한 번, 삼일에 한 번 식으로 하다가 중단해 버렸다. 사실 건강기능식품이라 좀 더 먹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알약을 삼키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안 먹게 되었다. 혹시 증상이 또 심해지면 먹을 수도 있으니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시도는 해보았으나 효과를 못 본 것들
이밖에도 친구 케이트가 권한 <Rescue plus>란 건강기능식품도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비타민 B5와 B12 그리고 꽃향기가 함유된 액상제품이었는데 끝에 달린 스포이드로 입 안에 4-5방울씩 똑똑 떨어뜨려 먹는 것이었다. 케이트는 심장 뛰는 게 느껴질 때 그것을 먹으면 가라앉았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효과가 "제로"였다. 카린이 추천한 <헤드스페이스>란 명상 앱도 깔고 몇 차례 시도해보았으나 생각보다 어렵더라.
※ 덧붙임: 술과 커피는 약 2개월 간 끊었었어요. 하지만 증상이 나아진 후로 조금씩 마시게 되었고 현재는 매일 커피 한 잔, 일주일에 와인 한 병 정도의 음주생활은 즐기고 있답니다.
* 영국 사는 용감한 주부의 불안 장애 분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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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주부의 불안장애․공황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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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나의 불안, 너는 누구냐
2부 - 일상 되찾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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