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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KI Feb 24. 2016

#10. 우연이 즐거운 이유

리스본 알파마지구 골목길 여행

안녕하세요~
브런치 매거진에 연재했던 <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이 드.디.어! 책으로 나왔습니다~ ^_^ 
연재했던 글은 아래와 같이 공개합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재즈의 생명은 ‘즉흥(improvisation)’이다. 즉흥적이어야 즐겁고 재미있다. 예상 가능한 재미란 없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김정운-


“행님 그럼 저희 이만  내려갈까요?”

'상 조르제 성'에서 빨간 지붕도 실컷 보고. 성의 명물이라는 공작새와 한참 대화도 한 처룽이가  지겨워졌나 보다. “그래!” 알파마 지구를 오를 때는 성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제 성에서 나오니 딱히 급할 건 없다. 그래서 트램을 타지 않고 되는대로 걸어  내려와 본다. “형. 아까 헤맨 골목인데 다시 보니까 반갑다.” 지노 말처럼 두 번 보니 반갑다. 올라오며 헤맬 때는 끝도 없는 미로 같더니. 이제는 구불거리는 것도 멋스럽게 보여 세월의 때가 묻은 빈티지 가구 같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가볍다. “형! 무슨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도 아니고 그게 뭔 소리야.” 지노는 이렇게 툴툴거리며 입바른 소리 하는 게 참 매력적이다. 그래서 조용히 뒤따라 가다 보면 엉덩이를 발로 걷어 차고 싶어 진다.


“야! 식당이나 찾아 빨리! 저녁 먹게.”

지노를 조용히 시키는 마법의 주문.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이다. 지노는 특별히 없이 산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먹을 것에 집착하며 구도자 같은 마음으로 식당을  찾아다닌다. 흡사 불로초를 찾는 진시황, 여의주를 찾는 손오공 같다고나 할까. 당연히 우리 여행 먹거리 선택권을 모두 지노에게 일임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야?” “사실 오늘은 호시우 광장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 걷는 속도와 거기까지 가는 거리. 날씨와 바람의 조건을 따져 볼 때 지금 가기엔 너무 무리야. 배고파서  안 되겠어. 걍 근처에서 먹자! 여기도 뭔가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지노는 한참을 두리번 거리더니, 현지인에게 직접 묻기 신공을 발휘하며 골목을  앞장선다.



“어?! 저긴 뭔가요 행님."

호기심 쟁이 처룽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자, 강가 쪽으로 확 터진 발코니가 나온다. 가까이 다가가니 앞으론 테주강이 보이고 옆으론 빨간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구불구불한 거리를 따라 노란 불을 켠 트램이 달린다. 불도 많지 않은 이 빈티지한 산동네에 이렇게 예쁜 곳이 숨어 있다니. 유럽의 여유로운 마을이라는 주제로 사생 대회를 하면, 꼭 등장할 법한 풍경이다. 우리가 그렇게 우연히 도착하게 된 곳은 바로 ‘솔 전망대’라는 곳이었다. 알파마 지구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뷰포인트. 계획한 것도 아니었으나 계획하지 않았기에 깜짝 선물 같이 반가운 곳이었다. 거리엔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있고 야외에 테이블을 펼쳐 놓은 이곳이라면 아무 곳에나 무엇을 먹으나 흡족할 것 같은 시간이었다.


“아냐 형."

물론, 엄격한 기준을 가진 지노에겐 아니다. 우리는 오늘 밤 찾아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 “아니 난 여기도 좋은데?”라고 해봤자 필요 없다. 솔 전망대의 풍경을 즐기는 것도 잠깐, 우리는 군가 소리에 홀려 전진하는 학도병처럼 지노의 호통 소리에 발맞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행님. 아무래도 저긴 것 같습니다.” 굶주린 처룽이가 이번에도 뭔가를 발견헀다. 해는 이미 지고, 완전한 어둠이 골목을 덮은 시각. 우린 마침내  현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식당에 도착했다. 뭔가 엄청난 곳은 아니지만 진짜 현지인들이 자주 갈 것 같은 식당. 지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어코 이곳까지 온 스스로가 대견스러운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지노야. 근데 난 지금 신발을 구워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아.”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 배고픔이었다. 우리 셋다 배고프긴 매 한 가지. 되는 대로 이것저것 푸짐하게 시키려는데, 처룽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런데 행님... 저는 사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습니다 형님.” 이게 무슨 소리지. 우리가 포르투갈 온 게 며칠이나 됐다고 얘가 이러나. “쏘...주 도요 행님.” 문신에 수염. 피어싱에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무장한, 우리 중에 제일 트렌디하게 생긴 애가 왜 이러지. 그것도 포르투갈 현지인이 추천한 평생 포르투갈에서 나고 자란 것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이 식당에서 말이다.


“너 진심이야?”

유럽여행이 처음인 처룽이는 그간 참아온 설움을 폭발하듯 말한다.”행님. 저 유럽이랑은 안 맞나 봐요. 흑” 이런 경우는 꽃할배에서나 보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겪게 되니 참으로 당황스럽다. 사정을 듣고 보니 처룽이는 이렇게 긴 여행도 처음이거니와 여행을 가더라도 꼬박꼬박 한식만 챙겨 먹는 뭔가 전통을 중시하는 종갓집 대감 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해 온 것이다. 이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생각할 겨를 도 없이 “그럼 어쩌지?” 지노와 의견을 모아 본다. “그럼 음 아 음...” “이거 시킬까? 토마토 스튜 같은데... 뭔가 그래도 비주얼을 김치찌개랑 그나마 제일 비슷할 것 같아 흐흐” 민망해서 웃음이 난다.


“행님 괜찮아요. 그래도 맛있게 먹어야죠."

도무지 뭐가 괜찮다는 건지. 이 집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는 문어밥Octopus Rice도 시키고 포르투갈 대표음식 대구 요리Cod Fish도 시킨다. 그리고 스테이크까지 골고루. 배고플 땐 주문만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게 마구 시키는 게 포인트다. 초조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와~!” 드디어 음식이 나오자 탄성도 함께 나온다. 하루 종일 걷다 그날 저녁에 마주하는 요리가 뭐들 맛이 없겠냐만은 기꺼이 감탄할 준비가 된 사람들 앞으로 나온 음식은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우와~ 근데 지노야. 이거 으흠... 비주얼이 좀 그렇지 않아?”

분명히 '우와~!’ 감탄하면서 봤는데 보기에 썩 훌륭하진 않은 것 같다. 야채들이랑 물이랑 밥이랑 대충 넣고 한참 끓여 불어 터진 느낌이랄까. “아닌데?!” 가장 먼저 맛을 본 지노의 외마디 외침! 직접 맛을 보니 대충 끓인 죽 같은 비주얼에서 그렇게 맛있는 해산물 맛이 난다. 그렇게 쏘주가 그립다던 처룽이에게도 크게 한 수저 떠 입에 넣어 버린다. “아 행님. 이건 진짜 맛있네요.” 지가 시킨 토마토 밥을 먹다가 내 문어밥을 다 먹어버렸지만 그래도 니가  행복할 수 있다면. 혼자 하는 여행도 의미 있지만 여럿이서 하는 여행 만이 가질 수 있는 재미였다. 무작정 되는대로 시켜 가장 맛있는 음식 거덜 내 버리기. 토마토 밥은 쏘쏘,  대구구이와, 문어 밥은 지나고 나서도 생각이 날만큼 맛있었다. 그리고 와인은 사진을 찍어갈 만큼 훌륭했다. 길가는 행인에게 물어 즉석에서 섭외한 식당 치고는 괜찮은 성과였다.  


“형 거봐 내가 뭐랬어. 즉석 섭외의 재미가 다 이런 거지 뭐 하하.”

지노의 잘난 척도 포용해 줄만큼 훌륭한 저녁이었다. “그치 처룽아?” “아 예 행님 전 괜찮아요. 쏘주 한 잔이면  날아다닐 것 같은데. 그게 좀 아쉽네요.” 괜찮다고 하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처룽이랑도 낄낄거리며 리스본 밤의 골목길을 걸었다.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또 아니라고 해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얼른 도착하면 좋겠지만 얼른 도착할 필요도 없었다. 내일 회사에 갈 필요도 없었고 일상의 의무도 없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난 리스본의 밤을 누렸다. 짧은 휴가였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걷는 게 지루하지 않은 여행자였다.




“행님. 저는 아니에요."

아, 이렇게 의사 표현이 분명한 영혼. 주입식 교육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것 같은 처룽이다. “행님. 저는 다리 아파 죽겠어요. 저랑 유럽은 정말 안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투덜거리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제일 크게  반응하는 건 분명 처룽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쉥키 혼자만 더 많은 걸 가져가는 것 아닐까 견제하게 되는 추억 도매상. “아니 행님. 농담이 아니에요. 진짜 역대급 피로감입니다. 아이고 아이이고.” 처룽이는 숙소에 도착하고서도 그렇게 끙끙 앓더니 씻지도 않고 누워 버렸다. 처룽이와 계속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집착에 가까울 만큼  끊임없이 씻고 또 씻는 처룽이에게 이렇게 그대로 누워 자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역대급’ 수면 준비라고나 할까.


“처룽아 근데 우리 클럽 갈 건데. 계속 잘 거야?”

한국에서도 클럽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일어 날 녀석인데 아무리 불러도 완고 하다.  “아이고아이고 행님. 일단 가 계세요.” “처룽아 여기 장난 아니라는데?” “아이고 아이이고.” “크크크” 패셔너블한 처룽이가 이렇게 유럽과 안 맞아할 줄, 또 한식을  그리워할 줄 여행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을 일이었다. 알파마 골목길 어딘가 맛집을 발견하게 된 것도 솔전망대를 마주하게 된 것도 여행이 가져다준 우연 같은 선물이었다면 너무 큰 과장일까. 치밀한 계획 끝에 마침내 도착한 성취 같은 여행도 의미 있지만 우연이 모여서 만들어낸 재즈 같은 즉흥 여행도 또 하나의 즐거움 이었다. 즉흥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즐거움 속에, 마침내 즉흥곡을 완결하듯 우리의 우연 같은 하루가 또 지나고 있었다.



/ 다음 편 계속 /







 1화: 프롤로그. 나를 여행가라고 소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화: 조금 느린 여행 준비

 3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1)

 4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2)

 5화: 리스본, 여행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즐거움

 6화: 리스본의 아침, 온세상의 채도를 높이다

 7화: 대항해 시다의 로망을 간직한 도시, 벨렘지구

 8화: 에그타르트 끝판왕, 리스본 파스테이스 드 벨렘

 9화: 알파마! 길을 잃어도 괜찮아

10화: 달동네 꼭대기 '오래된 창문'

11화: 우연이 즐거운 이유

12화: 무한한 일상 속, 유한한 휴가를 대하는 자세

13화: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생아

14화: 신트라! 왕궁보다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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