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가 내가 쓰겠다는데.
안녕하세요~
브런치 매거진에 연재했던 <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이 드.디.어! 책으로 나왔습니다~ ^_^
연재했던 글은 아래와 같이 공개합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근데 처룽이 이 자식은 왜 안 오는 거야!”
공항에서 볼일 다 보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처룽이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휴가 때, 휴가를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안나타는 일만큼 황당한 일이 있을까. 휴가지에서 겪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 베스트 10안에 무조건 들어갈 것 같다. 보딩 타임은 이미 훌쩍 지난 시각. A380, 이 커다란 비행기에 사람들도 꾸역꾸역 다 들어가 버렸는데. 어쩔 수 없이 나와 지노가 먼저 들어가려는 찰나, 지노가 급하게 나를 부른다.
“형형 저기 저기."
어? 저쪽에서 뛰어오는 건 분명 처룽이가 맞다. 언제부터 뛰어었는지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말을 잇기도 힘들어 보인다. 나시티 밖으로 삐쳐 나온 문신들도 꿀렁거리며 그와 함께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다. “아~ 형님 하마터면 비행기 못 탈 뻔했습니다.” “야! 잘 왔어!! 얼른 타자!” 사실은 처룽이를 만나면 엉덩이를 한대 걷어차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기다리던 그가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분노는 한순간에 반가움으로 바뀌고 만다. 신기하게도 전원을 바꾸듯 툭.
"지금이라도 와서 다행이지. 얼른 타자”
탑승장의 마지막 승객인 처룽이의 짐을 받았다. “형님 제가 말입니다. 빛의 속도를 일을 막 끝내려는데 또 갑자기...” 긴말이 뭐가 필요하겠나.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보장된 휴가이지만, 그놈의 휴가 한번 가기가 이렇게 쉽지가 않다. 오죽하면 더럽고 치사해서 휴가지까지 회사 컴퓨터를 들고 간다는 말이 나오겠냔 말이다. 어찌 보면 사실 나 하나 빠진다고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데 스스로가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더 잘해야겠다는 강박, 도태되면 안 된다는 과잉경쟁, 성장하고 있다는 자기긍정. 그렇게 스스로가 자기 착취의 주인이 돼서 말이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 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 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 주체는 완전히 타 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 한병철 [피로사회] 중-
“야 처룽아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 우린 너 떼놓고 가게 될 줄 알고 쫄아 있었어~"
최대한 기다리는 데까지 기다려보자고 수속을 미루다 보니 자리도 제각각, 세명 모두 각각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뭐 어때, 남자끼리 살대고 있으면 찝찝하기나 하지. 난 와인 마시고 잘 거니까 형은 지도나 미리 봐 두던지.” 헐렁한 바지에 깁스 같은 목배게를 한 지노가 말한다. “그래 고마워 지노야. 나랑 떨어져서 꼭 뚱뚱한 백인 아저씨 옆에 앉아라. 너 백인이 털 많은 거 알지? 쉐키.”
장시간 비행인데, 수다의 묘미도 없을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옆자리엔 금발의 파란 눈 미녀들이 앉는다. 이거 뭘까? 그렇게 처룽이가 늦었던 게 절묘하게도 지금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인가. 여행이 출발부터 너무 순조롭다. 비행기를 타면,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라고 하던데. 이번 경우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다. 내 옆에 앉은 그녀들은 비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생동감을 마구 발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 거기 손잡이에 USB 꼽는 곳이 있어~!”
내가 핸드폰을 보조배터리로 충전하자 이런 꿀팁까지 알려 준다. “어디서 왔어?” “우린 폴리쉬야” “폴리쉬?” 폴리쉬가 뭐지? 정치학인가? 광택제인가? “아니 폴란드에서 왔다고~!” 폴리쉬가 폴란드 사람이었구나. 미국에서 갈고닦은 영어실력인데, 실전에서는 꼭 이런 실수를 한다. 왠지 잘 풀리는 것 같더니. 정치인도 광택제도 아닌 폴란드 걸들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린다. 그럼 뭐 어때. “너네들은 어디 까지가?” 폴리시들은 잠시 프랑크프루트에 들렸다 다시 폴란드로 돌아 갈 거라고 했다.
“오~ 너네 그럼 프랑크프루트에는 가봤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앞으로 여행할 곳을 얘기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나도 리스본이 처음, 폴리시들도 프랑크푸르트가 처음. 가지 않은 곳에 대해 얘기하는 건 어차피 상상일 수밖에 없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이 날것 같고 더 기대가 되는 것 같고 더 호기심이 가는 것 같다.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어디든 상상만으로 즐거울 수 있다면 이 또한 여행이 줄 수 있는 즐거움 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비행기는 장장 12시간을 날아 우릴 프랑크프루트에 내려놓았다. 폴리시 소녀들은 프랑크프루트 여행을 시작했고, 우리는 얼마 없는 환승시간을 쪼개 공항에 있는 바(Bar)를 찾았다. 독일에서는 꼭 맥주를 먹어줘야 한다는 처룽이의 지론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리스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3시간을 더 비행해야 마침내 리스본에 도착할 수 있을 게다.
건너편에 앉은 지노는 다리를 꼬고 영화를 보고 있고 처룽이는 맥주를 많이 마신 탓인지 화장실을 왔다 갔다 거린다. 목적지를 향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저마다 가지각색이었고, 비행기는 무심한 듯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시속 900km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몇 시간 후면 짜짠 하고 리스본 거리의 생경한 모습을 보여주겠지? 그럼 난 지금부터 감탄할 준비만 차곡차곡 해두면 그만인 게다. 다음 간식은 뭐가 나올까나 뭉게뭉게 상상이나 하며 말이다. 바람소리와 엔진의 소음과 미세한 진동을 가로지르며, 비행기는 양탄자 같은 구름 위를 쉬지 않고 날았다.
/ 다음 편 계속 /
1화: 프롤로그. 나를 여행가라고 소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화: 조금 느린 여행 준비
3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1)
4화: 공항, 또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2)
9화: 알파마! 길을 잃어도 괜찮아
10화: 달동네 꼭대기 '오래된 창문'
11화: 우연이 즐거운 이유
13화: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생아
14화: 신트라! 왕궁보다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