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헤스타우라도세스 광장에서 맞이하는 여행자의 아침
안녕하세요~
브런치 매거진에 연재했던 <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이 드.디.어! 책으로 나왔습니다~ ^_^
연재했던 글은 아래와 같이 공개합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유기징역, 소위 말하는 2, 3년 후에 출소하는 단기수들 하고 무기수들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어요. 단기수들에게 징역이란 빨리 끝나면 좋을 기간이죠.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 오로지 출소만 생각해요. 반면 무기수는 출소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뭔가 살아갈 의미가 있어야 해요...(중략) 그래서 아마 무기수라는 어쩌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열어주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 무기수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묻자, 신영복 교수가 답한 내용 중/ [남자의 물건] 김정운 -
리스본의 아침. 아직 눈도 뜨지 않았는데 햇살이 방안까지 밀고 들어온다. 그렇게 여름 햇살은 또 새로운 하루를 강제로 시작시킨다. “음 아아, 나 커피 마셔야 하는데.” 억지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래 봤자 의식은 몸을 따라가지 못해 잠과 현실 사이를 오간다. 조금 더 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아침시간을 그냥 잠으로 날리긴 싫어 굳이 기를 쓰고 일어 난다. “야야 얘들아 일어나 봐. 안 갈래?” 옆 침대에서 시체처럼 뻗어있는 지노와 처룽이를 흔들어 보지만 대답이 없다. 사실 어제 우리가 무리를 하긴 했다. 알파마 지구 언덕배기를 얼마나 싸돌아 다녔는지, 골반 뼈를 간밤에 누가 발로 찬 것처럼 욱신거리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혼자 민박집을 나왔나. 씻지도 않고 대충 몸만 가렸다. 이게 바로 다 커피 한 잔 마셔 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뭐 그리 엄청난 커피도 아니고 대단한 맛집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그렇게 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유한한 휴가가 만들어내는 생존 방식이랄까. 일상은 무한하게 펼쳐져 있지만, 그 속에 자그맣게 자리한 며칠 안되는 휴가는 이렇듯 불쑥 불쑥 조급증을 만들어 낸다. 조금이라도 더 봐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신나는 일들이 이어져야 진짜로 휴가를 잘 보낸 것 같고 말이다.
워킹데이 동안 쉴 틈 없이 일을 한 사람일수록 주말에 더 쉬지 않고 놀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바로 현대인을 번아웃으로 몰아넣는 연결 고리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래도 그 연결고리 속에서 빠져나오긴 쉽지 않아 보인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렇게 모든 게 여행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덤덤히 시간의 지나감을 받아들이면 되는 걸, 알아도 잘 되지 않는 것이 여행지에서의 하루 인 것 같다.
“커피 한잔이요."
여기도 리스본의 여느 카페처럼 엄청 싸다. 겨우 0.65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이 안된다. 뉴욕보다 스타벅스 매장이 많다는 커피의 도시 서울. 바로 그 곳에서 온 나는 이렇게 싼 커피 가격을 보면 흥분이 된다. 이곳에 있는 동안 카페인 중독자처럼 원 없이 마셔야지. 그래서 똥에서도 아라비카 원두향이 날 때까지 다 먹어버려야지 결심하게 만든다. 그렇게 뜨거운 커피가 몸으로 들어가자 노곤해진다. 눈앞에는 리스본의 석조건물들이 서 있고, 아침부터 억지로 눈을 뜬 보람이 커피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아침인데, 리스본의 직장인들은 없나. 여기저기 광장을 둘러보며 생각해 본다.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가는 걸 보면, 반대로 내 휴가가 상당히 꿀맛일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보상심리가 나를 여기까지 불렀는지 모르겠다. 이 쉐끼들 오늘 회사 가서 거북목 될 때까지 일해라. 낄낄거리다 커피 향을 맛으며 ‘으흠~’ 하면 내 휴가가 완벽해 져버리는 건 아닐까. 행복에 대한 주관이 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둘려본다는 데, 그렇게 '아 다른 사람들도 별거 없구나'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는데. 줏대없는 행복관은 여행지에서도 흔들리며 이렇게 쉴새없이 주변을 돌아 보나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을 둘러봐도 아침 헤스타우라도세스 광장에서 출근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여행자들이 보였다. 호시우 기차역을 통해 들어오는 여행자들. 커다란 배낭을 멘, 다른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인 것 같았다. 이 아침에 리스본으로 들어오는 여행자라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왔음에 틀림없다. 영화와 소설을 따라가는 여행. 저런 여행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 그렇게 리스본에 처음 발을 딛는 이들은 표정만으로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었다. 기대와 설렘과 벅참과 이동의 피로가 뒤섞여 있는 자유로운 영혼들.
이들의 눈빛은 보는 이도 흐뭇하게 만들며 이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여행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같은 효과라고나 할까. 비록 내가 기대한, 나 빼고 다 불행 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문득 그들이 부러워져서 '안돼!'라고 소리칠 뻔 했지만. 나도 지금 여행 중이니, 나 또한 저 풍경속에 스며들면 그만이다. 얼른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지노와 처룽이와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다. 여행지에서도 여행하고 싶어지는 이런 요상한 생각에 가슴은 방망이질 친다.
“여보세요, 야 아직도 자냐!”
숙소에 있을 지노에게 얼른 전화를 걸었다. “커피 테이크 아웃해서 갖다 줄까? 여기 커피 진짜 싸!” 그리고 통화를 끝내고 포장해 가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문제는 바로 테이크 아웃 전용 컵. 점원은 흐물흐물 얇은 종이컵을 내민다. 정수기 일회용 컵으로나 쓸만한 컵이다. 이래서 점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나? 그래서 이 커피가 이렇게 쌌나. 수많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피어나는데, 아슬아슬 뜨거운 커피를 들고 언덕을 오르려다 보니 슬슬 열이 받는다. “에라 잇!”
“아니 그래서, 그걸 던져 버렸어?”
뜨겁다고 해봐야 소용없다. 민박집에 도착하자마자 뽕쟁이처럼 손을 내밀던 지노에게 그런 핑계가 먹힐 리 없다. 매번 새로운 끼니 앞에 유한한 위장을 아쉬워하는 지노를 능멸한 나는 대역죄인이었다. “오쒸! 다시 마시러 가자! 나 커피 먹어야 하루를 시작한다고.” “크크크 나 좀 씻고 빨리 나가자! 아, 근데 오늘은 어디 가지?” 짧디 짧은 우리의 유한한 휴가.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오늘 갈곳과 오늘 먹을 것과 오늘 볼 것 들에 대해 떠들어 본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상상하며 기대와 흥분이 묻어 있는 대화였다. 여행중에도 여행하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는, 리스본에서의 아침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다음 편 계속 /
1화: 프롤로그. 나를 여행가라고 소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화: 조금 느린 여행 준비
3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1)
4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2)
9화: 알파마! 길을 잃어도 괜찮아
10화: 달동네 꼭대기 '오래된 창문'
11화: 우연이 즐거운 이유
13화: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생아
14화: 신트라! 왕궁보다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