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기 1
꼭 무언가를 빼놓은 듯한 짐 꾸리기에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집을 떠나, 대서양 건너 미국 동부의 뉴와크(Newark)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친 후에 바로 라스베가스행 비행기를 탔다.
동부에서 서부로 다섯 시간을 비행하고 나서 착륙하기 위해 기체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니, 산야의 광대한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서부의 주름진 땅이 시야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온다.
우리의 여정은 네바다주의 라스베가스(Las Vegas)를 시발점으로 하여 미국 서부의 주요 국립공원들을 순회하고 다시 라스베가스로 돌아오는 4주일간의 자동차 여행이다.
하늘이 맑고 태양이 눈부신 초저녁 라스베가스에 착륙하여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즐비하게 늘어선 슬로트 머신 들이다. - 라스베가스는 첫인상부터 역력히 '도박의 도시'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저녁에 스트립(Strip - 도박꾼들이 돈을 다 잃고 '알몸'으로 나온다 하여 라스베가스 대로를 이렇게 부름)을 따라 걸으니 길가의 대형 호텔들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 라스베가스의 인상 2, '밤의 도시'이다.
도로에 인접한 호텔 몇 군데에 들어가 보니 별천지다. 대체로 1층과 지하에 위치한 호텔 카지노에는 슬로트 머신 수천 대가 설치되어 있고 통 큰 손님들을 위한 포커 테이블도 수십 개가 넘는다. 저게 다 돈 먹는 기계들이야? 멀리서 보니 사람들마저 기계처럼 보인다. - 라스베가스의 인상 3, '기계의 도시'이다.
벨라지오호텔(Bellagio Hotel)에 저녁을 먹으려고 안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호텔인지 식물원인지 분간이 안 간다. 바닥에 깔린 화초와 나무의 청초함이 벽과 천장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화려한 장식들과 어울려, 금세 취할 만큼 황홀하다. - 라스베가스의 인상 4, '환상의 도시'이다.
카지노를 지나 뷔페식당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카운터에서 선금 내고 테이블 매니저를 따라가서 자리에 앉으니, 웨이트리스가 와서 음료를 내주며 얼마든지 또 시키란다. 뷔페 음식 진열대에는 아마 백가지는 될 만큼 이국적인 음식들이 가득한데, 접시에 무얼 담을지 모르겠다. 우선 한국 김치가 있어서 접시에 담아와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보니 테이블마다 음식 접시가 가득하다. 저걸 어떻게 다 먹지? 많은 식객들이 음식의 태반을 접시에 버려두고 한 접시 가득히 또 음식을 담아온다. - 라스베가스의 인상 5, '낭비의 도시'이다.
다음 날 아침 스트립의 동쪽 끝에서부터 길을 걸었다. 십자로 한쪽에 뾰족한 탑들이 잘 깎은 색연필처럼 하늘로 솟아 있는데 호텔 이름이 엑스칼리버(Excalibur - 아더왕의 보검)인 만큼 모양이 꼭 유럽의 고성 같다. 여기에서는 900석의 공연장에서 중세의 기사들이 싸움을 벌이는 쇼가 열린다.
호텔을 통과하여 모노레일을 타고 가니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는데,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집트의 신전 같다. 신기하게도 안의 엘리베이터가 피라미드의 경사면을 미끄러지며 올라가기 때문에 인클리네이터(Inclinator)라고 부른다. 밤이면 이 룩소르호텔(Luxor Hotel) 옥상의 피라미드 끝에서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라스베가스의 어두운 하늘을 밝힌다.
엑스칼리버로 다시 와서 육교로 십자로를 건너니 전날 밤에 본 마천루를 배경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뉴욕뉴욕호텔(New York-New York Hotel)이 나오고, 육교로 또 다른 십자로를 건너니 거대한 황금 사자가 앉아서 엠지엠(MGM) 영화사의 그랜드호텔(MGM Grand Hotel)을 지키고 있다.
그랜드호텔 안에는 슬로트 머신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불 빛이 환한 모퉁이에 유리 벽으로 막힌 우리 안에 사자들이 걸어 다닌다. 엊저녁엔 호텔 안에 식물원이 있더니, 오늘은 동물원이네. 그런데 애들은 별로 없고 어른들만 많을까? 이 도시에 추가할 인상이 하나 더 있다. - 라스베가스의 인상 6, '애들은 가라'이다.
호텔 밖으로 나와 서쪽으로 계속 걸으니 거리의 풍경이 모나코의 몬테카를로(Monte Carlo Hotel)로 바뀌고, 곧이어 에펠탑이 서 있는 파리(Paris Las Vegas Hotel)로 변한다. 여기서부터 거리의 사람들이 더욱 붐비기 시작하고 차들도 주춤거리며 신호등을 기다린다.
호기심에 길 따라 더 멀리 가 보고 싶긴 하지만, 아스팔트가 뿜어대는 뜨거운 열기에 못 이겨, 선풍이 반겨주는 파리라스베가스호텔 안으로 발을 드리니, 커다란 홀에 슬로트 머신이 꽊 들어 차 있고 천장화가 푸른 하늘 같은데, 그 아래에는 마치 파리에 온 것처럼 에펠탑이 다리를 뻗고 있다.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올지 모르는 낯선 거리에 다행히 이정표가 있어서 오후 4시까지 호텔 안의 미로를 쏘다니다가 그 앞에 다시 돌아왔다.
이정표를 따라 예약한 렌터카를 찾으러 갔다. 우리가 빌린 차는 풀사이즈의 포드 세단차인데, 대다수의 미국 차들이 그렇듯이 가솔린을 마구 소비하며 대용량 엔진에 밟기만 하면 나가는 자동변속기를 장착하고 있다. 수동식에 익숙한 우리는 처음부터 걱정을 했는데, 조작이 간단하고 주차장들도 넓어서 여행 중에 문제는 없었다.
라스베가스의 거리를 쏘다니는 즐거움과 카지노의 돈놀이,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여흥은 환상적인 무대예술이다. 스트립의 대형 호텔들은 주 수입원인 카지노뿐만 아니라 식당가와 공연장을 갖추고, 손님 끌기에 각축을 벌인다. 라스베가스 공항 안의 벽보는 물론이고 시내버스의 차체나 거리의 전광판들도 모두 호텔들이 내놓는 개그와 댄스, 마술과 곡예, 버라이어티쇼와 같은 무대예술 광고이다.
이러한 쇼들은 할인표 전문점에서 줄을 서서 사거나 광고지에 인쇄된 할인쿠폰들을 잘라서 쓰면 저렴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년간 장기 공연을 지속하는 인기 있는 쇼들은 할인표는커녕 미리 예약해 두지 않으면 좋은 자리가 없다.
저녁에 카(KA)라는 쇼를 보려고 MGM 그랜드호텔의 예약창구에 가보니 등급이 낮은 표는 매진되고 없어서, 상석의 표를 예약했다. 공연 시간에 맞추어 가니 공연장의 규모가 초대형인 만큼 대기 중인 인파도 대단하다. 아쉽게도 안내인이 검표하고 자리에 앉혀 주기까지 극장 내의 행동이 제약되어 있고 카메라 사용은 금물이다.
어둠이 객석을 덮고 무대 좌우에서 각광이 밝혀지자 공중을 나는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굉음과 연기, 레이저 광선의 산란으로 귀와 시선을 무대로 돌리니, 가히 20미터 높이의 무대가 수직으로 일어서며 불꽃을 일으킨다. 배우들은 회전하는 무대에 거미처럼 붙어서 곡예를 하는데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미국 도착한 지 3일째이니 서부 국립공원 탐방의 첫 번째 행선지 데쓰밸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으로 떠나야 한다. 하지만 처음 가는 곳의 이름이 하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행장을 갖추고 호텔을 나와 MGM 교차로에서 스트립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가니 스트립 거리의 찬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앞서 가던 차들도 점차 갈림길로 빠져나가 이내 텅 빈 고속도로를 혼자서 달려가고 있다. 죽음의 계곡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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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랜드캐년 사우스림(+우팥키공원과 화산, 메테오르 크래이터, 윈슬로)
11.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을 향하여(+그랜드테튼 국립공원)
13. 쏠트레이크씨티(+그레이트쏠트레이크, 빙감캐년마인)
14. 브라이스캐년(+코다크롬배이슨, 라스베가스를 향하여)