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Soo Seo May 29. 2016

#14.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생아

리스본 소매치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안녕하세요~
브런치 매거진에 연재했던 <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이 드.디.어! 책으로 나왔습니다~ ^_^ 
연재했던 글은 아래와 같이 공개합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조금 익숙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만다. 긴장의 끈을 놔버려서 그런 걸까. 꼭 오늘 같은 날이 바로 그런 날이다. 며칠이나 있었다고 벌써 익숙해진 15번 트램에 오를 땐 이제 스마트폰이나 까딱까딱 확인한다. “행님. 여기 사람 왜 이렇게 많나요?” 처룽이가 트램에 따라 오르며 말한다. “그러게." 오후 늦은 시각, 벨렘에서 리스본 시내로 이동하는 트렘엔 여행객들이 몰린다. 그렇게 꼭 러시아워 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그렇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우린 교통지옥의 메카, 서울에서 왔으니 말이다. "이쯤이야 껌이지." 익숙하다는 듯 기둥형 손잡이가 있는 명당자리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데, 바로 그때.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왓 아유 두잉!!” 

처룽이가 한 여자의 팔을 잡아 꺾고 소리를 지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 “왓 아유 두잉!” 성격 좋은 처룽이가 눈을 뱀처럼 뜨고 소리 쓴다. “왓더헬! 이거 놔! 왜 이래!” 팔목을 잡힌 여자는 더 큰 소리로 처룽이에게 대든다. 트렘 안 빽빽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힌다. “처룽아 왜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바로 옆에 있던 나와 지노도 상황 파악이 잘 안돼 무슨 일이냐고 눈짓해 보지만 알 길이 없다. “넌 도둑이야!” 처룽이의 말에, 여자는 질세라 더 악다구니를 쓴다. 


“크레이지! 내가 왜! 니가 도둑이지?! 이거 놔!” 여자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 혹시 처룽이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뭐라 말하기도 주저하게 만드는 상황. “너 도둑질하려고 했잖아! 경찰 부를까.” “그래! 경찰 불러!” 만원 트램 안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며 둘은 얼마나 승강이를 했을까. 여자는 출입문이 열리자 처룽이의 손을 뿌리치고 내려 버린다. 그냥 내리기 아쉬웠는지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찰진 말도 내뱉는다. 

zona = 포르투갈어로 '지역(zone)'이라는 뜻. 꼭 욕같다. 오늘 처럼 욕하고 싶을 땐 포르투갈어로 '지역'을 외치자. ZONA!


아, 대체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한 거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러니까 처룽이의 말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자는 곧 내리려는 듯 사람들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처룽이가 앞으로 맨 가방을 공략했다. 바로 그때 그가 여자의 팔을 낚아챈 것이다. 놀라운 건 여자가 '다음 역에 내릴 테니 비켜 달라.'는 눈짓을 나한테도 했고 나도 여자 앞으로 길을 내줬다. 


결국 처룽이가 안 당했으면 내가 타깃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 근데 사람들 봤어?” “뭐가?” 지노 말로는 처룽이가 그렇게 싸우고 있던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기 가방 단속을 하더란다. “와 진짜 사람들 야박하네. 이렇게 싸우는데 좀 도와주든가 경찰이라도 불러 주든가.” 아마 트렘 안의 사람들 대부분이 여행자라서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도 깜빡 속을 뻔했으니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분명한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여행자들이 주로 타는 15번 트랜은 대부분 사람들로 미어 터진다


“괜찮으세요?” 

뭐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이번엔 또 생판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 “아까 트렘에서 봤어요.” 한국 여자였다.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로 보였다. 우리와 함께 트렘에 탔었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봤단다. “아아아 그거요? 저희가 이래 보여도 바로 제압하려고 했는데. 하하” 걱정해서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려다 보니, 이 와중에 말을 건 사람은 맥락 없이 미녀다. 그래서 그랬던 건지 때 아닌 허세 드립이 터지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깔깔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놀란 마음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며 만들어지는 오바같은 유쾌함이랄까. 익숙해지며 루즈해지려는 여정에 소매치기 사건은 이렇듯 또 하나의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


“우린 피퀘리아 광장에 갈 건데.” 

피퀘리아 광장은 노천에서 열리는 마켓이 유명하다. 그녀도 흔쾌히 동행. 플라스틱 일회용 컵에 파는 샹그리아를 시키고 구운 소시지와 빵을 샀다. “네? 뭐라고요? 배우라고요?!” 놀랍게도 그녀의 직업은 배우였다. 여배우. 아 그러니까 셀럽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무슨 일을 하는지 그래서 그렇게 밝히길 꺼려했나 보다. 어쩐지 미모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한국 여배우를 만나다니 참으로 신기 해 인증샷이라도 몇 개 남겨놔야 하나 싶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소매치기한테  F*ck you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한국 여배우와 리스본에서 샹그리아를 마시고 있다. 살면서 몇 번 겪기 어려운 일을 연타로 겪고 있으려니 이러다 나 오늘 죽나 싶다. 


피퀘리아 광장에선 야외 마켓이 열린다


“근데, 여기까지 어떻게 혼자 오게 된 거예요?”


화려한 직업과는 달리, 수더분한 성격의 그녀는 많은 고민을 안고 이곳까지 혼자 날아오게 됐다고 한다. 그것도 난생처음으로 말이다. 한국 여행도 혼자 해 본 적 없는 그녀가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과 많은 준비를 했음이 역력했다. 사실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진로였다. 나와는 딱 한 살 차. 지노와 동갑인 그녀. 우리 또래에 그런 고민을 가슴팍 한구석에 심어 놓고 살지 않는 이가 누가 있을까. 이곳 리스본 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회사에 있다 온 처룽이나, 어떻게 해서든 돌파구를 찾으려고 퇴근하고 나면 죽어라 글을 쓰고 있는 나나, 그리고 과감히 좋은 직장 떼려 치고 벤처기업을 창업한 지노나. 우린 모두 마음 한구석 불씨 같은 불안을 안고 있다.


이게 대체 맞는 건지.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그 고민이 깊어질수록 불씨는 때론 횃불이 되기도 하고 때론 화염방사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까맣게 속을 태워 보지만 사실 나도 잘 안다. 여행 한 번으로 그 마음속 물음에 대한 답은 짠 하고 찾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확 취해 버려야 한다니까.” 벌건 얼굴을 한 지노가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 같은 말을 한다. 정답은 없겠지만 해답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의 가치는 분명 있을 거라 본다. 그렇게 지금 우리의 고민이 헛되지 않음을 믿으며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어스름을 지나 깜깜한 밤이 됐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리스본 마지막 날이네.” 


지노가 말했다. “악! 나도 오늘이 마지막인데!” “진짜?” 신기하게도 그녀도 오늘이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인데 뭐하지?” 딱히 목적지를 정한 것도 아니었으나 살랑살랑 걷다 보니 알칸타라 전망대가 있는 언덕까지 오게 됐다. 클럽들이 모여 있고 리스본의 밤 풍경을 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손색없는 곳이었다. “하배우! 빨리와 뭐해!” 그녀의 이름은 하ㅇㅇ. 우린 그녀를 하배우라고 불렀고 그렇게 부를 때마다 그녀는 경악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럼 우린 또 그게 재밌어서 집착 강한 남자들처럼 끊임없이 불러댔다. 하배우 하배우. 골목길 우리 옆에서 리듬을 타며 엉덩이를 흔들던 빡빡머리 백인에게도 "쉬 이즈 액트리스! 유노”라고 말하며. 낄낄거리는 동안에도 여름 바람은 골목골목 불어왔다. 포장해 두고 싶을 만큼 충만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이라는 말의 힘은 세다

생각해 보면 이 짧은 하루 동안 참 별일이 다 있었다. 만원 트렘에서 소매치기와 고래고래 싸우지를 않았나, 그런가 하면 한국 여배우를 만나 리스본의 골목을 함께 거닐 고 있다. 사실 소매치기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도 없었던 인연이었다. 왜 이렇게 운이 나빴나 생각한 날도, 예상치도 못한 행운에 감탄한 날로 바뀔 수 있는 게 삶 아닌가 싶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나, 지노, 철웅 그리고 하배우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우리의 이 시절도 돌이켜 보면 기가 막히게 멋진 시간들을 품고 있는 씨앗 같은 시간 일지도 모르겠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대책 없는 긍정 바람을 해 본다. 듣기 좋은 음악이 골목을 채우고, 저 멀리 선 리스본의 오래된 건물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다시없을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기쁠 땐 웃어버리라고
복사꽃 두 뺨이 활짝 필 때까지 
내가 말했잖아 슬플 땐 울어버리라고 
슬픔이 넘칠 땐 차라리 웃어버려 
소녀야 왜 또 이 밤 이다지도 행복할까 
아이야 왜 또 이 밤 이다지도 서글플까 

- 내가 말했잖아 / 요조 -  


/ 다음 편 계속 / 





 1화: 프롤로그. 나를 여행가라고 소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화: 조금 느린 여행 준비

 3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1)

 4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2)

 5화: 리스본, 여행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즐거움

 6화: 리스본의 아침, 온세상의 채도를 높이다

 7화: 대항해 시다의 로망을 간직한 도시, 벨렘지구

 8화: 에그타르트 끝판왕, 리스본 파스테이스 드 벨렘

 9화: 알파마! 길을 잃어도 괜찮아

10화: 달동네 꼭대기 '오래된 창문'

11화: 우연이 즐거운 이유

12화: 무한한 일상 속, 유한한 휴가를 대하는 자세

13화: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생아

14화: 신트라! 왕궁보다 골목




이 글의 풀스토리! 출간된 책 보러 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11. 무한한 일상 속, 유한한 휴가를 대하는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